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궁지에 몰린 쥐는 (2)
“우에엑, 두목님 저희가 대체 왜 이런 짓을……!”
“고향의 어머니한테 돌아가서 농사지을래!”
“삼십 년 전에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가 손을 흔들고 계셔…….”
“아 말할 힘 있으면 더 빨리, 우웨엑, 저어! 웩…….”
노를 젓는 이들의 절반은 반쯤 넋이 빠진 채로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예결의 명령에 강제로 배를 타게 된 산적들은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들 육지에서 영업을 뛰던 몸인지라 물에는 영 익숙지 않을뿐더러 이 배는 최고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악랄한 새 주인이 최대한 일찍 도착하지 않으면 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하게 구워버릴 거라며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가능할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산 채로 타죽고 싶은 산적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찌어찌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대신, 산적들 모두 산 채로 지옥을 맛보고 있었다.
“어허.”
수적치고는 온화한 얼굴의 사내가 맥이 빠진 녹림도를 둘러봤다.
다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 채 손을 열심히 움직였다.
이곳이 지옥이라면 저 남자는 지옥의 간수였다.
“쓸데없이 입으로 힘을 빼면 속도 손실이 옵니다!”
사천당가를 습격한 후 머무르던 장원에 바로 저 사내가 찾아왔다.
무려 교룡채 출신이라 소개한 저 수적은 그들을 장강으로 이끌었다.
배에 오르자 최대한 빨리 이동하려면 노 젓는 요령을 알아야 한다기에 냉큼 고개를 끄덕인 게 최초의 실수였다.
“여러분은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모두의 내면에 깃든 진정한 노잡이의 혼을 끌어내십시오!”
‘대체 노잡이의 혼을 더 끌어내야 끝인 건데?’
‘여기 처음 탈 때부터 저 소리 하지 않았나?’
‘제길 어머니……!’
“진정한 노잡이는 뱃멀미도 이겨낼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노잡이가 아니라 산적이라고!
녹림도들은 속으로 맹렬하게 항의했다.
자칫 입 밖으로 불만을 내뱉었다가는 처음 반항했다가 돛대에 거꾸로 매달린 동료와 같은 꼴이 될 것이다.
‘아니, 우리가 왜 이 짓을 해야 하는데?’
‘바람을 느끼십시오! 진정한 노잡이로 거듭나는 겁니다!’
‘으아악! 내려줘!’
‘노잡이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
멀쩡한 육지를 두고 물에서 강도질하는 수적 놈이라 그런지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앞선 동료의 희생 덕에 다들 미친놈에게는 반항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녹림도 중 처음으로 반항해서 돛대에 매달렸던 산적은 지금 가장 앞자리에서 노를 젓는 중이었다.
멀미조차 잊은 채 덜덜 떨리는 팔로 노를 움직이는 동료를 보고 있노라면 등골이 오싹했다.
“저기, 언제쯤 도착합니까?”
“저희는 이미 도착했습니다.”
수적의 말에 녹림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 그럼 이제 노는 그만 저어도 되는 것 아닙니까?”
“뭐라고 하셨습니까?”
눈에서 안광이 사라지고 거멓게 죽는 모습에 산적은 움찔했다.
“아, 아뇨……. 이놈이 말을 잘못했습니다.”
교룡채가 그야말로 용의 소굴이라는 말을 듣긴 했으나 저런 미친놈이 있을 줄은 몰랐다.
“여러분은 미끼입니다. 미끼는 파닥파닥 날래게 움직여야 물고기의 시선을 끌 수 있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노를 제대로 젓는 법을 터득하려면 멀었지만 대답은 우렁차군요. 후후……. 좋습니다.”
미친놈은 노 젓는 요령을 몇 마디 더 귀띔해 주고는 자리를 비웠다.
감시자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뻐근한 손목을 돌리던 산적이 흘깃 창 너머를 보며 웅얼거렸다.
“밖은 어둑해지는데 이 배는 대낮처럼 밝네.”
물 위에 불꽃이 어른어른 환한 궤적을 그려내고 있었다.
“끙. 기름이 남아도나.”
“교룡채라잖아. 녹림으로 치면 대호채인 거라고.”
“어쩌다 이런 거물과 얽힌 거지…….”
처음 그들을 데리러 온 이가 교룡채의 수적이라는 걸 알았을 때 거물을 만났다고 좋아했는데, 지금은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녹림의 형제들은 이제 노를 놓고 갑판 위로 올라가라!”
훌쩍훌쩍 우는 산적들은 돌아온 수적의 말에 환한 얼굴이 되었다.
“교대 시간입니까?”
“그런 셈이지.”
수적이 모호하게 웃었다. 징글징글한 노를 드디어 손에서 떼어놓을 수 있다는 생각에 녹림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의 자리를 어깨가 얼굴의 세 배쯤 되는 수적들이 우르르 내려와 차지하는 게 보였다.
