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괴호 (4)
흐느낌인지 술주정인지 그도 아니면 헛웃음인지 도통 분간이 가질 않았다.
“예?”
삼랑에게로 휙 돌아갈 뻔한 고개를 가까스로 고정한 예결이 거푸 물었다.
“죽었다니요?”
‘대사형은 멀쩡히 살아 있는데?’
뻐근해진 목을 주무를 여유조차 없이 초조한 시선으로 괴호를 바라봤다.
실제로 죽었던 건 제하량이 아니라 이쪽이다. 부활이 강호의 새 트렌드가 아닌 이상 제하량이 어찌 살아 있겠는가?
“참변이 있었지. 실로 끔찍한 일이었어.”
남이야 마시던 술이 다 깨든 말든, 괴호는 취기에 말을 이어갔다.
“혹, 곤륜혈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결은 초조한 마음에 물었다.
“젊은 나이로 보이는데 그 시절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모양이군.”
취한 중에도 제법 예리한 시선이 예결의 낯을 훑었다. 의도한 것보다 노골적으로 나서게 된 예결은 말을 어영부영 수습하는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청해에 기반을 둔 상인 아닙니까. 곤륜의 협객께서 저희 마을을 도와주셨으니 곤륜혈사 후에 다들 그분의 안위를 걱정했었습니다.”
대사형의 의협심 넘치는 과거는 어디에 가져다 대도 완벽한 변명이었다.
“아아. 맞아. 그랬지. 그래…….”
팽문형은 예결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예상한 대로 곤륜혈사에서 그가 희생된 게 맞네. 마교가 발호하고 곤륜이 놈들의 발목을 잡았지. 하지만 전면전만은 최대한 늦춰야 한다는 이유로 정파무림은 곤륜을 외면했다네.”
“위험한 발언을 하시는군요.”
예결은 눈을 내리깔며 속삭였다. 괴호가 낄낄 웃었다.
“위험한 발언이지. 암. 그래서 내가 광호 소리를 듣는 게 아니겠나? 미친놈이 지껄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이는 없으니까.”
팽문형은 자신이 광호로 불린다는 사실도 아는 눈치였다.
‘삼랑의 입에서 흘러나온 괴호의 거침없는 행보가 전부 의도된 건가? 제정신인 사람이 하지 않을 짓만 골라 하긴 했지만…… 운이 좋았다기엔 아슬아슬한 짓만 골라 한 거 같은데.’
교활한 사내처럼 보이진 않았으나 의외로 심계가 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팽문형의 아우라는 자가 머리가 잘 굴러가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파무림의 외면 속에 홀로 남겨진 곤륜파는 끝까지 항전했다더군. 용봉지회의 회주인 곤륜운룡이 가장 앞장섰다지.”
여기까진 팽문형이 말하는 것과 예결이 아는 바가 일치했다.
“덕분에 목숨을 건진 곤륜의 장문인은 혈사 후에도 제자가 살아 있다고 주장했네. 무림맹에 마교가 납치한 곤륜운룡을 구할 인력을 내달라고 몇 번이나 읍소했지.”
“그런…… 비사가.”
대사형이 마교에 납치당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예결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마교가 곤륜의 영혼이며 새로운 대들보나 마찬가지인 젊은 영웅을 어떻게 대했을까?
‘아니야.’
예결은 깊게 들어가려던 생각을 잡아챘다.
‘대사형은, 살아계시고. 확실하지도 않고, 또…….’
하지만 살아있기만 하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삶이라 할 수 있던가?
예결은 식탁 아래로 숨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곤륜의 장문인은 말년에 이르러 자신이 제자가 죽었다고 인정했네. 아무리 강건한 무인이라도 그 나이에 짊어지고 있던 문파가 몰락하고 가장 아끼던 제자를 잃었으니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을 게야.”
곤륜의 장문인은 백양진인의 사형으로 도호는 백운이었다.
백운진인은 입문이 비교적 늦은 편이던 제하량의 재능을 알아보고 제자로 삼아 아꼈다. 예결이 기억하기로도 그는 백양진인에 비할 데 없이 덕이 높았다. 무인이면서도 도인이었던 장문인은 두루 명망이 높았다.
‘그렇다면 백운진인이…… 대사형이 살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건가? 도대체 왜?’
곤륜의 백양진인은 대사형이 파문당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외부인인 괴호 팽문형은 대사형이 죽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언젠가 곤륜의 미래를 단단한 반석 위에 올려놨을 인재를 죽은 자로 둔갑시켜 외부에 알리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가…… 문파의 치부가 되었다는 것.’
어떻게 해야 곤륜의 모두가 경애하던 사내가 모두가 숨길 수밖에 없는 존재로 추락할 수 있단 말인가?
‘마교.’
결국 단서는 신강의 십만대산으로 이어진다.
예결은 순간 현기증이 날 것 같은 기분에 술잔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 제 한 몸 던져 대사형을 살리고 만족할 게 아니라 그 마두 놈의 멱을 따버렸어야 했나?
그렇다고 하여 지나간 제하량의 과거가 바뀌진 않을 테니 이는 결국 예결 본인의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생각일 뿐이었다.
“믿을 수 없었어. 곤륜운룡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 어린 마음에 한 번만이라도 천하제일 후기지수를 이겨보고 싶어 덤비기만 했던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말이야. 기회가 닿았을 때 말이라도 제대로 섞어볼 것을, 제대로 알아가기도 전에 내가 가장 존경한 사내가 죽은 게야.”
