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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71화 (71/203)

71화. 할 땐 하는 에스퍼 (1)

무려 닷새에 이르도록 사제의 손 한 번 잡지 못했다.

‘우연인가?’

그럴 리가 없다. 예결은 조심스럽지만 무척 교묘하게 하량을 피했다.

호위 삼아 붙여준 삼랑을 방패로 내세우는 건 예삿일이었다. 혼자 있는 예결을 마주치면 그는 갑자기 상단 일을 물어봐야겠다며 진영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 예결과 데면데면한 편인 진영은 떨떠름한 낯을 숨기지 못했다. 주군의 눈치를 살핀 후에야 진영은 예결의 질문에 답을 내주곤 했다.

“저는 주군을 따라가야 하는데요?”

“잠시면 됩니다. 잠시만요.”

“그 잠시를 내주기엔 제가 너무 유능하고 바쁜 몸입니다.”

“스승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질문이 뭐라고 하셨죠?”

그 깜찍하기 짝이 없는 촌극에서 제하량은 은근슬쩍 배제된 채였다.

예결은 공들여 준비했을 질문을 진영에게 퍼붓고는 슬쩍 하량의 안색을 살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하량이 부드럽게 웃어주자 그의 사제는 화들짝 놀란 양 시선을 피했다.

있는 줄도 몰랐던 사냥 욕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올랐다. 저 작은 머리통을 쥐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량은 제 욕망이 온건한 방식으로 집행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의 판단력은 오래전에 변질된 까닭이다.

상단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하량은 그저 자리를 지킨 채 수하와 사제의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렸다.

“이제 좀 이해가 가네요. 저는 바로 가서 장부를 봐야겠어요.”

예결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기자 한 뼘 정도 벌어져 있던 장지문이 탁하고 닫혔다.

바람이 잘못 불어오기라도 한 모양새였으나 진영은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는 바람에 고개를 숙여 붓을 정돈했다.

‘여긴 바람 한 점 안 부는 건물 안인데 허공섭물을 쓰면 어쩌십니까!’

물론 속으로는 기겁한 상태였다.

하량은 그런 수하의 마음도 모르고 예결에게 슬쩍 다가섰다. 못 박힌 듯 선 자리에서 멈춘 예결은 하량의 손이 닿을 듯 가까워지자 눈을 질끈 감았다.

본인이 그러는 줄도 모르고 반사적으로 하량을 거부하고 있다는 태가 났다.

더 다가서기를 포기한 하량이 입을 열었다.

“결아.”

잘 직조된 비단만큼이나 부드러운 음성이 예결의 귓바퀴를 어루만졌다. 눈꺼풀을 한차례 파르르 떤 예결이 하량과 시선을 마주했다.

칼을 든 것도 아니고 발톱을 꺼낸 것도 아닌데 사냥당하기 직전의 초식동물처럼 어깨를 움츠린 예결의 모습에도 하량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설령 겁을 집어먹었다 한들, 예결은 그를 떠날 수 없었다. 곤륜이라는 울타리에서 걸어 나온 이상 누가 하량으로부터 예결을 지킬 수 있겠는가?

“상단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끼니를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이죠.”

싫다는 내색조차 하질 못하고 슬슬 피해 다니면서 대답은 잘도 한다. 어미에게 먹이 받아먹는 새끼 새의 붉은 목구멍을 떠올린 하량은 눈을 내리깔았다.

‘사제의 입 속도 붉었지.’

잔뜩 달아오른 채 입술만 뻐끔거리며 옅은 신음을 내뱉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하량은 능숙하게 부적절한 기억을 갈무리했다. 새삼 떠올린다고 하여 대단한 동요를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고수하고자 하는 관계에 별다른 도움이 되는 기억은 아니었다.

“네 몸이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가 회복되었다는 것도 잊으면 안 되고.”

예결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낮아진 목소리로 답했다.

“예.”

거의 기어들어 가는 음성이었다. 하량은 예결이 ‘위험한 상황’이라는 말에 유독 반응한 것을 가슴에 새겨 넣으며 다정하게 웃었다.

“저녁 식사나 함께 하자꾸나. 네가 좋아하는 오리로 탕을 끓여 내오라 일렀단다.”

“좋아요.”

예결은 어색하게 웃었다. 최선을 다한 편이긴 했지만 실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량은 사제가 초대를 수락하자 손을 뻗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 손이 자신에게 닿으리라 생각한 예결은 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하량의 손은 예결의 등 뒤에 닫혀 있던 문을 밀어젖혔다.

“그럼, 저녁에 보자꾸나.”

도망갈 길을 열어준 사내는 몇 번이고 흉내 냈던 다정을 얼굴에 걸쳤다.

“네!”

죄책감과 번민이 뒤섞인 표정을 한 예결은 대답만 제법 우렁차게 해놓고는 허둥지둥 방을 나섰다.

본인이 열어준 문 곁에 서서 사제가 떠나는 양을 지켜보던 하량은 조용히 자리로 돌아왔다.

“그래도 문 공자가 상단 일에 열심이군요.”

진영의 말에 하량이 흘깃 시선을 줬다. 진심으로 그의 사제를 칭찬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하량의 속내를 떠보려고 입을 연 티가 났다.

“주군이 문 공자에게 청해상단을 넘기실 때만 해도 이렇게 일머리가 좋은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곤륜에 계실 때부터 그런 재능을 보이셨던 겁니까?”

“글쎄.”

어디선가 부드러운 천을 꺼낸 하량은 창가에 놓아두었던 화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안에는 말라비틀어진 식물이 심어져 있었다.

“나는 그 애가 뭘 잘했는지 모른다.”

