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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70화 (70/203)

70화. 신부는 잠 못 이루고 (8)

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남궁운은 목패를 회수했다.

“강호의 선배께서 후학을 너무 놀리시는군요.”

살과 살처럼 보이던 손이 맞닿는 순간,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남궁운의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었다.

그날 만났던 신부는 처음부터 교룡왕 연소소였으리라.

교룡왕은 참으로 손쉽게 남궁운을 속였다. 길게 늘어뜨린 옷소매로 의수를 가리고, 화려하게 꾸민 사인교가 남궁운의 눈을 가렸다.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은 남궁운은 스스로를 돌아봤다.

하필 신부의 모습으로 나타난 이유가 궁금하긴 했다. 왜 그들을 염탐하러 온 것인지도.

‘정말로 몸값을 가져오는지, 아니면 완전 무장한 상태로 그들을 습격하러 오는지 확인하려 한 건가?’

무림의 대의란 참으로 이상한 셈법을 가지고 있었다. 일개 상단주를 희생하고 장강수로맹의 맹주를 죽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협의다.

그러니 교룡왕은 거래가 성사되기 전까지 주변을 면밀히 살필 법도 했다.

남궁운의 가설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당서악을 속이고 그가 절망하는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서 왔던 걸지도.’

교룡왕의 악의가 얼마나 깊은지 몰랐기에 이건 그저 짐작일 뿐이다.

만약 교룡왕이 감정적인 이유로 나타난 것이었다면 당서악이 혼례 행렬을 습격해야 한다고 한사코 주장했던 이유도 이해가 갔다.

교룡왕이 당서악을 꼬여내기 위해 단서를 흩뿌려 놨으리라.

본인의 관점에서 당장 쥐고 있는 단서만을 가지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남궁운은 교룡왕이 등장하고부터 넋이 나간 당서악을 내려다봤다.

“소소……?”

이름보다도 무림명으로 더 자주 불리는 무시무시한 장강의 지배자를 상대로, 참으로 친밀하게 들리는 부름이었다.

옛정에 호소하려는 의도가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그리 부르는 게 익숙했기에 입에 밴 방식으로 상대를 불렀을 뿐이다.

“그래. 내가 왔다. 오래전 약속했듯이. 반드시 네게 받아낼 것이 있어 이리 왔단다.”

남궁운과 교룡왕의 대담을 지켜보며 상대가 누군지 확신을 얻은 당서악은 달아나려다가 발이 꼬여 비참하게 넘어졌다.

바닥에 엎어진 채로도 퍼뜩 몸을 일으켜 남궁운에게 기어간 당서악은 그의 발치에 매달려 애걸했다.

“남궁, 남궁 공자! 나를 살려주시오. 나를 살려준다면 당가가 숨겨놓은 재보의 위치를 알려주겠소! 아니면 복용했을 때 내공이 크게 증진하는 독단의 제조법도 알려주겠소!”

이대로 끌려가면 죽는다.

당서악은 오랜 시간 동안 연소소의 옆을 지켰던 만큼, 교룡왕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단언컨대 그는 타오르는 불꽃보다 깊고 어두운 장강의 물결을 더 두려워했다.

하나 남궁운은 당서악의 말 따윈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고요히 서 있었다.

청해상단주가 인질로 잡혀 있을 때, 당서악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남궁운보다도 문 공자를 더 오래 알았을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본인의 목숨이 걸린 순간에는 얼굴을 바꾸고 절박하게 매달리는 것이다.

심지어 문예결이 인질이 된 이유조차 당서악의 농간이 있지 않았던가? 그는 마지막까지 죄책감 한 점 없이 본인의 잘못을 숨기려 모든 것을 청해상단주에게 뒤집어씌우려 했다.

‘어째서…….’

무림에 나와 이런 순간을 마주칠 때마다, 남궁운은 환멸을 느꼈다.

선한 이는 한 줌인데 제 한 몸만 건사하려는 이는 너무도 많았다.

