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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56화 (56/203)

56화. 궁지에 몰린 쥐는 (1)

강변의 나루터에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무척 북적이던 예전에 비하면 사람 수가 적었다.

봇짐을 진 상인들은 국수가 불어 터지도록 한 입도 먹지 못한 채 막막한 시선으로 강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군.”

“장강에서 큰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짜하지 않나.”

“그동안 어찌나 평화로웠는데 이렇게 갑자기?”

상인 중 한 명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난 여기 오는 길에 무림인이 모여 있는 걸 봤네. 남궁세가의 창궁기였어.”

“아이고. 계약 때문에 사흘 내로 강을 건너야 하는데. 언제 시작될지 언제 끝날지 아무도 알 수가 없으니…….”

가만 귀를 기울이던 예결은 국수 그릇을 들어 국물까지 싹 비웠다.

마지막으로 가이딩을 받은 게 벌써 며칠 전인지라 맛이 선명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의무적으로라도 속을 채우려 하는 중이었다.

“장강의 민심이 심상치 않네.”

건너편의 삼랑이 예결 앞으로 음식을 밀어주며 답했다.

“교룡왕이 움직이는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인데 사천당가와 남궁세가까지 장강 유역에 모습을 드러내니 다들 놀랄 수밖에요.”

현재 두 사람은 강을 건너려는 오누이처럼 가장한 상태였다.

팽문형은 객잔에 둔 채로 먼저 장강으로 떠나왔다. 대신, 예결은 점소이에게 서신 한 통을 맡겨놨다. 술독에 처박힌 팽문형이 일어날 때면 그에게 전해질 것이다.

예결은 잘게 썬 죽순을 입으로 가져갔다. 맛은 없지만 식감이 재미있어서 조금 멍하게 우물거리다가 삼킨 후에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탈 배는 언제 오지?”

“한참 물길을 따라 이동하는 중이라 들었습니다. 조금 아슬아슬하긴 해도 일이 시작되기 전엔 도착할 테니 염려 마십시오.”

그때였다.

“거기 두 사람은 어디까지 가는가?”

건너건너 탁자에 앉아 있던 사내가 그들에게 다가오더니 예결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낯이 누렇게 뜬 것 빼고는 평범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사천까지 갑니다.”

젓가락을 고쳐 쥔 삼랑이 조용조용한 음성으로 답했다.

예결이 보기엔 여차하면 저걸로 상대의 눈이든 목이든 꿰뚫어 버리겠단 티가 역력한데 정작 목소리는 얌전하기 짝이 없었다.

“이 난리 통에?”

“어릴 적에 저희를 길러주신 조모님이 병상에 누워 계신지라…… 하루라도 빨리 가서 뵈어야 하거든요.”

“허어. 안타까운 일이군.”

남자가 눈을 도르륵 굴렸다.

“딱한 사정이 안타까워 그러는데, 내 웃돈을 주면 장강에서 가장 빠른 배에 탈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주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지만 그럴 여력이 되지 않는지라.”

“조모님이 살아 계실 때 만나 봬야 하지 않겠나? 괜히 돈을 아끼다가 임종을 지키지 못하면 가슴에 한이 맺힐 게야.”

예결은 젓가락을 놓고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척 보기에도 사기꾼 같은 사내가 계속 삼랑에게 질척이거들랑 뱀뱀이를 보내 정전기 맛을 보여줄 작정이었다.

‘아예 기절시켜 버려야지.’

독있뱀, 아니 전기있뱀이 날카로운 기절 각을 재는 줄도 모르는 사내가 자꾸 말을 걸었다.

“어디에 있나 했더니, 여기에 있었군.”

거칠기 짝이 없지만 분명 들어본 적 있는 음성에 예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대사형이, 정확히 말하자면 사천 지부장 버전의 제하량이 서 있었다.

‘아니, 대사형이 왜 여기에 있어?’

경악과 반가움, 그리고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괴로움이 동시에 예결을 찾아들었다.

지금의 대사형은 인피면구도 쓰고 축골공까지 사용해서 원래 모습이라곤 알아볼 수도 없건만 먼 곳까지 오느라 살이 내리진 않았는지, 안색이 어둡지는 않은지 열렬히 관찰했다.

