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신부는 잠 못 이루고 (4)
이럴 생각으로 불렀구나.
남몰래 당서악을 쓱싹해도 아무 말 하지 않을 텐데 제하량이 아니라 흑귀가 나서려면 명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눈치다.
“제 몸에 일어난 일이니 청해상단 차원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예결은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그는 심술이 조금 난 상태였다. 몸까지 섞어놓고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말하는 사내가 당서악에게나 관심을 보이는 게 야속했다.
비록 그 관심이 살의라 해도 말이다.
그러나 예결의 거절이 무색하게도, 제하량은 이미 본인에게 필요한 명분을 챙긴 상태였다.
“이번 독살 시도에는 흑점의 책임도 존재합니다.”
“흑점이요?”
“문 공자께서 당한 독은 흑점 측이 제공한 가마에 덧발라져 있었습니다. 호위에 동원된 낭인을 회유했더군요.”
“금룡채 건이 꼬리가 밟힌 건가요?”
“예. 짐작하기론 그렇습니다.”
흑귀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비록 흑점이 돈이면 무엇이든 하는 단체라곤 하지만 최소한의 신의는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결은 찻잔을 내려다봤다.
“흑귀 님이 원하시는 건 본보기를 보이는 겁니까?”
“무도한 자들을 다루려면 규칙이 필요하니까요.”
“흑귀 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고분고분 답하자 흉악한 흑귀의 얼굴에 미소 비슷한 것이 스쳤다.
아마 남이 보기엔 인피면구에 자리 잡은 상처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게 전부일 것이다.
“약 기운이 생각보다 독해서 걱정했습니다.”
없는 일인 셈 칠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치고 들어온 하량의 발언에 예결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 독한 약은 아니었다. 적어도 에스퍼에게는.
‘독하긴 무슨.’
지난밤, 넘쳐흐르는 가이딩에 미약이고 독약이고 다 해독되었다. 예결은 하량이 한독을 입에서 입으로 먹여줄 때만 잠시 중독되었을 뿐이다.
말하자면 그저 가이드의 손길에 주체 못 하고 발정 난 한 마리의 에스퍼였을 뿐이다.
‘죽어도 말 못 해.’
“……덕분에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밤 흑귀 님이 제게.”
기회를 놓치지 않는 탐욕스러운 에스퍼가 운을 뗐다.
“저는 흑점의 사천지부장으로서 고객이 원하는 것을 제공했을 뿐입니다.”
아, 그렇게 나오시겠다?
대사형이 얄밉다고 생각하면서도 예결은 아무런 동요를 느끼지 않은 척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도 지부장님께서 직접 나서 주셨으니까요. 흔한 일은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여태 겪어본 하량의 성격에 그럴 리가 없다.
만약 흔한 일이라면, 그때는 어쩌지 싶었다. 어쩌면 태어나서 두 번째 폭주를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일이 그렇게 되면 흑점의 사천지부 정도는 중원에서 깔끔하게 지워질 테지.
‘정신 바짝 차리자.’
그는 하량이 이룩한 것을 부수고 싶지 않았다.
“……남과 닿는 것을 그리 좋아하진 않습니다.”
예결은 저도 모르게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황급히 단속했다.
하량이 본 것 같진 않았으나 제법 아슬아슬했다.
사람이 물건도 아닐진대 새것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이렇게 기분이 좋다니, 제가 속물이 된 것 같았다.
‘속물 맞지.’
예결은 서안에 가려진 대사형의 하반신으로 향하려는 시선을 애써 붙들어 맸다.
마냥 상상만 할 때도 좋았는데 저기 무엇이 있는지 알고 나니까 더 좋았다.
견물생심이라고 하던가.
한번 취하고 나니 만족보다도 갈증이 성을 내며 몸을 부풀렸다. 에스퍼란 족속은 타고나기를 그런 욕심쟁이였다.
“지난밤 있었던 일은 저희 둘 사이의 비밀로 남는 것입니까?”
어두운 생각을 털어내며 예결이 꺼낸 말에 하량이 답했다.