“순순히 내주려는 건가?”

위협적으로 의수를 움직이는 교룡왕의 질문에 내내 당서악의 애걸을 무시하던 남궁운이 반응했다.

“그럴 리가요.”

남궁운은 검을 들어 본인의 얼굴을 그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비도에 긁히기라도 한 것처럼 절묘한 상처가 생겼다.

벌겋게 벌어진 살갗이 흉하게 느껴질 법도 하건만 남궁운의 단정한 낯에 생긴 상흔은 젊은 무인에게 비장미를 더할 뿐이었다.

“죄인이 달아나서 어쩔 수 없을 뿐입니다.”

“남궁세가의 젊은 소가주가 제법 유연한 성품이었군. 이 건은 후일 사례하지.”

“당신이 인질을 온전히 돌려주었기에 저 또한 호의를 보였을 뿐입니다.”

그러니 상호 간에 빚은 없다는 뜻이다.

교룡왕은 웃어버렸다. 문예결은 남궁운이 없더라도 두 발로 걸어 나갔을 테지만…… 그런 걸 남궁의 어린 도련님에게 알려줄 이유는 없었다.

연소소는 오래전부터 악당이었다.

“그럼, 나는 미뤄둔 회포를 풀러 가야겠네.”

붉은 너울을 도로 뒤집어쓴 연소소는 오래전 달아난 정인과 함께 갈대밭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마지막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교룡왕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남궁운은 창궁비연대를 향해 돌아서서 명령했다.

“전속력으로 하북까지 이동한다.”

“존명!”

그렇게 한때 당서악이 품었을 풍운의 꿈은 장강의 검은 물결 아래로 영원히 잠들었다.

***

“결아!”

예결은 그 부름에 두 눈을 크게 떴다.

하량이 장원의 대문 밖까지 나와 있었다.

한달음에 달려온 대사형은 예결이 적뢰에서 내리기도 전에 그를 안아 올렸다.

“사형?”

“무사했구나.”

재차 확인하듯, 그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속삭였다.

“무사했어.”

예결은 대사형이 자신을 살려 놓고도 이토록 격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본인이 흑귀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라기엔 너무도 노골적인 안도가 느껴졌다.

‘흑귀일 땐 차마 할 수 없던 말…… 같은 건가?’

제하량의 품에 안긴 채 숨을 깊게 들이쉰 예결이 속삭였다.

“많이 걱정하셨죠?”

“일하고 온다던 아이가 수적의 인질로 잡혔다질 않나, 상대가 교룡왕이라 안도했더니만 또 당서악이라는 자를 잡아들일 함정을 파겠다고 직접 나서더니…… 독에 중독됐다고.”

예결을 품에서 떼어낸 하량은 희게 질린 손으로 그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제대로 해독된 것이 맞더냐?”

“흑점에서 붙여준 의원이 완전히 해독됐다고 알려줬어요.”

‘아쉽게도 말이지.’

예결은 입맛을 다셨다. 어차피 죽지도 않는데 해독이 너무 빨랐다. 석 달 열흘을 앓으며 가이딩을 받아도 부족하건만 하량이 지나치게 유능한 가이드라는 게 문제였다

예결은 서글퍼졌다.

‘어디 가서 독을 구해다가 퍼마실 수도 없고.’

독은 구하기 어려운 자원이다. 중원은 독살이 종종 일어나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독의 제작과 유통 전반에 감시의 시선이 닿아 있었으며 공공연히 독공을 쓰는 세력은 몇 되지 않는다. 심지어 저 사천당가조차 오대세가 중 하나면서 독공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될 때가 있지 않던가.

“의원은 믿을 수 없다.”

“삼랑이 확인해 줬어요.”

이미 하량이 알고 있을 사실이지만 예결은 귀찮은 기색 없이 답했다.

