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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68화 (68/203)

68화. 신부는 잠 못 이루고 (6)

중원의 에스퍼는 전용기 하나 띄울 수 없는 나약한 존재였다. 그러나 대사형의 사제 예결은 그의 수하가 다루는 준영물급 말을 빌릴 수 있는 능력자였다.

예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가 무섭게 적뢰를 찾았다. 얼마 전 흑점 사천지부로 예결을 데려다준 홍여가 이미 출발해서 멀어진 상태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는 성도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자신을 몸져눕게 한 이를 처리하기 위해 적뢰를 빌려달라고 말하자 홍여는 흔쾌히 고삐를 넘겼다.

어쩐 이유인지 자신에게 호의적인 홍여를 설득하긴 쉬웠다. 그러나 다음 장벽이 있었다.

바로 삼랑이었다.

“한창 기분 좋을 텐데, 이럴 때 찬물 끼얹으러 가면 딱이지.”

“어차피 그 남자는 망했어요.”

삼랑은 주군의 분노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언제고 교룡왕의 손아귀에 찢겨 죽을 사내긴 했으나 이번 일로 당서악은 제 수명을 크게 단축했다.

“눈앞에서 절망하는 꼴을 보고 싶다니까 그러네.”

“문 공자, 도가 문파 출신 아니에요?”

삼랑으로선 곤륜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대체 예결의 성질머리가 왜 저런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대사형의 사제이긴 하지.”

삼랑은 흠칫했다. 예결이야 모르고 한 말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우문현답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삼랑은 예결을 보내주기로 했다. 그의 의사를 존중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인성질에 호기심을 느낀 것에 가까워 보이긴 했다.

뭐, 어쨌든 설득은 성공한지라 예결은 쾌재를 불렀다.

마지막 난관이라 여겼던 대사형은…… 모르겠다.

흑점에서도 흑점 나름의 방식으로 당서악과 낭인을 처리할 거라는 암시를 남긴 면담 후 흑귀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대사형이 반대했다면 예결은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으리라.

‘어째 중원 와서 대사형 덕을 안 보고 넘어가는 날이 없는 기분인데.’

청해에서 가장 큰 상단의 주인이 된 것도 그렇고, 교룡왕의 인질이 되었다가 풀려난 것도 대사형의 인맥 덕분이었다.

예결은 에스퍼의 유능함을 뽐내려고 결심했던 과거를 떠올리곤 착잡해졌다.

센터의 선배 에스퍼가 한 말 중 틀린 게 하나 없다. 에스퍼는 그냥 예쁜 쓰레기였다.

‘나만큼 가이드 의존도가 높은 에스퍼는 역사상 처음일 거 같은데.’

적뢰는 말 그대로 붉은 번개처럼 이동했다. 몇몇 목격자가 있긴 했으나 얼굴까지 가리고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예결의 정체를 알아챌 리 만무했다.

예결은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교룡왕과 약속한 장소에 도착해 왕호탁을 만났다. 그런 덕에 지금까지 계속 교룡채에 붙들려 있던 것처럼 무사히 인질 행세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볼일 다 봤음 썩 꺼지쇼.”

왕호탁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도발에 가까운 행태였으나 창궁비연대는 침착하게 자리를 지켰다.

남궁세가의 무인이 겁쟁이라서, 호승심을 몰라서 자리를 가만히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의 소가주가 아직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계산이 확실하니 말해주는 건데, 다른 마음을 품었다가는 좋지 않은 꼴을 보게 될 거요.”

호탕해 보이는 낯에 씩 올라가는 입꼬리가 퍽 스산했다.

“장강의 시커먼 물결은 가진 놈 없는 놈 모두 공평하게 집어삼키니 말이야.”

[남궁 공자. 이런 모욕을 받으면서도 가만히 계실 겁니까?]

