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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67화 (67/203)

67화. 신부는 잠 못 이루고 (5)

‘어째서지?’

‘당신과 내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두려워하는 자니까.’

남궁운은 그날 선실의 문을 두드리고 찾아온 이를 선명히 기억했다.

상대는 다름 아닌 당서악이었다.

장강수로맹과의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니 술 한 잔이라도 기울여야 한다며 넉살 좋게 웃었다.

당서악의 행태가 미심쩍긴 해도, 그의 행동양식 자체는 호인 같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금룡채주 만약의 말에 큰 무게를 두진 않았다. 패배한 이의 발악이라고만, 그렇게 여겼을 뿐이다.

하지만 당서악은 남궁운이 금룡채주와 나눈 대화가 무엇이었는지 은근슬쩍 떠보기 시작했다.

‘두려워하는구나.’

남궁운은 술잔을 들어 올리며 당서악과 어울려 주었다. 취한 척하며 금룡채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떠든 후에야 당서악은 안심하고 남궁운의 거처를 나섰다.

일이 이렇게 된 후에야 남궁운은 금룡채주가 배신자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은 채 모호한 단서만 던져준 이유를 깨달았다.

정파는 정파끼리 붙어먹기 마련이니 당서악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는 걸 피한 거다. 이간질이라고 판단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대신, 금룡채주는 남궁운의 뇌리에 의심의 씨앗을 심기로 했다.

스스로 판단하고 내린 결론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확신을 줄 테니까.

‘과연, 그 나이가 되도록 강호에서 살아남은 노괴다워.’

남궁운은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생각했다. 그의 부친인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한오는 아들에게 최대한 넓은 세상을 경험해보길 권했다.

길에 세 사람이 걸어가고 있으면 그중 한 명은 스승이라더니, 남궁운은 사파의 고수에게서조차 실로 많은 걸 배우고 있었다.

장강의 전투가 있었던 그 날 이후, 당서악은 사천에서 두문불출했다. 분명 당서악의 활약이 적지 않았음에도 그는 가주의 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근신 중이라는 서신만 보냈다.

남궁운은 조사를 위해 사람을 풀면서도 신중을 기했다.

너무 늦기 전에 당서악이 수채와 손을 잡았음을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당서악이 모습을 보이질 않으니 마땅한 증거를 찾지도 못했다. 괜히 타 가문의 자제를 핍박한다는 소리를 들었다가는 남궁세가의 평판만 땅에 떨어질 것이다.

까닭에 남궁운은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건 바로 교룡왕이 인질을 풀어줄 거라는 소식이었다.

남궁운은 인질이 몸값을 받은 후 수채를 빠져나올 때의 호위 역을 자처했다. 원래의 그였다면 마땅히 구해야 할 사람을 구하기 위해 나서야 하는 거라 판단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협행을 위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한데 출발하기 직전, 당서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니 지금, 청해상단과 교룡왕이 손을 잡았다는 건가?”

남궁운은 건너편에 앉은 사내를 바라봤다.

일개 후기지수가 아니라 남궁세가의 소가주를 상대하는 당서악은 예의를 차리며 답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중원의 서부에서 청해상단이 가지는 위상을 아신다면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도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서악은 대단한 위기가 올지도 모른다며 속살거렸다.

실제로 그런 위기가 있든 없든, 당서악은 상관없었다.

이번 폭로가 그를 최대한 높은 곳으로 올려주어야 했다. 가주조차 함부로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한 짐작으로 청해상단을 몰아갈 수 없음을 당 공자도 알 터. 확실한 증좌가 필요하네.”

“곧 그 증좌를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실 겁니다.”

당서악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제가 남궁 공자와 창궁비연대의 길잡이가 되겠습니다.”

“어째서 당가의 무사는 거느리지 않고 혼자 여기까지 온 건가?”

그 질문에 당서악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당가주가 자신을 믿어주지 않아 근신을 명했기에 혼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가주께서 제 안위를 걱정하신 탓에 몰래 나와야 했습니다. 장강은 저에게 위험한 곳이니까요.”

당서악의 사연을 이미 알고 있는 자가 두엇 있었기에 그의 허술한 변명은 그럭저럭 들어줄 만했다.

남궁운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당서악을 믿진 않았다.