넋이 빠진 가장 앞자리의 동료를 어깨에 걸머멘 녹림채주는 갑판 위로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계단을 디뎠을 때, 집에 가서 농부가 되고 싶다고 엉엉 울던 녀석이 소리를 질렀다.
“으악! 저기 배에서 화살이 날아옵니다!”
채주는 우뚝 멈췄다. 맞은편에서 맹렬한 속도로 쫓아오는 배가 보였다.
그들의 배에는 녹색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선상에 올라선 당언보가 그들을 향해 형형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녹림채주는 소리 없이 절규했다.
‘망했다!’
***
“환하고 좋네.”
예결은 경박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갈대밭 속에 숨겨진 작은 배에 올라탄 그는 사천당가의 배가 미끼를 보고 맹렬하게 뒤쫓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서로를 얼싸안은 채 덜덜 떠는 산적들이 화살을 피해 우왕좌왕하다가 갑판 아래로 도로 숨어드는 게 보였다.
“다친 녹림도는 안 보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사거리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라고 했으니까.”
산적들이 탄 배는 환한 빛을 내뿜으며 이동하고 있었다. 사천당가는 불빛에 홀린 오징어처럼 그 뒤를 바짝 쫓았다.
“당언보가 저 산적들을 알아볼 줄은 몰랐습니다.”
삼랑이 혀를 내둘렀다.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나 다름없는 사건이고 본인의 실책인데 쉽게 잊을 리가.”
지금쯤 산적들과 교대했을 숙련된 교룡채의 노잡이들이 잡힐 듯 말 듯 추적자와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 솜씨가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사천당가의 배는 그들이 함정으로 유도당하는 줄도 모르는 채 사냥에 취해 있었다.
“믿는 구석도 있으니 거침없이 움직이겠지.”
교룡왕을 상대로 반기를 든 수채와 손을 잡았으니 저렇게 과감하게 움직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당가의 배에 얼마나 많은 수적이 올라타 있을까? 이 할? 어쩌면 삼 할?”
“장강에 익숙지도 않을 텐데 저렇게 빨리 움직이는 걸 보면 삼 할은 금룡채에서 보낸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갈대밭 속에서 그들의 배는 조용히 이동했다. 작은 나룻배에는 선등조차 달려 있지 않았으나 평생을 장강의 물에서 살아온 수적들은 어둠 속에서도 거침없이 배를 움직였다.
물의 흐름과 크고 작은 암초를 전부 꿰고 있는 자들이었다.
“이 속도면 곧 도착하겠군.”
예결의 말에 다른 배에 올라타 있던 수적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속으로 풍덩풍덩 뛰어들었다.
환히 빛나는 배가 지나갈 때, 예결은 시선이 마주친 녹림채주에게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줬다.
그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예결을 바라봤다.
‘아니, 왜 저기에?’
채주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했다. 여기로 불러놓고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은 문 공자가 왜 저 갈대밭 사이에 숨어 있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물에 뛰어들어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사천당가의 무인이 우리를 알아봤다. 지금 기세를 보아하니 모두를 잡아 죽이기 전까진 멈추지도 않겠지.’
은혜는 두 배로, 원수는 열 배로 갚는 사천당가다. 사천당가의 복수를 피하려면 결국 그에겐 선택지가 하나뿐이었다.
‘일이 이렇게 꼬였으니 또 저 망, 아니 문 공자를 믿는 수밖에…….’
납득이라기보단 체념에 가까웠다. 저 같은 범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절초풍할 술수를 발휘해 일을 잘 봉합해주길 기대할 수밖에.
[문 공자님이 수적 말 잘 듣고 있으면 고기와 술을 배 터지게 먹게 해 주신답니다.]
때마침 들려온 여자의 전음에 채주는 예결 쪽을 바라봤다. 거리가 다소 있었지만 손을 팔랑팔랑 흔드는 예결과 항상 그를 그림자처럼 쫓는 삼랑이 보였다.
채주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배 터지게 먹고 마시고 죽자.’
때마침 예결이 쉿, 하고 입으로 검지를 가져가자 채주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온다.”
마지막 배우까지 무대에 올린 예결이 속삭이자 사천당가의 배가 빠른 속도로 눈앞을 지나가는 게 보였다.
놈들은 갈대밭을 바라볼 겨를조차 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저 배의 바닥에는 예결과 함께 대기하다가 잠수한 교룡채의 수적들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다. 배의 밑바닥에 미리 준비한 쇠갈고리를 끼웠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큰 배가 휘청이며 수면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명이 들렸다. 정확한 의미를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잔뜩 뒤섞인 외침이었으나 에스퍼인 예결의 청력은 이를 어렵잖게 구별할 수 있었다.
“물, 물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배의 바닥에 구멍이 뚫렸습니다!”
