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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61화 (61/203)

61화. 궁지에 몰린 쥐는 (6)

청해상단의 몸값 원정대가 장강으로 출발하는 날이 밝았다.

예결은 사천지부의 밀실에 앉아 삼랑의 브리핑에 귀를 기울였다.

“문 공자님은 청해상단이 교룡왕에게 몸값으로 보내는 귀중품과 함께 이동되실 예정입니다. 운반하는 측은 말씀하신 대로 흑점 사천지부로 정했습니다.”

“상행을 따라다니기만 했는데 이번엔 내가 표물이 됐네.”

예결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냥 표물도 아니고 비밀리에 운반해야 하는 데다가 살아 있는 아주 골치 아픈 표물이지요. 저는 흑점에서 이 건을 받아준 게 신기할 지경입니다.”

삼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저게 다 흑점과 대사형의 상관관계를 숨기기 위한 너스레라는 걸 아는 예결의 눈에도 참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나무 관을 통해 이동하는 것도 생각해 봤습니다만. 흑점 측에서 반대하더군요. 숨구멍을 잘 뚫어놔도 위험할 수 있다고.”

대사형인가.

막판에 계획을 뒤집을 정도의 결정권자라면 결국 그 한 사람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럼?”

미라 신세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반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예결의 질문에 삼랑이 답했다.

“혼례 행렬로 가장하기로 했습니다.”

“혼례라니?”

“사람과 귀중품 모두를 움직이기에 이만한 방법이 없습니다. 마차를 훔쳐보는 사람이 있으면 흠씬 두들겨 패도 될뿐더러 설령 누가 내부를 들여다보더라도 홍개두를 쓰고 있으면 되니까요.”

“홍개두……? 내가 그걸 쓴다고?”

신부가 쓰는 붉은 너울이 언급되자 예결이 되물었다.

“아. 제가 아직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었군요.”

삼랑이 방긋 웃었다.

“신부가 되어 주셔야겠습니다.”

***

부축을 받아 사인교에 오른 예결은 털썩 주저앉았다.

[신부가 너무 자유분방한 거 아닙니까?]

귓가에 삼랑의 전음이 꽂혀 예결은 고개를 팩 돌렸다. 입술을 삐죽여봤자 삼랑은 보지도 못할 것이다.

지난 몇 시간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어차피 얼굴도 가릴 건데 굳이 혼례복까지 입어야 해?”

삼랑은 예결을 괴롭힐 기회라고 여겼는지 신부 치장에 진심이었다. 치렁치렁한 붉은 옷에 어디선가 구해온 봉황관까지 머리에 씌웠다. 예결이 거추장스럽다며 도망치려고 하자 삼랑은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그를 잡았다.

“일생에 한 번 올리는 혼례인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해야지요.”

“저 많은 짐을 들고 남몰래 사천 성도를 빠져나가야 하니까 신부 행세를 하는 거지 진짜로 혼례를 올리러 가나?”

예결은 투덜거렸다.

애당초 신랑이 아니라 신부 역할을 맡게 된 건 그가 가져가야 하는 짐을 혼수라 속이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다수의 무인이 행렬에 따라붙는 상황도 쉽게 설명할 수 있었다. 신부 집안에서 먼 지방으로 시집가는 딸을 위해 호위를 붙이는 걸 누가 의심하겠는가?

주변의 이목도 속이고 검문도 무난하게 통과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어차피 흑점의 낭인이 사인교를 들 거고 혼례 행렬도 전부 고용한 사람이잖아?”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생길 줄 아무도 모릅니다.”

짐짓 엄한 투로 말한 삼랑이 덧붙였다.

“무엇보다도, 남을 속이려면 스스로를 속여야 합니다.”

뭐라 말하려던 예결은 입을 다물었다. 그도 삼랑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그건 맞는 말이긴 해…….”

한숨을 푹 내쉬며 예결이 백기를 들자 삼랑이 제 가슴을 두드렸다.

“저만 믿고 맡겨 주십시오. 제가 분장 경력만 삼십 년 정도 됩니다.”

“……삼랑의 얼굴만 보면 삼십 년 전에 갓 태어났을 거 같은데?”

“그만큼 장인이라는 거지요.”

“최대한 가볍고 덜 치렁치렁하게 부탁해.”

“물론이죠.”

삼랑이 방긋 웃었다.

그리고 예결은 사기당했다.

삼랑이 시키는 대로 탕옥에서 온갖 향유를 바르고 씻은 예결은 옷과 비단이 가득한 방으로 이동했다.