“손님의 내밀한 사정까지 팔아먹을 정도로 흑점의 사정이 곤궁하진 않습니다.”
온 중원에 소문을 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예결은 안심한 사람처럼 눈을 내리깔았다.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신세를 지는군요.”
“신세라고 하지 마십시오. 저야말로 문 공자에게 사죄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다.”
“어째서요?”
예결의 낯에 아연함이 스쳤다.
딱히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욕정의 노예도 아니면서 밤새 몸 바쳐 봉사하고 가이딩까지 두둑하게 채워준 하량이 무슨 사죄를 한단 말인가?
“돕기 위해서라지만 제대로 된 허락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예결은 입술을 몇 번 벙긋거리다가 다물었다.
‘이 정도로 사람이 좋으면 역시 감금해서 보호하는 게 답이다.’
가이드에 미친 에스퍼라면 한 번쯤 입에 담았을 정당화였다.
자기 객관화가 잘되어 있는 예결은 그 생각이 들자마자 혀를 아프게 깨물어 스스로를 응징했다.
“제가 가장 약한 순간에 곁에 계셨던 게 흑귀 님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날것 그대로의 진심이었다.
“당신을 도우러 오지 않은 대사형을 원망하진 않습니까?”
예결은 퍼뜩 몸을 굳혔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 질문의 주인이 흑귀가 아니라 제하량임을 알아챘다.
“저는 저 자신을 원망합니다.”
고민조차 없이 내뱉은 말에 흑귀의 눈이 조금 커졌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저는 나약하고 아둔하기 짝이 없어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자꾸 대사형에게 의지하려 드니까요.”
예결은 제하량에게 내보이지 않을 여린 살을 흑귀의 앞에 펼쳐놓았다.
상처를 핥듯 보듬어 주어도 좋고 게걸스럽게 물어뜯어도 좋다.
예결은 대사형이 자신에게로 올 길을 만드는 중이었다.
“그분이 이번 일을 몰라서 다행이지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대사형을 앞에 둔 채, 제하량은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만든다.
집에 돌아가는 길을 찾기 위해 희게 빛나는 조약돌을 뿌린 동화 속 남매처럼, 예결은 바로 그 비밀을 이정표로 삼았다.
본인이 제하량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이상, 흑귀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비밀은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예결은 빙그레 웃었다.
“감사합니다.”
제하량이 둘러쓴 기만을 이용할 수 있는 건 예결도 마찬가지였다.
***
일찍이 장강에서의 전투 때, 당서악은 금룡채를 배신하며 그 수적 중 몇을 생포해 포로로 삼았다.
그 수적 중 하나는 신호탄을 옮긴 이가 흑점의 낭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흑점, 흑점이라.”
흑점은 돈만 내면 손님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찾아준다는 단체의 이름이다.
이제는 사라진 어느 황가의 귀물, 바다를 건너야 갈 수 있는 이국의 귀한 향신료, 역사에 이름 높은 옛 서예가의 작품…….
무엇이든 대가를 낼 수만 있다면 척척 구해 고객에게 연결해 주었다.
기본적으로 암시장의 형태를 취하고 있긴 했으나 흑점이 제공하는 건 물건뿐이 아니다. 때로는 신분이, 때로는 인력이 흑점을 통해 거래되었다. 이 돈에 미친 자들은 죽음마저도 거래했다.
해온 일이 있는 만큼 적도 많은 데다 온갖 탐욕스러운 이들이 달라붙었음에도 흑점은 항상 건재했다. 흑점을 뒤흔들어 보려다가 영영 사라졌다는 이들의 풍문은 주기적으로 뒷골목을 떠돌았다.
생존자나 목격자 하나 없이, 그저 괴담으로만 남은 이유는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확인할 겨를조차 없이 그들의 존재가 지워졌기 때문이다.
흑점의 진면목을 엿보고 살아남은 몇몇 의뢰인들은 제대로 된 값만 치른다면 물건뿐이 아니라 진정 원하는 바도 이루게 해준다고 말했다.