기다렸다는 듯 당서악의 전음이 남궁운의 귀에 꽂혔다. 저런 어쭙잖은 도발에 진심으로 분노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남궁운에게 청해상단주와 교룡왕이 손을 잡았다는 소리를 속살거렸다.

독에 당한 문예결이 이토록 멀쩡한 몰골로 교룡왕의 품에서 걸어 나올 수 없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남궁세가는 몰라도 그 소가주인 남궁운은 당서악의 모략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아직 젊은 무림인의 호승심을 부추겨서 상황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놔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

“장강의 주인께 안부 전하도록.”

그러나 남궁운은 순순히 물러났다.

[남궁 공자?]

당혹으로 가득한 당서악의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그러나 남궁운은 돌아보지 않은 채 예결을 부축해서 강가를 벗어났다. 당서악은 낭패를 숨긴 채 창궁비연대 사이에 섞여들어 걸음을 옮겼다.

왕호탁은 당서악의 얼굴을 아는 연소소의 측근이었기 때문이다.

갈대밭을 완전히 떠난 후에야 그는 예결의 상태를 면밀하게 살피며 명령을 내렸다.

“대주는 나와 함께 상단주님을 호위한다. 부대주는 주변을 경계하며 뒤쫓는 자가 있는지 확인하고 삼조는 척후로 앞서서 길을 열도록.”

“존명!”

남궁운이 예결을 살피는 중 성큼 다가선 당서악이 말했다.

“대남궁세가는 수적과 타협하기로 한 것이오?”

“인질을 구하기로 했을 뿐이다. 본 공자는 그럴 목적으로 장강에 온 것인데, 당 공자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군.”

예결은 그 서늘한 음성에 깜짝 놀랐다. 당서악을 대하는 남궁운의 태도는 예상외로 고압적이었다.

‘대사형처럼 선한 성품으로 이 거친 무림을 어찌 헤쳐 나가려나 했더니…….’

멋으로 남궁세가의 소가주 타이틀을 단 건 아닌 모양이었다.

당서악은 침묵했다.

더는 당가의 대주도 아니고, 가주의 명조차 짊어지지 않은 그는 남궁운과 동등할 수 없었다. 심지어 사천에서 몰래 빠져나오기까지 했다.

반드시 성공해야 했을 도박은 수포가 되었다.

이제 그에게 패가 몇이나 남았겠는가?

당서악의 어둑한 시선이 예결에게로 향했다.

“문 공자가 이토록 무사한 모습으로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예결은 답하지 않은 채 부축받느라 남궁운의 등에 대고 있던 손을 떨었다. 남궁운이 의아함 가득한 얼굴로 예결을 바라봤다.

“……인질로 잡혀 있을 때 무슨 일을 겪었습니까?”

조심스러운 질문에 예결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그러니까, 남궁 공자에게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냘프기 짝이 없는 음성이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제 앞에서는 하지 못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노골적으로 당서악을 피하려는 행태였다. 당서악은 입술이 살짝 마르는 걸 느꼈다. 남궁운과 단둘이 대화를 나누려는 문예결을 막아야 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안개 속에서 청해상단주가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너무나도 자명하므로.

“당 공자께서는 부디 양해를…….”

예결은 우물쭈물 계속해서 회피하려는 척 남궁운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남궁운이 예결과 당서악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제 막 구출된 문 공자에겐 안정이 필요합니다.”

“……하면 남궁 공자께서도 문 공자를 쉬게 해 주셔야지요. 이제 겨우 한숨 돌린 인질에게서 적진의 상황을 캐내려 할 것이 아니라.”

거의 대놓고 도발을 던지는 당서악의 말에 주변의 공기가 긴장감으로 팽팽해졌다. 사실상 남궁운이 공에 눈이 멀어 민간인을 함부로 대한다는 비난이나 다름없었다.

창궁비연대주가 검의 손잡이를 쥐고 한 발 내디뎠다. 당서악은 속으로 비죽이 웃었다. 몇 대든 맞아주면 그만이다.