“이것만 입어보면 돼?”

“물론이죠.”

천을 이리저리 대어보고 옷을 다섯 벌 정도 입었다 벗기를 반복했다.

“옷만 여섯 번째 갈아입었고 천 같은 거 묶었다 풀었다 하는 건 열두 번도 더 한 거 같은데?”

“신부는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어디 그뿐이랴, 패물이 가득한 상자를 몇 개나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하며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반지를 껴봤다.

“화장은 못 해. 안 해.”

“눈썹만 다듬을 테니까 가만히 계셔요.”

“그거 눈썹 다듬을 때 쓰는 칼 맞아? 뭔가 너무 크고 날이 시퍼런데.”

“아차.”

“……대사형 맙소사.”

만약 화장까지 했으면 절대 오늘 중으로 출발하지 못했으리라.

“무슨 옷 입는다고 반나절이 걸리냐고. 이러다가 해가 지겠다.”

인형 놀이를 마친 삼랑은 흐뭇해 보였다.

“잘 어울립니다.”

깐 달걀처럼 반지르르하게 빛나는 제 얼굴을 본 예결의 눈에 의심이 깃들었다.

“내가 그동안 삼랑 고생시켰다고 실컷 놀려먹은 건 아니지?”

생각해보면 사고를 좀 많이 치긴 했다.

삼랑의 호위 대상이면서 첫 상행 때 녹림과 손을 잡고 당가를 파묻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암시장과 거래를 튼 것만으로도 모자라 정체를 숨긴 대사형에게 치댔다. 대사형의 동기라 할 수 있는 괴호한테 제 이름을 제하량이라고 소개했고 또 마을 하나를 통째로 사들이라고 강짜까지 놨다.

“그럴 리가요.”

삼랑은 천연덕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성문이 닫히기 일보 직전에 통과할 예정이라서 남는 시간을 철저히 활용했을 뿐입니다.”

이백오십 퍼센트 고의다.

뭐라 항의할 말이 당장 수십 개도 더 떠올랐지만, 예결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모든 준비가 끝난 후 삼랑이 가져온 전신거울 안에는 완벽한 신부가 서 있었다.

보통의 여인보다 키가 컸지만 혼례복으로 무슨 조화를 부린 건지 가냘픈 느낌을 줬다. 폭이 넓은 소매로 남성적인 느낌이 나는 손을 가려버렸다.

삼랑이 눈썹을 좀 다듬자 선이 곱긴 해도 소년처럼 느껴지던 얼굴이 중성적인 인상의 미인으로 변했다.

어느 정도는 머리에 쓴 봉황관 덕이었다.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장신구가 시선을 적당히 분산시켰기 때문이다.

삼랑은 예결의 머리에 붉은 너울을 씌워주며 말했다.

“되도록 안 쓰면 좋겠지만 목소리를 내야 할 때를 대비해 약을 준비했습니다. 가냘픈 음성으로 변하지만 성대를 상하게 만들기 때문에 너무 자주 쓰시면 안 됩니다.”

“씹어 먹어? 아니면 삼켜?”

“입 안에 넣으면 저절로 녹아내릴 겁니다. 액체가 된 후에 삼키십시오.”

전체적인 옷매무새를 마지막으로 가다듬던 삼랑이 멈칫했다.

“아, 부작용으로 잠이 올 수도 있습니다.”

“줘.”

예결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꾸벅꾸벅 조는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같은 건 없었다.

어차피 에스퍼에겐 제대로 된 수면제도 잘 듣지 않는다. 수면제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종류의 약이 무용했다.

이렇게 말하면 무림인이 듣기엔 선천적 만독불침처럼 들릴 것이다. 모든 독이 통하지 않는 신체라니, 황족처럼 암살에 시달리는 위치에 있다면 침을 질질 흘리며 탐낼 체질이다.

그러나 에스퍼에게 있어서 모든 약물을 해독하는 신체는 축복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웠다.

각성 후 가이딩 없이 버텨야 하는 에스퍼는 필연적으로 고통과 불면에 시달리는데,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더러는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받기도 하지만 아무리 독한 약을 써도 그 효과가 미미할뿐더러 내성만 생긴다.

언젠가 게이트를 넘어온 이세계의 괴물이 내뱉은 극독에 중독된 에스퍼도 본 적이 있었다. 아스팔트도 쉽게 녹이던 독에 중독된 선배는 해독제를 쓴 것도 아닌데 반나절 정도 끙끙 앓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약 가이딩까지 받았다면 회복이 훨씬 빨랐으리라.