이렇게 본다고 해서 괴호의 이야기 속 제하량을 만날 수도 없는데, 예결은 자신이 모르는 대사형을 한 줌이라도 더 찾아내고 싶었다.

“제 누이에게 볼일이 있으십니까?”

흑귀의 험상궂기 그지없는 얼굴에 허리에 검까지 차고 있으니 어느 모로 보나 무림인, 그것도 사파의 소속의 고수였다.

지금의 제하량은 예결한테나 한 떨기 꽃이지 사기꾼 입장에서는 관청의 포쾌만큼이나 무서운 존재였다.

“어, 아. 아니, 아니요. 아닙니다!”

“좋은 배편이 있다고 말씀하시던 것 같은데…….”

정중한 척 말꼬리를 늘여 빼며 상대를 압박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하하. 내가 주선할 수 있는 건 두 자리뿐이었네. 이거 참 삼 남매였다니, 내 괜한 소리를 해서 미안하게 됐군. 그럼!”

예결에게 치근덕거리던 사내는 주절주절 떠들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도망쳤다. 제하량은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차지했다.

사천에 가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벌써 대사형을 만나게 된 예결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에서 또 뵙는군요.”

먼 길을 왔을 대사형에게 물 한 잔을 건넬 핑계로 예결은 사기꾼을 들먹였다.

사실 흑귀가 나타난 순간부터 예결은 이미 사기꾼은 안중에도 없었다.

흑귀 분장을 뒤집어쓴 제하량은 사양도 없이 그로부터 물잔을 받아 들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손가락 끝이 닿을 듯 말 듯 스쳤다. 한순간 자신에게 들이닥쳤다가 멀어지는 가이딩에 예결은 입맛을 다셨다.

건너편에 앉은 삼랑은 고개만 까딱하고는 무심한 척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주위를 경계하려는 눈치였다.

“어쩐 일로 장강까지 오셨습니까?”

“찾던 물건이 있다는 말에 직접 오게 되었습니다.”

‘뻔뻔한 대사형도 좋네.’

제하량의 변명에 예결은 웃음을 삼켜야 했다.

장강의 일이 커지는 통에 제 상태를 확인하러 온 게 분명한데 아닌 척 발뺌하는 그가 재미있었다.

“겸사겸사 대금도 전해 드려야겠다 싶었지요.”

그는 품에서 전표를 꺼냈다.

전표에 찍힌 인장을 확인한 예결이 눈을 빛냈다.

“대륙전장이군요?”

대륙전장은 중원에서 손꼽히는 전장 중 하나였다.

이걸 아는 이유는 상단을 떠맡게 되며 여러 전장을 조사해봤기 때문이다. 전장은 중원의 은행과 비슷했다. 전표를 발행하거나 돈을 빌려주는 업무가 주가 된다.

자그마한 전장은 사채업과 비슷하게 굴러가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규모가 큰 전장은 장래가 유망한 사업에 투자해서 그 수익을 일정 부분 챙긴다.

대륙전장은 전자와 후자 모두를 하는 곳이었다.

“예. 청해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문 공자님은 대륙전장이 편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삼랑.”

예결은 흑귀의 전표를 곧장 삼랑에게 건넸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으십니까?”

“여기에서 장부를 꺼내놓고 일일이 계산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슬쩍 말꼬리를 흐렸다.

“흑귀 님이 저를 속이실 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흑귀의 낯을 한 제하량이 픽 웃었다.

“이걸 순진하시다고 해야 할지…… 무어, 청해상단씩이나 되는 곳과 척질 생각은 없으니까요.”

대사형에게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 적 없는, 어딘지 모르게 삐뚤어진 미소였다.

“신뢰에 대한 보답으로 좋은 정보나 하나 드릴까 합니다.”

은근히 낮아진 어조가 의미심장하기 그지없었다.

“정보, 라면?”

“흑점에 낭인을 사러 온 치가 있더군요. 장강에 큰 변화가 있을 거라며 떠벌렸습니다. 장강이 진정한 용을 맞이하게 될 거라던가…….”

교룡왕에 대한 반란을 함의하는 발언이다.

“몇 번 상대한 적이 있는 고객이라 그가 누군지 쉬이 기억해 냈지요. 원하신다면 그 채주의 이름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흑귀 님이 아는 분을 제게 팔아넘기셔도 괜찮은 겁니까?”

