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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53화 (53/203)

53화. 괴호 (3)

악동 같은 속삭임에 삼랑이 되물었다.

“그를 알고 계신다고요……?”

“대사형과 같은 시기에 오대세가의 후기지수였던 사람이니까.”

삼랑은 눈을 끔벅였다. 분명 제하량과 팽문형은 같은 시대의 사람이긴 했다. 다만 그게 예결의 입에서 흘러나오자니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문 공자가 팽문형과 비슷한 나이여야 하지…….’

문 공자의 시간이 멈춘 상태라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내가 아는 팽문형은 하북권호였는데 대체 어쩌다가 괴호가 된 건지 모르겠어.”

“이십 년 만에 세상 구경을 하셨다고 했죠? 그럼 지금의 괴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시겠군요.”

“괜찮다면 조금만 귀띔해줬으면 하는데.”

예결의 요청에 삼랑은 입을 열었다.

“괴호, 내지는 괴협 팽문형은 하북팽가의 미친 백호를 점잖게 부르는 말입니다. 그에게 당한 사파의 무인들은 대놓고 광호라고 부르지요.”

광호. 예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쩌다 그런 소리를 듣게 된 거야?”

정파, 그것도 오대세가 출신의 무림인에게 붙기엔 지나치게 사파스러운 별호였다.

현대로 따지자면 아이들 보는 마법소녀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어둠의 다크니스라고 불리는 꼴 아닌가.

“중원을 유랑하다가 악행이 눈에 띄면 원인을 삭초제근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거든요. 아이에게 앵벌이한 돈을 뺏어가는 건달을 추적해 윗선인 사파까지 작살낸 적도 있습니다. 그 일로 사파맹의 추적이 붙어 두 팔이 부러질 때까지 싸웠다고 합니다. 그 상태가 되고서도 이로 물어뜯고 발로 걷어차며 한 놈이라도 더 해치우려는 독기에 오히려 사파 무림인들이 도망쳤다고 하지요.”

“그걸로 광호 소리를 듣게 되었구나.”

예결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정확히는 녹림채주에게 뇌물을 받고 산적의 만행을 눈감아주던 관리를 잡아다가 옷을 벗겨서 성벽에 매달아 놓은 사건으로 광호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무림과 관은 불가침인데……. 그 선을 넘었으니까요.”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관무불가침은 중원의 오랜 불문율이었다.

“현 하북팽가의 가주인 팽문형의 아우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손을 썼다고 들었습니다만. 예전에 소금 밀거래하던 자들을 고발한 적이 있어 현상수배 단계까지는 안 간 것으로 압니다.”

삼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소금 밀거래? 그건 또 무슨 일이야?”

“그 외에도 여러 일화가 있습니다만, 나중에 들려드리겠습니다. 팽문형의 이야기를 하자면 하루해가 부족할 테니까요.”

“끙. 밖에서 본인이 기다리고 있으니 어쩔 수 없군.”

“그 외에도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머리가 반만 하얗고 반만 검은 외양 때문에 알아보기 쉬워 뒤가 구린 놈들은 다들 괴호를 피해 다닙니다. 어쩌다 머리가 그렇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본인도 말하고 다니지 않더군요.”

삼랑은 뭔가 영약을 잘못 먹어서라는 설과 비급을 거꾸로 읽어서라는 설이 가장 유명하다고 덧붙였다.

“파란만장하게 살았네. 예전에는 호탕한 성격의 후기지수로 알려져 있긴 했지만 협행을 그렇게 열심히 다녔단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협행보다는 술 먹는 걸 더 좋아하는 흔한 하북팽가 사람이었다. 별호를 술 내기로 딴 게 분명하다는 농담에도 웃어넘겼다는 소문도 들어본 적 있다.

“뭔가 심경에 변화를 준 것이겠지요.”

“이십 년은 정말 긴 시간이구나…….”

예결은 중얼거리다가 삼랑이 여전히 검막을 유지하고 있음에 새삼 감탄했다.

검막은 내공 소모가 엄청난 편인데 젊어 보이는 삼랑이 이렇게나 오래 버틸 줄 몰랐다.

예결은 옷소매에서 뱀뱀이를 풀어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잠시 쉬고 있어.”

산에서 내려오는 길 내내 팔에 매달려 있느라 고생 많았다는 의미로 이마를 문질문질 만졌다. 기분 탓일까, 평소와 달리 미묘한 요철이 느껴졌다.

착각이겠거니 하며 예결이 손을 떼는데 뱀뱀이가 하품했다. 조그마한 녀석이 입을 쩍 벌리는 모습이 퍽 깜찍했다.

“졸린가 보네.”

“벽조목을 만드느라 혹사해서 지친 거 아닙니까?”

“음.”

정확히 말하자면 그 반대다. 벽조목을 만드느라 방출한 전류를 죄 먹어 치운 뱀뱀이는 엄밀히 말해 지친 게 아니라 과식을 한 거였다.

이를 삼랑에게 알려주는 대신 예결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쑥쑥 커라.”

뱀뱀이에게 천 조각을 덮어주자 금빛 뱀은 아래에 동그란 똬리를 틀었다. 이를 흐뭇하게 바라본 예결은 삼랑을 채근했다.

“내려가자. 팽 대협이 기다리겠어.”

잠시 한숨을 내쉰 그녀는 검막을 거뒀다.

아래로 내려오니 팽문형은 이미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저도 한잔 주시지요.”

넉살 좋게 건너편에 앉으며 잔을 내밀자 동이째 들이켜고 있던 팽문형이 점소이에게 손짓했다.

“이봐. 새 술을 좀 내오게.”