일단 상황의 논점부터 흐려 놓고 공작할 시작을 벌면…….

“상선이 통째로 교룡선에 나포당한 이유가 바로 당신이기 때문에 남궁 공자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려 한 겁니다!”

예결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괴로워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음성으로 외쳤다.

정면 승부를 걸어오는 예결의 행태에 당서악은 눈을 크게 떴다.

본인의 장기인 음해와 모략을 사용하기도 전에 얻어맞았으니 머리가 얼얼할 만도 했다.

“제가 어찌 문 공자를 해하려 든단 말입니까? 당가와 청해상단은 계속 좋은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당서악은 누명을 씌우러 왔다가 누명을 쓰게 된 상황에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차분한 음성을 내려 애썼으나 무공 한 초식조차 모를 같잖은 백면서생이 남궁운을 방패로 자신에게 맞서려는 모습이 그의 열등감과 분노를 자극했다.

“하지만 제가 새로 상단주가 되면서 익선문과 옥형문에 호위를 맡기기 시작했지요!”

냅다 말하곤 희게 질린 예결은 자신의 입을 가리며 남궁운의 뒤에 몸을 웅크렸다.

“아냐. 아닙니다. 제 말은 잊어주세요. 수적들이 하는 말을 엿들었다고 대사천당가의 혈족을 망령되게 거론하다니. 인질 생활이 고된 바람에 제가 미친 모양입니다.”

이를 악물고 흐느낌을 삼키려 어깨를 들썩이는 예결의 초췌한 얼굴에는 어떤 비장함마저 서려 있었다.

마치 사천당가가 상단에 끼칠 외압을 걱정해서 차라리 본인이 모든 비밀을 떠안고 입을 다물려 하는, 그런 결연한 마음가짐의 젊은 상단주 같았다.

“자. 채 안정이 되지 않은 문 공자께 그런 말을 꺼내게 만든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남궁 공자! 설마 저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당서악은 다급하게 물었다.

처음 문예결과 엮일 때부터 거듭된 불길한 사건과 사고가 그의 안에 경각심과 초조함을 불어넣었다.

“충분한 조사가 있을 겁니다.”

남궁운은 그리 말하며 당서악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 이를 약조하지요.”

진실로 상대를 존중하는 양 남궁운의 말씨는 공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당서악은 차마 기뻐할 수 없었다.

남궁운이 이를 가문 대 가문의 문제로 끌어가리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이를…… 이제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사천으로 돌아온 당서악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해치운 일은 당언보에게 자신의 죄를 일부 뒤집어씌우는 거였다.

당서악의 손발이 되어 움직였던 당언보는 그림으로 그린 듯 완벽한 희생양이었다. 그토록 경애하던 사촌 오라비를 대신해 옥사에 갇힌 당언보가 넋이 나간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오라버니……. 아니지요? 저를 이리 잘라 내신다고요?”

“나 홀로 전부 떠안으면 필히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짐을 나누어 들면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다.”

사촌 누이의 입을 막고 증언을 통일하기 위해 찾아온 당서악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당언보를 어르듯 말했다. 그러나 당서악의 감언이설은 오늘만큼은 통하지 않았다.

“오라버니…….”

말없이 듣던 당언보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지며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내내 당신의 짐을 나누어 들었는데 그 이유로 이리 갇히는 신세가 되지 않았습니까? 함께 살아남으면, 대관절 무엇이 달라진단 말입니까? 이다음에 같은 일이 있더라도 오라버니는 저를 손쉽게 내버리실 텐데요.”

“언보야.”

저를 타이르는 듯 다정하면서도 엄격한 어투였다. 그러나 당언보에겐 더는 그 어떠한 권위도 느껴지지 않는 음성이었다.

“저는 오라버니가 가엾습니다.”

당서악은 이를 악물었다.

“너까지 나를 동정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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