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괴호 (5)
객잔의 방으로 올라오는 내내 예결은 멍한 상태였다.
괴호와 나눈 이야기를 전부 들은 삼랑의 낯이 가라앉은 상태였으나 이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팽 대협이 방에 들어가는 건 확인했어?”
“예. 침상에 잘 던져두고 왔습니다.”
“가차 없네.”
“무거우니까요.”
삼랑은 침상에 털썩 걸터앉은 예결의 맞은편으로 교의를 끌고 오더니 거기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제야 삼랑의 표정이 퍽 심각하다는 게 눈에 들어온 예결이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조금 전, 제법 위험한 줄타기를 하셨습니다.”
“제하량이라는 이름을 댄 것? 아니면 팽문형에게서 당시의 일을 캐낸 것?”
삼랑은 눈을 내리깐 채 둘 다입니다, 하고 답했다.
“하북팽가의 직계인 데다가 그 자신이 절정고수인 만큼 괴호의 행보에 관심을 보이는 이가 더러 있을 겁니다.”
“어쩌면 괴호를 광호로 만든 배후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지.”
예결이 태평하게 덧붙인 말에 삼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은 아니야.”
슬쩍 덧붙인 말에도 삼랑의 낯은 풀리지 않았다.
“계획적이라서 문제가 될 거라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문 공자가 대담하다는 건 삼랑도 잘 알았으나 이번에는 정말로 위험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대세가 중 하북팽가의 직계, 그것도 가주의 형제에게 주군의 이름을 댈 줄이야.
예결의 놀라운 화술과 임기응변으로 일이 매끄럽게 봉합되긴 했으나 삼랑의 가슴은 여전히 벌렁거렸다.
“음. 확실히 모든 게 계획대로만 되는 건 아니긴 해.”
이번 장강행을 떠올리며 예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다 구워삶았다고 생각한 당서악이 예상보다 극악무도한 인간이었지.
“하지만 팽문형을 그냥 보내주면 외부에서 곤륜운룡 제하량이 죽은 사람 취급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겠지. 그리고 혈사의 배경에는 정파무림의 외면이 있었다는 것도.”
무엇보다도 예결은 제하량이 살아 있다고 주장하며 그를 구출하려고 한 장문인이 막판에 마음을 바꾼 이유가 궁금했다.
팽문형이 아니었다면 얻지 못했을 퍼즐 조각이다.
그러나 고작 이 정도 단서로는 사건의 윤곽조차 그리기 어렵다.
“이십 년 전, 추혼일도가 다녀간 마을을 통째로 사들이도록 해.”
“예?”
“거기 있는 사람들은 원하는 곳으로 옮겨가 살 수 있게 해 주고.”
삼랑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신분 세탁을 시도하는 것 같진 않았다. 이렇게까지 들쑤셔 놓으면 누구든 수상함을 알아챌 테니까.
“호랑이가 키우고 싶어질 수도 있을 거 같아서.”
예결은 방긋 웃었다.
“덫을 미리 마련해 두려고.”
“괴호에게 얻을 건 다 얻었다고 생각했는데요.”
마뜩잖은 낯을 한 삼랑의 말에 예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응? 팽문형 대협 이야기가 여기에서 왜 나와? 나는 호랑이 한 마리를 이야기했을 뿐인데.”
삼랑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답했다.
예결이 이렇게 의뭉스럽게 나온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돈 없습니다.”
“음.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그 말에 예결은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포기한 건가?’
삼랑은 불안이 가시지 않는 시선으로 예결을 올려다봤다.
‘쉽게 포기할 리가 없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른 사천으로 가자. 새로 생긴 장물도 팔아먹어야지.”
“중원삼대상단은요?”
삼랑은 예결의 허황한 꿈을 냉큼 끄집어 그의 앞에 흔들었다.
“괜찮아. 나는 벽조목도 한 번에 만들어낸 유능한 상단주니까. 마을 하나 정도는 타격 없어.”
나름 진심이었다. 그러나 삼랑의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뱀뱀이가 만들었다면서요.”
“뱀뱀이가 나고 내가 곧 뱀뱀이지. 안 그래?”
예결이 손을 내밀자 뱀뱀이가 얼굴을 드러냈다. 저도 모르게 그 반짝반짝한 비늘을 탐욕스럽게 바라보던 삼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중원삼대상단 타령이 안 먹히다니, 어떻게든 그 마을을 손에 넣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당장은 아니어도 팽문형이 가짜 ‘제하량’을 찾기 위해 그 마을을 찾아갈 가능성이 있긴 했다. 그러나 삼랑은 아무리 생각해도 예결이 괴호를 필요로 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팽문형은 하북팽가 출신이긴 해도 혼자 떠돌아 마땅한 세력조차 없는 방랑자 아닌가.
‘진영이 필요해.’
한 번 사는 인생 편하게 살고 싶은 삼랑은 써먹기 좋은 머리의 주인이 여기 없다는 사실에 애석함을 느꼈다.
주군은 문 공자의 머리가 얼마나 팽팽 돌아가는지 좀 알아야 했다.
‘그래야 이 가엾은 삼랑 말고 진영을 쥐어짜시겠지.’
“여기도 흑점 지부는 있습니다만.”
끙끙 앓던 삼랑이 떠보듯 꺼낸 말에 예결은 뻔뻔하게 답했다.
“삼랑이 눈치가 없네. 지금 흑귀 님도 겸사겸사 만나려고 이러는 거잖아. 미리미리 친분을 도모해놔야 앞으로 거래를 매끄럽게 하지.”
