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궁지에 몰린 쥐는 (5)
쾅!
무슨 대단한 서예가가 썼다는 벼루가 당서악의 귓불을 스치고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검은 먹이 사방에 튀었으나 당서악은 납작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 부디 용서를……!”
학자처럼 비쩍 마른 사내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사천당가의 가주, 만검독수 당문길이었다.
왜소한 만큼 그리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생김이었으나 당문길은 당가의 역사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독랄한 인물이었다.
그런 이가 풍류를 아는 높은 관리와 어울리겠다고 공들여 손에 넣은 벼루를 반으로 쪼개버렸다.
이는 정말로 화가 나서라기보다는 당서악에게 본인의 분노를 내보이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사천 성도를 지키는 일이 네겐 버겁다고 여긴 게 고작 얼마 전의 일이다. 그러나 또 기회를 주기로 했지.”
당가주의 지적에 당서악은 이를 악물었다. 그 기회는 당언보의 주머니를 털어서 산 것인데 자신이 베푼 양 말하는 당문길의 표현이 아니꼬웠다.
동시에 가솔을 제멋대로 다룰 수 있는 가주의 권력에 탐욕이 일었다.
“그러나 네가 가져온 결과를 보아라! 남궁세가와 협력해 장강에서 수적의 세력을 몰아내고 당가의 영역을 넓히겠다더니 지금 세가가 얼마나 애매한 위치에 처하게 되었는지 보란 말이다!”
얼마 전, 오대세가의 비공식 회동이 있었다. 문제는 오대세가 중 당가를 배제한 네 가문만이 모였다는 것이다.
회의를 소집한 측은 남궁세가였다.
당서악의 계획을 인지하고 있던 당문길은 그 이유가 얼마 전 장강에서 벌어진 소요에 있다고 판단했다.
“듣기 싫다! 물러가라!”
언제 다시 오라는 말이 없는 이상, 다시는 당문길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가주님. 아직 제겐 이용 가치가 남아 있습니다. 가주님!”
당서악은 기어가 당가주의 발치에 매달렸다.
“장강의 주인이 아직 저를 증오하고 있습니다. 원수가 나타난다면 교룡왕이 움직일 겁니다. 제발 저를 써주십시오!”
“같은 이유로 너는 당가의 무인을 데려가 그들을 차가운 물 밑에 가라앉게 했다. 한데 뒤처리마저 엉망이었지.”
만검독수 당문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바닥에 떨어진 평판을 어찌 주워 담을 수 있단 말이냐? 내 불가능한 일에는 관심이 없으니 화풀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손을 뻗은 그는 당서악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 올렸다.
“똑똑히 듣거라. 고작 방계에, 무공 수준도 변변치 않고 계략이랍시고 세워 놓고 제 욕심 채우느라 세가를 진흙탕으로 끌고 들어가는 이에게 줄 기회 따윈 없다.”
***
근래 들어 예결의 기분은 구름 위에 떠 있었다.
청해로 돌아가 대사형에게서 다정한 말도 잔뜩 듣고 머리도 한껏 쓰다듬을 받았다. 하량은 예전보다 예결이 말랐다며 손목을 잡고 안타까워하더니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더 내오라 이르기도 했다.
매일매일 대사형과 이런 시간을 보내다 보면 평생 가이드 손만 잡고 자는 에스퍼가 되어도 알아채지 못할 것 같았다.
‘역시 대사형 근처에 있으면 온갖 음험한 생각이 정화되는 게 맞다니까.’
이건 예전에 곤륜에서 떠돌던 근거 없는 미신 중 하나였다.
하량이 너무 좋은 인간이다 보니 그를 상대하다 보면 어중간한 악의는 전부 사라지게 된다던가.
“제가 어디까지 말했지요?”
예결은 건너편에 앉은 이를 향해 물었다.
흑귀가 침착한 투로 답했다.
“남궁세가의 공자를 만났다고 하셨지요.”
“맞아요. 이번 장물이 생기게 된 과정은 고의가 아니었거든요. 이번에는 상행을 가다가 교룡채의 습격을 받았는데, 남궁운 공자님이 대단한 활약을 보이셨습니다.”
“결국 상선에 탄 이들이 전부 인질로 잡혀가지 않았습니까?”
“저는 남궁운 공자의 실패보다도 그의 노력이 인상 깊었거든요.”
하량 근처에서는 자꾸 현실에 안주하려 하는 까닭에 예결은 적당히 그의 품을 벗어나 돌아다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비록 가이드와 떨어지는 건 피눈물이 날 정도로 괴로운 일이었지만 어찌하겠는가, 희망찬 미래와 밝은 내일을 위해서라면 결단을 내릴 수밖에.
문제는 지금의 예결이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는 거였다. 교룡채의 인질로 잡혀 있으며 청해상단에 사람을 보내 몸값을 협상 중이라는 설정이니, 상행을 떠날 수는 없게 됐다.
결국 예결은 꾀를 냈다.
바로 장물을 맡긴 흑점의 사천지부에 다녀오겠다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곧 재회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을까, 대사형은 그를 말리기는커녕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래서 예결은 홍여와 함께 사천에 도착해 흑점으로 숨어들어 와 흑귀와 마주 앉게 된 것이다.
‘청해의 장원에서 헤어지고 38시간 25분만인가?’
적당히 검은 물이 든 것처럼 보이는 흑귀 버전의 대사형은 퍽 괜찮은 대화 상대였다. 고객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철칙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상대가 예결이라서인지 거래를 하다가 시작되는 잡담에도 착실히 반응해주기 때문이다.
예결이 두 사람이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다른 반응을 보는 것도 꽤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정의로운 협객을 좋아하시는 모양입니다.”
