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궁지에 몰린 쥐는 (4)
붉은 말이 푸르릉 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곤륜산에서 만난 마두를 처리할 때 도움을 준 바로 그 말이었다. 예결의 손에서 슬그머니 기어 나온 뱀뱀이가 말의 콧잔등에 제 얼굴을 비비더니 적뢰의 머리에 올라탔다.
보통 말은 뱀을 보면 놀란다더니, 영물이라 그런지 적뢰는 침착하기만 했다.
‘비슷한 영물이라 통하는 게 있나?’
“오랜만입니다. 문 공자.”
적뢰의 곁에 선 덩치 큰 사내가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예결은 홍여에게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의 뒤에 선 삼랑은 눈짓으로 동료에게 인사를 건넸다.
진영이 그랬다. 홍여는 문 공자를 곤륜산에 배웅해 주기가 무섭게 그가 돌아올 것을 예견했다고.
‘짐승이 따로 없다니까.’
“여기에서 홍여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마침 주군이 시키신 일을 마치고 장강을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문 공자께서 오래 자리를 비웠으니 한시라도 빨리 청해로 모시라는 분부를 받았지요.”
“아.”
그런 설정이구나?
예결은 멋쩍은 양 웃었다.
“제가 아직 상단 일을 잘 몰라서 체류가 길어졌네요. 대사형께서 많이 걱정하셨나요?”
“닷새 내로 청해로 모실 테니 직접 물어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그냥 그렇다고 답하면 될 것을, 홍여의 성정을 보여주듯 고지식한 답변이었다.
닷새면 대사형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예결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고 보니 사천으로 보내야 할 물건이 있는데.”
“짐은 이미 실어 두었습니다.”
“벌써요?”
“교룡왕이 찾아와 전해 주었습니다. 전언도 남겼는데, 들으시겠습니까?”
“말해봐요.”
“뱀 사냥이 언제냐고 묻더군요.”
예결은 반사적으로 적뢰의 머리 위에 올라간 뱀뱀이를 바라봤다.
저 뱀 사냥의 뱀이 이 뱀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반려영물을 둔 입장에서는 무심코 놀랐다.
“알아서 기어 나올 겁니다.”
당서악은 한때 정인이었던 연소소를 배신하면서까지 세가 내의 입지를 굳혀온 사내다.
그런 이가 위로 올라갈 길이 전부 막힌다면 어떻게 나올지 예상하는 건 쉬웠다.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을 빼앗겼다고 생각할 테니…… 새로운 공을 세우려 할 테니까요.”
예결은 방긋 웃었다.
본디 예결의 계획은 단순했다.
당서악의 일을 그르친 녹림도와 교룡선을 이용해 당가를 끌어내는 미끼를 만든다. 장강 깊은 곳으로 끌려오면 대기하고 있던 교룡채의 수적이 당가의 배를 침몰시키고 교룡왕의 손에 당서악을 넘긴다.
거기에서 흑점 버전 대사형이 건넨 정보 때문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장강수로맹 내에 배신자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금룡채를 미리 처리하는 것도 방법은 방법이다. 그러나 예결은 금룡채주 만악을 처리하러 가겠다는 연소소를 막았다.
당서악의 기질을 잘만 이용하면 더 교묘한 함정 속에 놈을 끌어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번 배신한 놈이 두 번, 세 번이라고 못 할까.’
녹림의 산적과 교룡선을 미끼로 내밀어 사천당가를 끌어낸다는 기본 설정은 같았다. 거기에 금룡채와 남궁세가라는 등장인물을 더했을 뿐이다.
금룡채를 불러들이는 건 예결로서도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가가 금룡채와 협력할 겨를조차 없이 남궁세가를 투입한다면?
당서악은 금룡채를 배신할 것이다.
‘정파는 남 보기에 더러운 짓은 절대 못 하니까.’
아무도 모르게 수적과 손을 잡을 수는 있어도, 같은 오대세가가 지켜보는데 대놓고 놈들과의 관계를 인정할 수 있을 리 없다.
당서악은 교룡선을 따라잡기 위해 금룡채 수적의 손을 빌려 가며 배를 띄웠다. 금룡채를 배신하게 된 이상 노잡이들을 다 죽인 당서악은 구멍 뚫린 배로는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자리를 피하고 싶어도 금룡선에 올라탈 수밖에.
금룡채주가 배신자를 보고 가만히 있을 리는 없으니 남궁세가는 당서악에게 의심을 품게 될 것이다.
적어도 남궁운은 당서악을 예의주시하게 되리라. 전성기의 사형을 반의반이라도 따라가는 인재라면 말이다.
사천당가가 남궁세가의 의심을 받는 이를 어찌 중하게 쓰겠는가?
당서악은 제대로 된 공을 세우지 않는 이상 미끄러질 일만 남았다. 목숨보다 권력이 소중한 당서악은 교룡왕을 찾게 될 것이다.
옛 정인의 애증마저 이용하기 위해서.
“과연.”
홍여는 덤덤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감정 표현이 크지 않은 사내이기에 오히려 진실성이 느껴졌다.