단지, 당서악이 가져온 패를 뒤집어보지 않으면 그가 죗값을 치를 날이 한없이 멀어지리라 판단했다.

“장강에서 남궁을 도와 금룡채를 무너뜨린 당 공자를 믿겠네.”

남궁운이 명하면 창궁비연대는 그의 뜻에 따를 뿐이었다.

장강 강변의 숲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사람의 키보다도 높고 우거진 갈대밭이 나타났다.

“여기가 바로 교룡왕의 비밀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실으면 안 되는 물건을 싣고 옮기면 안 되는 사람을 강 너머로 건네주지요.”

처음 공을 세우기 위해 교룡왕을 팔아넘겼을 때, 당서악은 마지막 의리로 이 갈대밭에 숨겨진 나루터를 입에 담지 않았다.

잘된 일이었다. 그때 발설했다면 혼례 행렬이 어디로 가는지 위치를 특정하기 어려웠으리라.

“어디에서 이런 정보를 얻은 거지?”

“교룡왕 연소소의 한쪽 팔을 앗아간 옛 정인이 바로 저니까요.”

당서악은 몇 번이고 팔아치운 과거사를 혓바닥 위에 올렸다. 사실, 그는 이 사실을 입에 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대단한 노력을 하고 가문을 위해 헌신해도 사람들은 그를 교룡왕의 옛정인 따위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당서악이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다른 것으로 바뀔 것이다.

‘승천하지 않는 장강의 용을 토벌한 자.’

“곧 혼례 행렬이 여기에 도착할 겁니다. 아주 특별한 신부가 혼수를 한가득 싣고 장강으로 오고 있지요.”

“여기 어디에도 민가는 찾아볼 수 없는데 어찌 신부가 온단 거지?”

남궁운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주위는 습한 데다가 땅이 물러서 혼례를 올리기에 적절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기다려 보십시오.”

당서악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오만한 당서악의 낯에 빗금이 가고 초조함이 드러날 듯 말 듯 자리했을 때 저 멀리에서 풍악 소리와 함께 붉은 가마가 나타났다.

“……드디어!”

당서악은 그 가마를 바로 알아보고는 히죽 웃었다.

신부를 가장 경사스러운 날로 데려가는 바로 저 가마가 발칙한 소년의 관이 되었으리라 생각하면 퍽 즐거웠다.

“자, 그럼 신부를 맞이하러 가야겠군요.”

지독한 독 기운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저 안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청해상단주를 끄집어내기 위해 당서악은 몸을 일으켰다.

갈대 사이를 부드럽게 미는 바람처럼 움직이는 당서악의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누구냐!”

행렬을 지키던 호위 무사가 가마를 둘러쌌으나 대 사천당가의 혈족인 당서악을 막을 수 있는 수준의 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자, 그럼. 어서 얼굴을 보여 주시지요.”

당서악은 일부러 가마의 벽을 맨손으로 뜯어냈다. 여기에 독을 칠했으니 적당히 장강의 물에 던져서 자신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지워낼 생각이었다.

한데 그때.

“꺄악!”

가냘픈 여인의 비명이 강변 일대에 울려 퍼졌다.

“우리 아씨를 놔라! 놔라, 이놈아!”

허겁지겁 달려온 신부의 늙은 유모가 신발을 벗어 들고는 당서악을 마구 내리쳤다.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는데?”

당서악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비틀비틀 물러났다.

신부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신부가 가마에 타고 있었다. 머리에 쓴 붉은 너울이 흘러내리고 삐뚤어진 봉황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무슨 무도한 짓인가!”

한 발짝 늦게 달려온 운은 모든 상황을 목격했다.

“당장 민간인에게서 떨어지게!”

남궁운이 나서서 당서악과 신부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당서악을 마구 때리던 늙은 여인이 달려가 신부의 어깨를 감싸고 아가씨, 아가씨 하며 그녀를 달랬다.

“무언가 착오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여자도 교룡채에 협조하는 사람일 수도 있으니 가둬놓고 조사해야 합니다.”

당서악은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기민하게 알아챘다. 이는 단순한 현실 부정이 아니었다.

저 신부는 수상하다.