당서악은 흑점의 존재를 냉소적으로 평가했다. 운 좋게 소문이 퍼지는 걸 막았을 뿐, 삼류 낭인이나 칼밥 먹으러 드나드는 곳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금룡채주는 흑점의 원조를 받을 수만 있다면 장강수로맹의 주인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그 시끄러운 입을 닥치게 하려고 당언보의 호주머니를 금룡채주 만악에게 던져준 것이 바로 당서악이었다.
당서악은 흑점을 예의주시하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한 경매에 참석한 당서악은 당가가 잃어버린 청해상단의 표물을 발견했다. 혹시 몰라 당언보를 불러낸 당서악은 누이에게 이번 상행 때 본 물건이 있다면 무엇이든 좋으니 지목해 보라고 말했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긴 했으나 당언보가 찾아낸 상품이 두 손을 넘어서자 당서악은 잠정적 결론을 내렸다.
그 같잖은 신임 상단주가 자신을 속였다.
기만당하는 것, 즉 얕보이는 걸 제일 싫어하는 당서악은 분노를 느꼈다.
청해상단과 교룡왕이 얼마나 긴밀한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당가에서 밀려난 만큼 놈들도 나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 당서악을 사로잡았다.
그는 청해상단이 몸값 명목으로 교룡왕에게 보내는 물건을 가로채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사촌누이가 가진 상계의 인맥은 이럴 때 도움이 됐다.
‘아둔하기는.’
만약 자신의 부친이 당언보의 아비처럼 부유한 데다가 유능한 상인이었다면 당서악은 지금의 누이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 자신이 있었다.
까닭에 당서악은 사촌누이를 아끼면서도 그녀를 한심하게 여겼다.
“……또 흑점을 통해서 운반되는군.”
당서악은 픽 웃었다. 농락당하기만 했으니 이젠 그가 복수할 차례였다.
예전에 금룡채주 만악이 썼던 당언보의 전낭을 미끼로 낭인을 꾀어냈다. 당서악은 운이 좋았다. 만악과 손을 잡을 뻔했던 자가 청해상단이 보낸 짐을 호위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몸값이 혼례 행렬로 포장될 거라는 사실을 들은 당서악은 호기심을 느꼈다. 어쩐지 그 ‘신부’가 이 행렬에서 가장 귀한 물건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당서악은 혼례복을 차려입은 문예결을 발견했다.
교룡채에 인질로 잡혀 있다더니, 이제 신부가 되어 연소소에게 줄 혼수와 함께 장강을 건너려 든다.
‘발칙하기 짝이 없군.’
당서악은 분노했다.
그래서 그는 문예결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낭인을 협박하고 얼러서 혼례 행렬에 사용될 마차를 손봤다. 여러 독을 사용하고 가장 아래에 미약을 감춘 건 순전히 당서악의 취향 때문이었다.
교묘하게 균형을 잡은 독으로 상대에게 끝없는 고통을 주고, 겨우 해독이 끝났다고 안도한 순간 미약의 열이 약해진 몸을 공격한다. 운이 좋으면 살아서 광인이 되고, 운이 나쁘면 심장이 터져서 죽게 되는 것이다.
당서악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이의 절망을 즐겼다.
이제 곧, 교룡왕은 시체가 된 청해상단주를 받아보게 될 것이다. 남궁운과 창궁비연대는 인질을 호위하기 위해 대기하기로 했으니 연소소가 협력자의 죽음을 확인하고 발광하는 순간의 목격자가 되리라.
그 후에는 청해상단이 쉬이 갚을 수 없는 청구서를 보내고, 이를 기반으로 가주의 신뢰를 되찾는 게 당서악의 계획이었다.
까닭에 그는 한달음에 남궁운의 앞으로 달려왔다.
무공이 강해도 무림 경험은 일천한 후기지수는 얼마든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놀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당서악의 앞에 앉은 남궁운은 금룡채주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 죽으면 가장 먼저 찾아오는 이를 조심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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