비슷한 사례를 몇 번 겪으며 능력자 센터에서는 에스퍼가 아예 중독되지 않는 체질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다만 에스퍼는 일반인과 달리 자체 해독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몸이 상하는 속도보다 재생하는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에 살아남는 것일 뿐이다.

“긴히 명령할 것이 있다면 가마의 벽을 세 번 두드리고 잠시 쉬었다가 두 번 더 두드리십시오.”

똑똑똑. 똑똑.

삼랑은 몸소 시범을 보여줬다.

“알았어. 우리 뱀뱀이만 잘 챙겨줘.”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결은 삼랑에게 뱀뱀이를 내밀었다. 항상 그의 손목을 타고 올라가던 뱀뱀이는 의젓하게 삼랑의 손바닥에 올라앉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다. 그러나 하필 남궁세가가 몸값을 내고 풀려난 청해상단주 문예결을 호위해 주겠다며 나섰다.

‘어떻게 거절하냐고.’

무려 오대세가 중 최고로 꼽히는 남궁세가가 도와준다는데 어떻게 싫다고 하냔 말이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걸 들키지 않으려면 냉큼 받아들여야 하는 제안이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뱀뱀이가 노출될 경우, 소중한 반려영물을 뺏길지도 모른다. 한술 더 떠서 마두와 손을 잡고 영물을 빼돌렸다는 혐의를 받을 수도 있다.

“정말 혼자 가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만약 일이 잘못되면…….”

삼랑은 그토록 갈망하던 뱀뱀이가 자신의 손으로 넘어왔는데도 반가움보다 걱정스러움을 드러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번개의 힘을 부리는 게 예결이 아니라 이 천년뇌각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결이 다소 수상쩍게 구는 모습을 몇 번 보이긴 했어도 아직까지는 그녀의 짐작일 뿐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주군의 명을 따르는 삼랑으로서는 아주 자그마한 ‘만약’이라도 좌시할 수 없었다.

“혼수품 훔치려는 어중이떠중이는 전부 낭인 선에서 정리되겠지.”

예결은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이게 청해상단주의 몸값이라는 걸 알고 온다고 가정해도 마찬가지야. 내 몸값은 흑점을 통해 비밀리에 움직일 예정이고 이 표물을 받아야 할 사람은 교룡왕이지. 어지간한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흑점과 장강수로맹 모두를 적으로 돌리려 들겠어?”

그처럼 아둔한 자는 흑점의 감시망을 뚫고 운반되는 표물에 손을 대지도 못할 거다.

“그럼…… 이대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삼랑은 납득했으나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천천히 물러났다.

사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이 방법을 반대했다. 삼랑은 직접 예결과 함께 장강으로 이동하겠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이를 기각한 건 예결이었다.

행여라도 발각당하면 대사형이 자신에게 넘겨준 청해상단이 크게 흔들리게 될 테니까.

예결은 제하량이 자신에게 준 선물에 흠집 하나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아름다운 신부가 사인교에 올랐다.

“출발한다.”

가마의 문이 닫히고 흑점에서 붙여준 무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젓하게 허리를 펴고 앉은 예결은 문이 닫히는 순간 공기가 꽉 조여드는 느낌을 받았다. 어딘지 모르게 매캐한 향이 가마의 내부를 맴돌고 있었다.

예결은 가슴이 조여드는 감각에 이맛살을 찌푸렸으나 이를 내색하진 않았다.

있지도 않은 혼례를 급조했으니 사인교가 겉모습만 멀쩡하고 안쪽은 아직 칠이 안 말랐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수은도 화장품이라고 썼던 시기인걸, 뭐.’

성문을 나설 즈음, 예결은 삼랑이 건네준 약을 먹고 여린 목소리로 검문을 통과했다.

‘머리가 좀 무거운데.’

수면제 효과가 있다더니, 현대의 감기약보다 살짝 독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긴 여행도 앞두고 있으니 눈을 좀 붙여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에 예결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다시 일어났을 때, 그의 안팎으로 보이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뜨……거워.’

저를 깨운 열기에 짓눌린 예결은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오래 가지 않을 약 기운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어차피 가이드가 없으니 잠든다 해도 선잠을 자는 게 고작이었고, 무언가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면 바로 깨어났으리라.

그러나 습격의 징조조차 없는 이변이 갑작스럽게 예결의 몸에 찾아들었다.

훅하고 치밀어오르는 열기에 예결은 몸을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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