이렇듯 적당한 장소에 적당한 시간에 맞춰 적당한 인물을 보내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그러나 남궁운은 이미 당서악을 불신하고 있었으며, 무공을 익히지 않은 젊은 여인을 함부로 다루는 모습에 당서악의 인격이 알려진 바와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자네는 지금 혼례를 올리러 가는 신부를 겁박하고 있네. 게다가 교룡채에 인질로 잡힌 청해상단주를 호위하러 가는 창궁비연대의 발목마저 잡고 있지.”

당서악은 이를 악물었다. 어린놈이 벌써 권세를 휘두를 줄 알았다.

이런 식으로 을러대면 당가주의 눈을 피해 마지막 도박을 걸러 온 당서악으로서는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제가…… 무언가 잘못, 정보를 전달받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 신부가 해오는 혼수를 확인해 보시면 전부 청해상단의 물건이라는 걸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저게 다 청해상단주가 교룡왕에게 남몰래 바치는 돈이란 말입니다.”

당서악이 이를 악물었다.

신부의 늙은 유모가 악을 쓰며 외쳤다.

“당연히 청해상단을 통해 혼수를 준비했지요! 사천과 청해 일대에 청해상단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얼마나 있단 말입니까?”

“왜 이 숨겨진 나루터를 통해 장강을 건너려는 거지?”

“당신 같은 미친놈이 혼수를 강탈하려 들어서 우리 마님께서 고용해주신 표사가 산적과 수적이 없는 길을 안내해주고 있었습니다!”

카악 퉤, 하고 늙은 여인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신부가 유모, 하고 가냘픈 음성으로 속삭였다.

“……당 공자. 저는 지금부터 지체 없이 청해상단주를 호위하기로 한 장소로 갈 예정입니다. 도울 뜻이 있다면 따르시고, 여전히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할 생각이라면 사천으로 돌아가십시오.”

당서악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 청해상단주. 그 발칙한 문 공자가 장강에 있는지라도 확인해야 한다. 연소소가 그 시체를 받아서 노발대발하는 꼴이라도 확인해야 조금의 위안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궁 공자를 따라가겠습니다.”

“경사스러운 날을 맞이한 소저를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이후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신다면 창천 남궁세가의 남궁운을 찾아와 주십시오.”

신부는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궁운으로부터 목패를 받아 챙겼다.

대충 일이 정돈되자 창궁비연대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다행스럽게도 교룡왕이 그들을 불러낸 약속 장소는 여기에서 가까운 편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표국의 쟁자수로 보이는 이들이 청해상단주의 몸값처럼 보이는 귀중품을 강가에 늘어놓는 게 보였다.

당서악은 여기 오기 전 구한 죽립을 눌러쓰며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모든 게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늘의 일을 치를 면면들이 모이자 검게 칠한 상선이 장강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교룡왕의 수하, 왕호탁이 갑판에서 이쪽을 확인하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장강의 물속에서 검은 인영이 불쑥불쑥 솟아올라 창궁비연대를 포위했다. 남궁운을 비롯한 남궁세가의 이들은 몸을 긴장시킬 뿐,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인질이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렸다.

“이 정도면 몸값을 하고도 남는군. 거, 손님을 모셔 와라.”

왕호탁의 명에 수적이 배 아래로 사라졌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초췌한 낯의 청해상단주가 갑판 위에 얼굴을 비췄다.

“남궁…… 공자님?”

실로 오랜만에 햇빛을 보는지 눈이 부신다는 양 눈을 끔뻑끔뻑하던 예결의 남궁운을 발견하는 순간 환하게 웃었다.

“무사하셨군요.”

남궁운이 안도를 숨기지 못한 채 인사를 건넸다.

모습을 감추기 위해 얼굴을 죽립 아래 감추고 한 발짝 물러나 있던 당서악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살아 있는 청해상단주를 바라봤다.

“……정말로, 정말로 구하러 와주셨군요.”

고개를 툭 떨군 예결은 어깨를 들썩였다.

“괜찮습니다. 이제 다 괜찮을 겁니다.”

남궁운이 애타는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건 말건, 당서악의 낯은 무참히 일그러졌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나보다 먼저 장강에 도착한 거지?”

에스퍼의 예민한 청각에 당서악의 혼잣말이 걸려들었다.

남궁운의 등장에 감격한 척 어찌할 바를 모르고 훌쩍이면서도 예결은 속으로 혀를 날름거렸다.

‘느이 집에 적뢰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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