그러고 보니, 중원에 처음 떨어졌을 때부터 대사형은 의원을 못 미더워했다. 폭주의 여파로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중에도 의원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워낙 상태가 호전되지 않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러 의원을 불러들인 게 아닐까 짐작했었는데……. 역시 그건 아닌 거 같지?’

곤륜산에서 갓 돌아왔을 때는 제하량의 집요함을 좀 더 제대로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여러 의원에게서 진단받고 교차 검증해서 나온 결과를 또 삼랑을 통해 한 번 걸러낸 후에야 받아들인다.

“삼랑이 확인했다니 됐다.”

하량은 애틋한 눈빛으로 예결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그를 다시 품에 끌어안았다.

이 시대 사람치고 접촉이 잦은 편이긴 했다. 그러나 흑귀의 손길을 기억하는 예결은 지금 대사형의 태도가 얼마나 담백한 것인지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일반적인 사형제지간보다는 절절하긴 해도 대사형에게서 느껴지는 건 사제에 대한 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인공호흡이나 다름없는 정사였던 건 알지만 이렇게까지 건조할 수 있나?’

대사형이 항상 두르고 있던 도덕이나 상식 같은 게 지난 세월 동안 망가졌다는 건 알아챘다. 그가 아는 제하량은 아무리 특수한 상황이라도 사제에게 손을 댈 사내가 아니었다.

그러나 사제의 몸을 범한 지금의 대사형에게서는 일말의 번민이나 죄책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양심이 탈부착식도 아닌데.’

간을 햇볕에 말려두고 왔다는 토끼의 말에 속은 별주부가 된 기분이다.

거짓말이라는 걸 아는데 너무도 태연자약한 상대방의 태도를 믿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

다만, 예결은 전래동화 속 별주부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존재했다.

“읏…….”

하량의 손길이 가슴께를 스치자 예결은 부러 어깨를 움츠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결아?”

다정다감한 어투로 이름을 부르는 하량의 목소리에 예결은 화들짝 놀란 양손을 내저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사형이 의식하지 않으면 뭐 어떤가? 그럼 예결이 의식하면 된다. 흑귀의 문제라고 생각해서 제하량이 선을 그었다면 대사형의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거다.

속으로 혀를 날름 내민 예결은 슬그머니 거리를 벌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량이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정도로만.

‘내 가이드 양심이 탈부착식일 수도 있지.’

모든 면에서 완벽한 가이드가 양심 좀 넣다 뺐다 하면 어떻단 말인가?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 정도 재간은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대사형, 저는 양심 없이 태어난 종자라서.’

일부러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예결은 눈을 내리깔았다.

‘가이드와 거리를 벌리는 건 고통스럽지만, 이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거든요.’

손 뻗으면 얼마든지 닿을 거리에서 하는 생각치고는 그렇게 뻔뻔할 수가 없었다.

원체 에스퍼란 족속이 다들 그랬다. 에멘탈 치즈처럼 맛있는 것도 아닌데 성격 여기저기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는 편이다.

“얼굴이 붉은데…….”

하량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아녜요. 그냥, 간지러워서!”

아무렇게나 내뱉은 예결은 제 뺨을 감싸고 눈을 내리깔았다.

며칠 떨어져 있다가 가이딩을 받아서 발그레해진 혈색마저 예결의 연기에 이용당했다. 지금의 예결은 어느 모로 봐도 부끄러움과 당혹 사이에서 벌벌 떠는 모습이었다.

“열이 있는 건 아니겠지?”

“아뇨. 아니에요. 쉬면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온갖 모략과 거짓에 익숙한 제하량이 아니라 열 살 난 아이를 데려다놔도 지금 예결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그간 여독이 많이 쌓인 모양이에요. 먼저 쉬러 가도 괜찮을까요?”

하량은 사제를 위해 저녁을 준비하라 일렀다는 말을 삼켰다. 눈앞의 예결에게서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 그러렴.”

여러모로 충격을 받았을 테니 예결을 좀 쉬게 두면 원래의 사제로 돌아오리라고, 하량은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며칠 동안 하량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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