“막아!”
그래도 무림인이 다수라 그런지 기대한 만큼의 아비규환은 아니었다. 다들 제 목숨 하나 정도는 살릴 자신이 있는 거다.
“조금만 기다리면 남궁세가가 온다!”
당언보가 사람들을 진정시키려는 목소리가 들렸다. 예결은 오케스트라라도 즐기는 양 키득거리다가 삼랑에게 손짓했다.
“슬슬 금룡채 앞마당인가?”
“예.”
“이 불놀이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그 말에 삼랑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붉은 신호탄이 하늘을 수놓았다. 이건 원래 금룡채가 사천당가 측에 보낸 거였다.
교룡채를 칠 때가 되면 폭죽을 쏘아 올리라고. 그럼 함께 교룡채를 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결은 제하량이 알려준 정보를 기반으로 금룡채가 고용한 흑점의 낭인에게 접촉했다. 돈을 좀 얹어주자 그는 기꺼이 자신의 고용주를 배신하고 신호탄을 빼돌렸다.
사천당가가 전해 받은 건 가짜 신호탄이다.
‘지금쯤 물에 젖어서 쓸 수 없는 상태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제하량의 개입이 없어도 일을 잘 해결할 자신은 있었지만 그가 도운 덕분에 당서악을 확실히 보낼 수 있게 됐다.
***
“갑자기 물이라니? 왜 물이 샌단 말인가?”
금룡채에서 보내온 수적이 혀를 찼다.
“누가 배 밑을 뜯어버린 게 분명합니다. 저희 애들이 잠수해서 바닥을 확인해보러 갔습니다.”
“낡은 배도 아니고 어찌 그런……!”
당서악은 기가 막혔다. 그의 사촌누이가 저기 저 배에 상행을 습격했던 산적들을 발견했다고 했을 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내는 미끼와 놈들을 쫓느라 정신없는 상태에서 밑바닥이 뜯어져 버린 배…….
“더는 쫓지 마라. 여기에서 배를 물린다!”
이를 악문 당서악의 외침에 당언보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오라버니! 저기 저 배에 저희를 습격하고 청해상단의 물품을 앗아간 녹림도가 타고 있습니다. 필경 오라버니를 농락하려 한 배후를 알고 있을 텐데 여기에서 물러난다니요?”
무리해서 가주를 설득해 이 자리에 섰다.
이번에야말로 장강에서 교룡왕을 몰아내고 장강수로맹의 새 맹주와 손을 잡아 중원으로의 진출을 도모해야 하는 최적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서악은 이 판을 엎어야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무언가 잘못됐다.
“감이 좋지 않다.”
그 말에 당언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당서악의 혜안을 믿었으나 거의 따라잡은 게 아쉬웠다. 저놈들만 잡으면 그간의 실책을 무마할 수 있을 텐데…….
“……알겠습니다.”
어차피 사촌 오라비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니 오욕 정도야 참아 넘길 수 있었다.
배를 돌리라고 긴급하게 명을 하달하던 찰나, 순간 검은 밤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신호탄?”
당서악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순간 하늘을 향해 쏘아진 붉은 빛은 그의 가슴에 불길함을 더했다.
“우리가 가진 신호탄은 어떻게 됐지?”
“물에 젖어서 쓸 수 없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갈수록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당언보가 초조한 낯으로 답했다.
당서악은 극도로 무표정해졌다.
함정이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장강의 저편에서 배 한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크기는 지금 장강에 떠 있는 배 중에 가장 거대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선수의 조각은 물 때문에 녹슬어 금빛이 맴돌았다. 그러나 모양새 자체는 투박하기 그지없어 고귀한 용이라기보다는 남만의 깊은 밀림에서 볼 수 있다는 괴물 같기만 했다.
“금룡채…….”
벌써 등장해서는 안 되는 배우가 무대에 올랐다.
저들은 이쪽의 상황을 모르는 눈치였다. 사냥개가 토끼를 몰아 사냥꾼에게 던져준 것만 같은 상황이니 냉큼 집어먹겠다고 달려올 만도 했다.
그러나 금룡채를 부른 건 당가가 아니었다. 당가는 토끼를 몰아온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유인당한 거였다.
‘제길…….’
당서악은 이게 끝이 아니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가 고개를 홱 들리자 거의 동시에 한 무인이 외쳤다.
“저기, 남궁세가입니다!”
반대편에서 나타난 배에 푸르고 흰, 창천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당언보는 침음했다. 장강의 지리를 잘 모르는 편이라 벌써 남궁세가가 주둔한 지역에 도착했을 줄은 몰랐다.
“설마. 아니겠지요?”
때를 놓치지 않은 녹림채주가 금룡선을 향해 내공을 끌어모아 외쳤다.
“아이고, 형님들 오셨습니까! 바로 저놈들입니다! 어서 막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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