“대사형이 그런 분이셨으니까요.”
협객을 좋아한 것은 대사형이 협의지도를 걷는 무인이었기 때문이다.
예결은 방긋 웃었다.
대사형 앞에서 대사형 칭찬을 잔뜩 퍼부은 셈이다. 하량은 타인 앞에서도 대사형을 거론하는 예결의 진심을 알아주리라.
“그러고 보니 하북의 거부가 벽조목을 찾는다고 들었습니다. 어디에 뇌물로 바치기라도 할 모양인지 아주 조용히 구하더군요.”
흑귀의 말에 예결은 방긋 웃었다.
“저희 상단에서 새로 출시한 상품을 알고 계셨군요.”
“이 바닥에서 정보는 중요하니까요.”
“적당히 양을 조절해서 유통 중이지만 흑귀 님에게라면 얼마든지 내어 드리지요.”
흑귀의 한쪽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웃어도 무섭게만 느껴지는 얼굴이었으나 예결은 그 너머에 존재할 제하량의 웃음을 남몰래 훔쳐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값은 후하게 치르지요.”
“뭘요. 항상 흑귀 님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저도 도움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예결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상계의 뒷소문이며 은밀히 유행을 타는 품목 등을 알아낼 필요성을 느낀 예결은 흑귀를 제 정보꾼으로 낙점했다.
정보의 정확도도 정확도지만, 대사형이 이런 어두운 사정에도 밝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오늘은 이쯤 할까.’
“그럼, 슬슬 돌아가 봐야 할 거 같아서요.”
예결은 찌뿌둥한 몸을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룡왕의 인질이 여태 자유로웠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몸값과 함께 장강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흑귀가 무언가 장치를 건드리자 밖의 문이 열리더니 홍여가 안으로 들어왔다. 무뚝뚝한 그는 흑귀에게는 흘깃 시선만 준 채 예결을 정중히 모시고 밖으로 나갔다.
혼자가 되었음에도 하량은 인피면구를 벗지 않고 축골공도 유지했다. 작은 옷에 몸을 구겨 넣기라도 한 것처럼 답답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으나 인내는 제하량이 가장 먼저 배운 기질 중 하나였다.
뒤편에서 바람이 부는 듯하더니 학자풍의 사내, 진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마지막입니다.”
하량의 앞에 죽간을 내려놓은 진영이 혀를 찼다.
“요새는 서류를 나르다가 적뢰가 발병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네는 홍여의 말 다루는 솜씨를 간과하는군. 그는 일개 준마도 하늘에서 내려온 천마처럼 만드는 재주가 있지.”
“주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진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요즘 문 공자에게 너무 심취해 계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진영의 말에 하량이 답했다.
“꽤 노골적으로 굴었다고 생각했는데 자네가 이제야 깨달은 걸 보면 한참 부족했던 모양이군.”
매끈해진 흑귀의 손가락이 서안을 가볍게 두드렸다.
“근래의 행보를 보면 왜 그리 신경 쓰시는지 알 것 같긴 합니다.”
첫 상행을 본인이 털어버리질 않나, 중원에서도 제일가는 암시장인 흑점의 간부와 안면을 트고 비정기적인 거래를 시작했다. 심지어 최근 장강에서 일어난 소요 역시 예결의 개입이 아니었다면 당장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생기가 넘치지, 안 그런가?”
그걸 ‘생기’라 표현하는 것에 다소 이견이 있음에도 진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분을 처음 발견했던 날을 생각하면 가끔은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청해상단이 눈에 띄는 도약을 이룬 건 아니지만 예전과 다른 품목을 다루기 시작하며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특히 예결이 영물을 통해 만들기 시작한 벽조목이 상당한 이문을 남기고 있을뿐더러 더 나아가 상단의 인맥 형성에도 이바지하는 바가 컸다.
“삼랑이 벽조목의 물량은 잘 조절하고 있던가?”
“값어치를 낮추지 않기 위해 문 공자께서 유통을 적당히 조절하고 계십니다. 삼랑은 그저 소문이 은근하게 퍼지게끔 돕는 역할만 하더군요.”
“청해상단이 결이에게 버거울 거라 말했던 그대의 의견이 어찌 변했을지 궁금하군.”
진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입니다. 문 공자 같은 분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기질이 있어서 무얼 하든 잘 해내도 쉽게 질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물며 남이 떠민 상단을 이렇게 공들여 가꾸고 미래를 내다보며 계획을 세우실 줄은 몰랐습니다.”
예결을 그리 많이 겪어본 것이 아님에도 진영의 평가는 비교적 정확했다.
다만 그는 제하량의 변수가 예결이듯, 예결의 변수 역시도 제하량이라는 사실을 계산에 넣지 못했을 뿐이다.
아직까지도 진영은 예결의 정체와 그의 목적을 의심하는 중이었다.
“슬슬 본산에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하량은 요새 너무 흑귀와 그 자신을 오가고 있었다.
진영은 흑귀로 분한 주군의 음성을 들을 때마다 조마조마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겪어본바 인간은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는 동물이었다.
주군은 오래전에 과거를 딛고 일어섰다. 그러나 이렇듯 예전의 모습에 스스로를 욱여넣는 행위에 완전히 무감할 것 같진 않았다.
“주군께서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우고 계신지라 우려가 듭니다.”
“중원으로 이어진 배신자의 흔적은 단단히 틀어쥐었으니 염려 말게. 놈들에게 날뛸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고 싶을 뿐이야.”
하량은 느슨해진 입매를 만지작거렸다.
“궁지에 몰린 쥐는 사냥하는 재미가 있으니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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