“살 수 있는 고객 앞에서는 그마저도 상품일 뿐이지요.”

눈앞의 사내의 그 어디에서도 예결이 아는 제하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마저 상품이라 칭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팔아넘기는 흑점의 상인이 서 있을 뿐이다.

평소의 제하량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어둑한 면모에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이 심장을 콱 틀어쥔 것처럼 사정없이 날뛰었다.

하지만.

“사겠습니다.”

이마저도 좋다.

딱히 가이딩을 받는 것도 아닌데 황홀한 고양감이 예결에게 스몄다.

지금의 자신은 흑귀 낯을 한 제하량이 찌그러진 철전을 판다고 해도 냉큼 사들일지도 모르겠다.

‘대사형은 무림인이 천직이라고 생각했는데 인제 보니 상인도 잘하시겠네.’

하기야, 그러니 청해상단씩이나 되는 걸 예결에게 넘긴 게 아니겠는가.

“금룡채의 채주, 사복패도 만악입니다.”

“대가는 어떻게 지불할까요?”

예결의 질문에 흑귀가 답했다.

“적당한 때에 적당한 것을 받으러 오겠습니다.”

“역시…….”

말꼬리를 흐린 예결이 방긋 웃었다.

“흑귀 님은 좋은 분이시군요.”

원래의 제하량보다 험상궂은 낯은 별다른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상대가 누군지 알기에 무뚝뚝한 낯에도 기죽을 리 없는 예결은 감사를 표하는 척 그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으며 말했다.

“이자까지 갚도록 하겠습니다.”

흑귀는 바로 반응하지 않은 채 미간을 좁혔다. 이윽고 그는 정중하지만 단호한 손길로 예결을 떼어놨다.

“앞으로도 흑점을 이용해 주시길 바라며 드린 말씀입니다.”

어디까지나 고객 관리일 뿐이라는 매정한 답이었다. 그러나 살랑살랑해진 예결의 기분을 망치기엔 부족했다.

“바로 사천으로 찾아뵙지요. 다음 거래도 잘 부탁드립니다.”

후진을 모르는 에스퍼는 제 가이드를 만난 김에 다음 약속까지 확정해 버렸다.

볼일은 다 끝났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던 흑귀는 그 말에 예결을 흘깃 돌아봤다.

이번이 고작 두 번째 만남일 뿐인데 살갑기 그지없다. 사람 경계하는 법이라곤 배운 적 없는 강아지를 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느 집 강아지가 장강의 흐름이 뒤집힐 일에 휘말려 놓고 저렇게 순진한 얼굴로 앉아 있겠는가.

“다음에는 좀 더 안전한 상황에서 만났으면 하는군요.”

예결은 웃어버렸다.

새삼 제하량이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를 확신했다.

전표를 주려면 흑점에서 줘도 될 것을, 굳이 장강까지 찾아와 중요한 정보를 전해준 건 결국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정보 따위, 삼랑의 입을 통할 수도 있지 않나.

“저를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만나러 가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요.”

예결의 표현은 모호했다.

얼핏 청해에서 기다릴 제하량을 언급하는 것 같기도 했고 방금 사천에서 만나기로 할 흑귀를 지칭하는 것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이 같은 이라는 걸 알 리가 없음에도.

“약속은 지킵니다.”

“과연. 신임 상단주께서는 신의가 있으십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흑귀는 마땅한 인사조차 없이 휙 돌아선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예결은 그의 모습이 나루터에 오가는 이들 사이로 자취를 감춘 후에도 한참이나 바라봤다.

[괴호와 결이가 마주쳤다지.]

제하량의 전음에 삼랑은 멈칫했다.

젓가락을 고쳐 쥔 채 주변을 경계하던 그녀는 불어 터진 국수 그릇을 들어 올려 입을 가렸다.

[예.]

[관련 보고는 후일 받겠다.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갈대밭으로 결이를 데려가도록. 홍여가 기다릴 것이다.]

[존명.]

국물을 몇 모금 삼킨 후에 내려놓은 삼랑은 턱을 괸 채 저를 빤히 바라보는 예결과 눈이 마주쳤다.

“그래서, 우리 애들은 어디까지 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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