거래보다는 관계를 매끄럽게 만들겠다는 흑심으로 가득한 발언이었다.
예결의 속내를 꿰뚫어 볼 수는 없어도 본능적으로 수상함을 느낀 삼랑이 애원했다.
“제발 제 간도 좀 생각해 주십시오. 문 공자를 모시기 전과 비교하면 반의반 정도로 줄어들었을 겁니다.”
삼랑의 우는 시늉은 악어의 눈물만큼이나 신빙성이 없었다. 예결은 심각하게 고민하는 척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구미호가 삼랑을 먹으려고 하다가도 먹을 게 없다고 놓아주겠네. 어서 내게 감사하도록 해.”
그야말로 입을 열 때마다 뻔뻔함을 갱신하는 수준이었다.
“세상에 구미호가 어딨습니까.”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삼랑이 입을 열었다. 먹히지도 않을 약한 척을 고집하느니 후처리를 연구하는 게 더 나을 거 같았다.
“일단, 알겠으니까 쉬십시오. 사천지부에 갔다가 다시 장강으로 향하려면 보통 바쁜 게 아닙니다.”
후 하고 유일하게 켜져 있던 촛불을 불어서 꺼 버리자 방이 어둠에 잠겼다.
“있지, 삼랑.”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삼랑은 방을 나서기 직전 등 뒤에 닿은 부름에 우뚝 멈추어 섰다.
“대사형이…… 내가 그분의 과거를 캐는 걸 막고 싶어 하실까?”
“글쎄요.”
평소의 삼랑답지 않게 무뚝뚝한 어조였다.
“저는 문 공자를 막으라는 명령은 받은 적이 없습니다.”
“…….”
“문 공자께서는 지금까지 그랬듯,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유일하게 빛이 흘러들어 오던 문이 닫혔다.
벌렁 뒤로 누운 예결은 잠시 후에 몸을 웅크렸다. 뱀뱀이가 꾸물꾸물 침상으로 기어들어 왔다.
은인의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금빛 뱀은 제 머리를 예결의 손가락 끝에 문질렀다.
무얼 하나 싶어 가만히 있던 예결은 손가락 끝에서 뭔가 요철을 느끼고 멈칫했다.
“음?”
뱀뱀이를 얼굴 가까이 당겨서 확인하니 마치 새끼 고양이의 이빨처럼 자그마한 뿔 두 개가 머리에 새로 돋아난 게 보였다.
“천년뇌각망이라더니…… 뿔도 나는구나?”
예결의 말에 뱀뱀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러자 뿔에서 전류가 차르르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힘을 쓰면 꿀떡꿀떡 받아먹기만 하길래 한참 크는 나이구나, 하긴 했는데. 이제 몸에 깃든 힘을 밖으로 꺼낼 수도 있게 된 거야?”
뱀뱀이가 바로 그거라는 듯 몸을 꿀렁꿀렁 흔들었다.
비슷한 성질의 힘을 가져서인지 눈만 마주쳐도 뜻이 통하는데 굳이 덩실덩실 움직이는 뱀뱀이를 보고 있노라면 예결의 가슴은 제법 말랑말랑해졌다.
퍽 오래 침묵하던 예결은 불쑥 입을 열었다.
“난 대사형이 살아남아 있기만 하면 분명 다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직한 중얼거림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게 아니었나 봐.”
어린 예결에게 제하량은 영웅이었다.
비단 그가 곤륜의 제자라서가 아니었다. 제하량이 곤륜운룡이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치기 훨씬 전부터 예결은 그의 존재를 알았다.
그래서 제하량이라면 무엇이든 이겨낼 거라고, 대사형의 앞에 아무리 대단한 고난과 역경이 있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무심코 생각했나 보다.
현실에서 읽어본 몇 권짜리 책에 살아남은 제하량의 인생을 짜 맞춰 상상하곤 했다. 무협지의 주인공들이 모두 그랬듯 대사형은 영웅이 되어 모두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을 거라고.
하지만 지금, 예결의 손에 놓인 고작 한 줌짜리 단서가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제하량의 삶은 안녕하지 못했다고.
본디 그가 누렸던 명예는 오간 데 없이 세월 속으로 사라졌고, 지금의 그에게 남은 것은 잘해야 오욕뿐일 거라고.
뱀뱀이가 예결의 검지 위에 턱을 괴고는 빤히 바라봤다.
그래서 여기에서 멈출 거냐고 묻는 듯 동그래진 눈에 예결은 픽 웃었다.
“그럴 리가. 내가 갈 수 있는 데까지는 가 봐야지.”
어쩌면 중원에 돌아오게 된 것이 운명이 아니었을까?
예결은 다른 에스퍼가 숱하게 떠들어대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 언젠가 만나게 될 가이드만을 기다리며. 구역질 나는 매일매일을 견딘다.
그들은 예정된 파멸을 낭만적으로 포장하는 광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여기, 예결은 자신의 운명을 만나고야 말았다.
죽음의 문턱을 두 번 넘어, 세계를 뒤바꾸고 시간까지 넘어서야 만난 내 가이드.
예결에게 있어서 제하량은 운명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예결이 해야 할 일도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할 일이 많아졌네.”
예결은 뱀뱀이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청해상단을 중원삼대상단의 반열에 올려놓고, 당서악을 처리하고, 흑귀와 친분을 쌓고, 그리고 또.
‘내 가이드에게 손을 댄 이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찾아내야지.’
예결은 가물가물 눈이 감겨오는 걸 느꼈다. 그는 들이닥치는 잠기운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내맡겼다.
내일은 일찍부터 움직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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