이제 예결은 제 얼굴이 멀쩡한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다만, 그간 갈고 닦은 가면이 버티길 기원할 따름이다.
다시 태어난 후, 그를 접하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이질감을 느꼈다. 결과는 늘 같다. 배척하거나, 밀어내거나.
이는 친부모도 예외가 아니었다.
버려지지 않으려면 주변을 속여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저 자신마저 속여넘길 필요가 있었다.
“곤륜운룡이라. 정말 대단한 협객이었던 모양이군요.”
늘 그러했듯, 예결은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너는 협객 제하량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곤륜운룡의 손에 구원받은 마을에서 태어났어.’
예결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전생의 궤적을 쫓아 수없이 파고들었던 무협지 속의 활자를 떠올렸다.
강호에서 태어나 무공을 익히고 큰 성취를 이루고, 배신당할 때도 있고 패배할 때도 있으나 종래에는 모든 역경을 딛고 복수에 성공하거나 승리를 거두고 사랑에 빠지며 기어이 행복해지던.
제하량만은 주인공이 아니었던 그 숱한 가짜 이야기들을.
“그래. 그랬지.”
상기된 얼굴로 꿈꾸듯 빛나는 시선에는 한 점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괴호가 조용히 뇌까렸다.
“대단한 협객이었고, 그보다는 좋은 사람이었지. 그런 이들은 전부 일찍 떠나더군. 그는 더 오래 살았어야 했는데.”
중년의 강건한 무림인이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에 예결의 마음이 울렁거렸다.
“오래도록 멈춰 있던 강호에 새바람을 불어넣을 인재가 그리 떠나다니 하늘도 참으로 무심해.”
팽문형은 술동이를 쭉 들이켜 비우더니 옆으로 대충 던져버렸다. 점소이가 눈살을 찌푸리자 예결은 호주머니에서 은원보를 꺼내 탁자에 올려놨다.
왈왈 짖으며 네 발로 기는 진상이어도 귀여운 강아지로 보이게 만들 금액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점소이는 슬그머니 주방에 다녀오더니 새 안주와 술을 동이째 들고 와 팽문형에게 안겼다.
술을 다 마셨는데도 새 술이 나타난 게 이상하지도 않은지 팽문형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뻗어 술 단지를 입으로 가져갔다.
“괴호 팽문형 대협께서도 대단한 협객이신걸요.”
“남의 그림자를 쫓아 흉내만 내는 거지.”
겸양의 말이라기엔 지나치게 씁쓸했다. 예결은 그의 앞으로 고기가 담긴 접시를 밀어줬다.
“이것도 드시지요. 빈속에 술만 들이부으면 대단한 무림인이라도 탈이 날 겁니다.”
대사형 칭찬해주는 인간이라면 고기반찬으로만 한 상 가득 깔아줄 수도 있었다.
“끙. 아들뻘이 공자에게 뭘 얻어먹을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이야기 값이라 생각하시지요. 오늘 중원 어디를 가도 듣지 못할 비사를 알려주지 않으셨습니까?”
대사형의 입은 고사하고 진영이나 삼랑에게서도 이런 말은 듣지 못했을 거다.
“내가 그랬던가?”
괴호가 잔을 노려보며 괴롭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술은 이래서 문제야.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드는군.”
팽문형은 힐긋 예결을 바라보더니 물었다.
“외진 마을이라 그의 죽음이 알려지지 않은 건가?”
“강호에 협객은 장강의 모래알처럼 많지 않습니까? 마을 어르신들께서는 그분의 이름이 널리 퍼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예결은 일부러 미간을 좁히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어쩌면 곤륜혈사 소식에 불길함을 느끼고 일부러 알아보지 않으신 걸 수도 있겠군요.”
그 말 뒤에는 쓴 침묵이 남았다.
“그래도 중원이 잊은 영웅을 기억해주는 장소가 있다니 참으로 기쁘군.”
“사람이 어찌 은혜를 쉬이 잊겠습니까?”
그건 금수나 하는 짓이지.
“강호는 곤륜의 희생을 잊었네. 그 자리에서 죽어간 목숨도 까맣게 잊었어.”
“…….”
예결은 침묵했다.
희생이라.
솔직히 그는 제 죽음이 무림의 역사에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대사형이 살아남아 미래에서 빛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정작 제하량의 이름은 곤륜의 만년설 아래 파묻혀 영영 올라올 수 없는 신세라니.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울컥 치밀었다가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내 그래서 자네가 반갑군. 어딜 가도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어려우니까.”
팽문형의 입이 가벼운 줄 알았더니, 예결이 느낀 것과 비슷한 동지 의식을 느낀 모양이었다.
“제 대협을 기억하는 분들이 없으십니까? 팽 대협과 같은 시기에 활동한 분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결은 그 많던 제하량의 추종자를 떠올리며 물었다.
낭중지추라고, 제하량은 곤륜에서만 아이돌 노릇을 한 게 아니었다. 시기하는 이들이 많은 만큼 그를 선망하는 이들도 많았던 것이다.
“너무 괴로워 언급하지 않으려 하거나, 지나간 일로 취급하거나……. 어떤 이는 화를 내기도 한다네. 어렸을 때는 몰라도 지금은 정파무림의 외면을 알게 되었으니 부끄러운 모양이야.”
팽문형은 쓸쓸히 뇌까렸다.
“암. 부끄럽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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