“어떤 걸로 가져올까요?”

전문직 특유의 관찰력으로 화끈한 술꾼을 알아본 점소이의 눈이 반짝였다.

“뭐든 좋은 걸로!”

수염에 맺힌 술 방울을 쓱 닦아낸 팽문형은 붉어진 눈가를 한 채 예결을 빤히 바라봤다.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그러네만.”

슬쩍 뜸을 들이던 팽문형이 입을 열었다.

“혹…… 누가 자네의 이름을 지어줬는지 물어도 되겠나?”

“예전에 저희 마을을 구해주신 한 협객분의 이름을 따왔다고 들었습니다.”

“협객이라.”

“예. 저희 마을은 청해에서도 무척 외진 곳에 있어 관군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파 무인이 쳐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매일매일 착취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마두와의 생사결에서 졌는데 죽지 않기 위해 달아난 자였다는군요. 부상을 회복하기 위해 숨어들 만한 장소를 찾다가 저희 마을로 왔다고 합니다.”

예결은 제하량의 숱한 업적 중 하나를 끌어왔다.

이른바 추혼일도 사건이다.

“추혼일도 탈비령.”

팽문형도 이 사건을 아는지 입술을 달싹였다.

“추혼일도는 마을 사람을 부리기 위해 갓 태어난 저를 비롯한 어린아이를 인질로 잡았다고 합니다. 그때 제하량이라는 이름의 협객께서 저희 마을을 구해주셨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감히 그분의 이름을 제게 주셨지요.”

“아아. 그랬군, 그랬어…….”

팽문형의 눈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일부러 상대의 감수성을 자극했던 예결도 놀랄 정도의 효과였다.

“설마 그래서 자네의 부모님이 곤륜으로 보내려 했던 건가?”

예결은 나직하게 긍정했다.

“나름 곤륜과 연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긴, 같은 이름이지만 자네는 정말 작군. 작아. 그 녀석은 컸는데 말이야…….”

우렁우렁한 목소리는 천천히 작아졌다. 혼잣말처럼 들리긴 했으나 예결은 일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 녀석이라면…… 설마?”

“그래. 아마 그 설마가 맞을 것이다. 정말 좋은 놈이었는데.”

팽문형은 혀를 찼다.

때마침 점소이가 가져온 술병을 받아 든 팽문형은 이를 예결의 잔이 넘치도록 부어주며 말했다.

“제하량은, 곤륜운룡은 협의지심을 사람으로 빚어낸 것만 같은 이였다.”

예결은 입술 축이는 시늉을 하다가 빙그레 웃었다.

‘이거지.’

드디어 대사형을 아는 동시대인을 만나니 속이 탁 트였다.

홀로 산 정상에 올라 대사형이 최고라고 외쳐봤자 메아리 외에 누가 알아주겠는가? 그런데 여기 눈앞에 대사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아는 동지가 있었다.

팽문형을 살살 꼬여 정보를 알아내려고 했을 때만 해도 예기치 못한 호재였다.

“저는 어릴 때라 협객분께 도움을 받은 기억이 없지만 괴호 팽문형 대협께서 이리 극찬하시는 걸 보면 분명 대단한 분이셨을 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본디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든 사근사근하게 장단을 맞춰줄 작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예결은 진심으로 팽문형의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럼! 비록 오대세가는 아니지만 구파일방에서 배출한 당대 최고의 후기지수였지. 어린아이나 여자를 지나치는 법이 없고,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은 노인을 구하겠다고 목숨을 걸었어.”

“세상에. 그 협객분이 그렇게 대단한 분이셨다고요?”

어서 더 대사형을 칭찬해! 아는 걸 다 털어놓으라고!

예결은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기 위해 술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다들 곤륜의 젊은 용이라고 하면 제 형을 떠올렸네. 청해뿐이 아니라, 온 중원에 사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영웅이었지.”

대사형 칭찬이 최고야. 짜릿해.

예결은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원래는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마셨는데 오늘따라 유독 달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황보 누이도 제 형을 졸졸 따라다니곤 했는데…….”

예결은 황보 누이라는 언급에 멈칫했다. 분명 대사형이 한참 중원을 누비던 시기에 그와 자주 엮이던 후기지수가 있었다.

황보세가 출신의 빼어난 무인으로 삼룡삼호사봉 중 한 명이었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별호가 채봉이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생각났다. 대사형의 협행에 종종 따라다니기도 했으며 그가 큰 부상을 입었을 때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다고 들었다.

요조숙녀는 군자의 좋은 짝이라(窈窕淑女 君子好逑)1), 다들 제하량이 그녀에게 마음을 주었다고 말하곤 했다. 만약 제하량이 곤륜의 도사가 아니었다면 그녀와 혼례를 올렸으리라고 말하는 자도 더러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금의 대사형에겐 부인이 없어서 지나치게 안심하고 있었다.

예결은 눈을 질끈 감고 기원했다.

‘천지신명이시여, 부디 채봉에게 토끼처럼 깜찍한 남편과 여우처럼 요염한 애인과 사슴처럼 청순한 구애인을 내려 주십시오.’

대사형이 토끼처럼 깜찍하고 여우처럼 요염하고 사슴처럼 청순하니 최소 세 명이 필요했다.

“내가 그 나이에 품은 야망이라곤 중원을 누비며 모든 술을 다 마셔보겠다는 것 정도였는데…….”

팽문형은 회한에 젖은 음성으로 뇌까리다가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제 형은 죽었어. 흐흐……. 죽어버렸어.”

1) 『시경(詩經)』, 국풍(國風) 주남(周南), 관저장(關雎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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