쓸데없이 귀한 화분에 담겨 있는 탓에 버석하게 말라 갈색이 되어버린 잎은 더욱 초라해 보였다. 진영의 호기심이 그 화분으로 옮아갔다.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라버렸으나 그 화초의 정체를 짐작한 진영의 낯이 서먹해졌다.

‘……그나저나, 주군을 담당하는 시비가 한둘이 아닐진대 말라비틀어진 식물을 치우지도 않았다고?’

문 공자가 아무렇게나 뽑아 건네줬던 화초가 이 방에 자리를 잡은 지 벌써 몇 주나 지났다.

하량은 부드러운 천으로 화분에 심겨 있는 식물의 잎을 조심조심 닦아냈다. 맹세컨대 진영은 주군이 저러는 모습을 처음 봤다.

‘아니지. 애초에 말라죽을 때까지 화분을 방치한 것부터가 이상한데.’

진영은 불현듯 찾아온 생각이 무서워 더는 깊이 파고들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눈을 내리깐 진영은 자연스레 자신의 안에 깃든 의구심을 입에 담았다.

“상단을 맡기시기에 무언가 깊은 뜻이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보다는,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합법적이고 온전한 물건을 보여주려 한 것이지.”

값어치가 클수록 좋았다. 사제가 자신이 떠안게 된 물건 때문에 혼비백산하길 원했다.

그래야 여유가 없어질 테니까.

“이십 년 동안 사제에게 내보일 번듯한 직업 하나 없으니, 참으로 부끄러워 내 그리했지.”

하량은 이십 년 전의 자신과 지금의 그가 전혀 다른 존재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다른 모두가, 심지어 그 자신조차 잊어버린 제하량이 예결의 안에는 선명하게 살아 있었다.

사제가 자신의 위로 덧그리는 동경의 시선을 받을 때면, 찰나 동안 과거가 덧입혀지고 숨을 쉬었다. 공들여 시늉하지 않아도 예결이 보고 있는 이십 년 전의 제하량이 웃고 대화를 하며 애틋함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멀쩡하다는 것이, 제대로 된 인간이라는 것이 어떤 감각인지 잊어버린 하량에게 이는 퍽 새롭고 중독적인 자극이 되었다.

“계산 따위 없는, 그저 욕망뿐인 결정이었다.”

하량의 고백은 시원시원했다. 설령 예결이 상단을 통째로 말아먹어도 두 손 놓은 채 바라보기만 했으리라.

복잡한 표정으로 하량을 살피던 진영이 입을 열었다.

“주군의 솔직함이 저를 부끄럽게 하는군요.”

“사제가 뛰어나다는 게 감언이설이라고 이실직고하는 건가?”

주군답지 않은 농담에 진영이 웃으며 답했다.

“충신을 원하셨을 텐데, 이런 간신이라 송구할 따름입니다.”

“듣기에 좋으나 취하지 않았으니 되었다.”

어차피 주군은 불길 위가 아닌 이상 쉬려 들지 않았다. 이를 잘 아는 진영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심경이 복잡해 보이십니다.”

“드디어 사제가 나를 피해 다니기 시작했으니 그럴 수밖에.”

마른 잎이 부서지지 않게끔 조심스레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진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설명할 이유가 따로 있다고 주장하는 건 불가능했다. 문 공자에게 큰 관심이 없는 진영이 보기에도 하량을 피하는 예결의 태도는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언젠가는 일이 이리될 줄 알았지. 그저…… 내게 조금의 유예가 더 남아 있다면 좋았을 것을.”

애당초 기대한 적도 없다는 투였다. 진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교룡왕 때문이라 생각하십니까?”

문예결은 이번 납치 사건을 계기로 교룡왕과 제하량 사이의 교분을 알게 되었다.

비록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나 정파 최고의 후기지수가 수적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교룡왕과 친밀한 사이라는 게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갔을지도 모른다.

“그사이 사제가 알게 된 새로운 정보는 교룡왕의 존재뿐이지 않나. 장강수로맹의 주인이 한 수 접어주게 된 대사형이라니…….”

상대하기 싫을 만도 하군.

하량은 뒷말을 삼켜버렸다. 굳이 제 입으로 내뱉어 무어 한단 말인가.

“연소소가 주군과의 만남을 적당히 포장해 쌍방 빚을 주고받은 관계라 하였으니 괜찮을 겁니다. 무림인들은 보은과 복수에 목숨을 거니까요.”

진영의 말에 하량은 고개를 내저었다.

“무림에서 은원이란 결국 명분 싸움을 위한 또 다른 핑계일 뿐이다. 사제는 아둔하지 않으니 이를 잘 알겠지.”

거대한 일에 엮인 은원일수록 더욱 그랬다. 평생을 무기만 다루며 살아온 무림인은 보은과 복수마저 칼처럼 다뤄 적을 찌르기 위한 도구로 만들었다.

“하지만 문 공자는 주군을 대사형이라 부르며 무척 따르지 않습니까? 분명 믿고 계실 겁니다. 다른 이유가 있겠지요.”

소 뒷발질에 쥐 잡는다고, 엉겁결에 진실을 입에 담았으면서도 석연찮은 기색이 진영의 낯에 머물렀다.

주군만 신경을 쓰려다 보니 또다시 문 공자를 비호하게 된 제 신세가 개탄스러웠다.

독 오른 족제비를 주군한테서 떼어놔야 하는데 자꾸 그의 목에 걸쳐주게 된다.

“글쎄.”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는지 하량의 손아귀 안에서 마른 잎사귀가 무참히 부서졌다.

“사제가 아는 그의 대사형은 절대 악인과 손을 잡거나 하지 않을 사람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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