“문 공자의 말을 확실히 전달해 두겠습니다.”
“이동하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예결은 적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뱀뱀이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황금빛 뱀은 촉촉한 코만 살짝 가져다 대고는 뒤로 물러났다.
오랜만에 만난 적뢰와 회포라도 풀 모양이었다.
“적뢰는 엄청 빠르게 달리는 모양이니 잘 매달려 있도록 해.”
삼랑과 함께 적뢰의 등에 매달린 예결은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불렀다.
이번 장사도 그럭저럭 대성공이다.
***
“대사형!”
마차에서 내린 예결은 거의 날듯이 제하량에게로 달려갔다.
“조심, 넘어질라.”
자신을 안아주는 팔에 폭 매달린 예결은 순진한 척 헤헤 웃었다.
“대사형을 본 게 너무 오랜만인 거 같아서 그만…….”
예결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주워섬겼다.
청해를 떠난 뒤에도 사천에서 흑귀를 만났고, 심지어 벽조목 실험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장강에서도 대사형을 만나지 않았던가.
“오랜만이니 저녁 식사라도 함께 들까?”
“좋아요.”
“물러가겠습니다.”
홍여와 삼랑이 조심조심 자리를 피했다. 예결은 눈치껏 빠져준 이들을 뒤로하고 제하량과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장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예결은 흘깃흘깃 제하량의 얼굴을 훔쳐봤다.
새삼 대사형이 잘생겨서 보는 것도 있었으나 흑귀가 겹쳐 보이는 통에 더 눈길이 갔다.
눈앞의 제하량이 더없이 반듯하고 아름다운, 서늘한 낯의 미남이라면 흑귀는 누가 봐도 사파의 밑바닥에서 구르고 구른 험악하고 위험한 인상의 사내였다.
대사형의 음성은 매끄러우면서도 낮고 듣는 이를 매혹하지만 흑귀는 철판을 긁는 듯 거칠고 탁한 목소리를 가졌다.
그를 볼 때면 동화 속 나쁜 마법에 걸린 야수를 떠올리게 된다.
누가 그에게 저주를 걸었을까?
“얼굴이 뚫릴 것 같구나.
“음. 그거 큰일이네요.”
제하량의 말에 예결은 사뭇 진지한 투로 답했다.
“얼굴에만 호신강기를 두르면 어때요?”
“결아.”
농이라는 걸 알아챈 제하량의 부름에 웃음기가 묻어나왔다.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구나.”
“하지만 저는 대사형을 계속 보고 싶고 대사형은 얼굴이 뚫릴 것 같다니 방법을 찾아봐야지요.”
“원, 녀석도.”
제하량은 손을 뻗어 예결의 머리를 헝클었다.
“네가 이렇게 잔망스러운 성격인 줄은 미처 몰랐구나.”
“저는 대사형이 이렇게 다정한 분이라는 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구 들이댔으나 제하량은 그저 귀여운 강아지 보듯 예결의 머리카락을 한 번 더 쓸어주고 말았다.
건물 안에 들어서니 이미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예결은 홍여가 자신의 도착을 미리 알려둘 거라 짐작하긴 했으나 갓 만들었는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음식이 한 상 가득 차려진 걸 보고 새삼 놀랐다.
‘설마 내가 도착할 때까지 계속 새로 만든 건 아니겠지……?’
의문을 삼키며 예결은 대사형의 건너편에 앉았다. 젓가락을 들어 올린 예결은 이번 여정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늘어놓았다.
개중에는 당서악의 이야기도 있었고 교룡왕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 결국 연소소를 만났구나.”
예결이 잘 먹던 오리고기를 앞으로 밀어주던 하량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특별한 인연을 맺으셨더군요.”
“네가 이 사형을 오해하지 않아 다행이다.”
“어디에서 무얼 하시든 제 대사형은 한 분뿐인걸요.”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기 위해 던진 회심의 대사였다.
그러나 제하량은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게끔 주의하거라. 네가 만난 이가 교룡왕이 아니라 다른 무도한 자였다면 다시는 이 사형에게 돌아오지 못할 것이 아니냐.”
예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대사형의 염려는 항상 명심할게요.”
제하량은 사제의 손을 끌어다가 몇 번 쓰다듬어준 뒤 동파육이며 오향장육 같은 요리를 예결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입이 짧은 편이었음에도 예결은 제하량이 골라주는 음식을 전부 먹어 치웠다.
어떻게 하면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던 예결은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 여정에서 남궁운이라는 후기지수를 만났어요.”
“남궁운?”
되묻긴 했어도 하량의 낯에 서린 호기심은 점잖기만 했다.
진심으로 예결이 만난 이가 누군지 궁금하기보다는 그저 대화에 어울려주는 정도에 불과했다.
“삼랑이 말하길 이번 대의 후기지수 중 손꼽히는 인재라고 하더군요.”
“그래, 그리 말하니 남궁운이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것도 같구나. 창천 남궁세가의 젊은 용이라지?”
예결은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면 볼수록 대사형이 생각나더군요.”
제하량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나를?”
“당대에 내로라하는 후기지수를 전부 제쳤다는 명성도 명성이지만, 남궁운이라는 자는 협객이더군요.”
“협객이라…….”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제 살을 깎아내는 한이 있더라도 옳은 일을 행하기 위해 나서는 사람 말입니다.”
예결은 교룡선에 포위당했을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교룡왕을 상대로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맞서 놓고는, 민간인의 안전을 위해 스스로 인질이 되기를 자처하더군요. 협의를 실천하는 무림인을 본 것은 오랜만인지라 무척 인상이 깊었습니다.”
“네가 이 우형의 얼굴에 지나치게 금칠을 하는구나.”
하량이 꺼낸 겸양의 말에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예결이 농을 덧붙였다.
“이제 생각해보니 젊고 헌앙한 미장부라는 것마저 같군요.”
“미장부라니.”
대사형이 손을 내저었다.
대사형의 반응 자체가 크진 않았다.
아무리 살펴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없는데, 이 화제를 피하고 싶어 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 진실을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정말인걸요. 저는 태어나서 대사형처럼 잘생긴 남자는 보지 못했습니다.”
이건 상대가 가이드라서 내뱉는 거짓부렁이 아니었다.
21세기 한국에서 다시 태어나 대중매체나 SNS를 통해 연예인을 비롯한 온갖 미인을 접했음에도 별다른 감흥을 느낀 적이 없다.
특히 센터에 오가기 시작한 뒤에는 강한 능력을 지니고 있을수록 아름답다는 에스퍼에게 둘러싸여 지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이번 생과 저번 생을 통틀어 예결의 시선을 끈 존재는 제하량이 유일했다.
“그래서 알았는데.”
손이 닿는 거리에 있었다면 무심코 저 얼굴을 만져 봤을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제하량의 질문에 예결은 장난스레 웃었다.
“언제고, 어디에서고 대사형을 다시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항주의 고아 소매치기에게도 상냥했던 공자님을 잊을 수 없어 중원을 가로질러 청해로 갔다.
제하량이 더는 비단옷이 아니라 하얀 무명옷을 걸친 채 곤륜의 제자가 되었어도 예결은 그를 한눈에 찾아냈다.
“사제가 감언에 재능이 있다는 걸 몰랐는데.”
“저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으실 겁니다.”
어디 보자.
일단은 곤륜혈사 때 죽은 게 맞고, 머나먼 미래의 한국에서 다시 태어나 에스퍼로 각성했다.
뱀뱀이는 귀여운 반려영물일 뿐, 실제로 벼락을 부리는 건 예결이다.
그뿐이랴. 예결은 호시탐탐 대사형의 순결을 노리는 중이었다.
앞으로의 목표는 대사형의 동의를 얻어 곤륜 역사에 다시 없을 기사멸조를 저지르는 것.
“대사형은 명실공히 중원 최고의 후기지수였지만 저는 그냥 곤륜의 제자일 뿐이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예결은 곤륜에 입문하기 전부터 제하량을 알았다.
아직 항주의 거리에서 지내던 시절, 그 거리에 대사형이 뿌려놓고 간 다정에 구명 받았기에.
“글쎄.”
잠시 뜸을 들인 사내가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여왔다.
“네가 알던 그 시절의 내가 어땠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정말 많은 세월이 흘렀단다.”
세월이라.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시간이기는 했다.
예결은 다시 태어난 후 그 두 배나 되는 시간이 흘러서야 중원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니 하량이 암시하는 것처럼 많은 변화가 일어났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쩌면 결이 네가 나를 아는 것보단 내가 내 사제를 더 잘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지나치게 의미심장했다고 생각했는지 문장을 끝맺는 대사형의 음성은 다정함만이 묻어났다.
“대사형은 항상 제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시네요.”
“사실을 말했을 뿐이란다.”
조용조용한 음성을 귀가 아니라 가슴으로 들은 양 속이 울렁거렸다.
“결이 너는 내게 정말로 중한 사람이야. 내 말을 절대로 잊지 말렴.”
예결은 언어를 잃은 채 그저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관계는 어제와 오늘이 같고, 예결이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아직 멀었음에도 감정이 벅차올랐다.
하량은 그런 예결을 넌지시 채근했다.
“고개를 들어야지.”
“……너무 부끄러운걸요.”
예결은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평소에는 어떻게 방긋 웃거나 울고 화를 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고작 몇 마디 말에 시치미가 멀리멀리 도망가고 말았다.
“우리는 충분히 오래 떨어져 있지 않았니. 그만 내가 그리워한 얼굴을 보여다오.”
예결은 나직한 신음을 삼켰다.
이렇게 정말 대사형이 많이 변하긴 한 모양이다.
“정말…… 당해낼 수가 없군요.”
결국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은 울 듯 말 듯 일그러졌는데, 입가는 도무지 숨길 수 없는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기묘한 조화는 어째 달아나고 싶은 어린아이를 떠올리게 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짓눌린 예결은 참으로 무방비했다.
재회한 이래 한 치도 길어지지 않은 갈색 머리카락 위로 하량의 손길이 닿았다.
“착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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