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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72화 (72/203)

72화. 할 땐 하는 에스퍼 (2)

완전히 잘못 짚었으나 제하량이 가진 단서 내에서는 그 정도의 추론이 최선이었다.

청해에만 남아 있던 하량에게 흑귀와 예결이 보낸 하룻밤은 존재하지 않는 일이다.

까닭에 예결이 그 일 때문에 자신을 피해 다닐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사제를 완벽하게 속였다.

“모르겠습니다.”

진영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하량의 관점에 다소 회의적이었다.

문 공자는, 그는 독 오른 족제비처럼 발칙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사천당가가 성도에서 가지는 지배적인 위치를 이용해 불합리한 계약을 밀어붙인다고 대뜸 산적을 고용해 당가의 호위대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강탈한 물건을 암시장을 통해 유통하기로 마음먹고 흑귀와 거래를 텄다.

장물은 암시장을 통하는 게 맞긴 하지만 대체 어느 정파인이 산적과 손을 잡고 제 상단을 강탈한단 말인가?

당가 습격에 함께한 산적 역시 예결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산적이라도 그 많은 사람을 전부를 죽일 수 없다는, 그런 무른 생각 때문은 아니었을 거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인간은 애초에 당가를 습격한다는 계획을 세우지도 못한다.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게 아닌 이상 희생자는 필연적으로 발생하니까.

진영이 보기에 예결은 유연한 데다가 뻔뻔하고 또 자신이 내린 결단을 밀어붙이는 추진력까지 갖춘, 그야말로 온 사방으로 튀는 공이었다.

그런 인간이 대사형과 교룡왕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새삼 충격을 받거나 제하량을 멀리할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문 공자는 포용력이 큰 편이지 않습니까? 어쩌면 주군께서 걱정하시는 바와 사정이 아예 다를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량은 조금 쓸쓸한 시선으로 부서진 잎사귀를 내려다봤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몰골을 가만가만 바라보던 하량은 손을 털어냈다.

“치우라고 명할까요?”

진영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이미 말라비틀어진 화초가 저렇게 부서지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갈빗대만 남은 처량한 꼴이다.

그러나 하량은 고개를 내저었다.

“내버려 두거라.”

애당초 하량에게 주어진 선물조차 아니었다. 거의 내버리듯 수하에게 주어진 것을 강탈해왔다. 하나 그의 손에 들어온 이상 죽는다 한들 하량의 창가를 떠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이 탓에 내 곁에는 죽음만이 남는 모양이지.’

하량은 그린 듯 웃는 얼굴로 생각했다.

***

“맛있어요.”

예결은 본인이 멀쩡하고 건강하다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처럼 열심히 수저와 젓가락을 놀렸다.

물론 연기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가이드와 영 닿지 못하는 통에 심리적 허기가 컸던 것이다.

닷새. 무려 닷새에 걸쳐 제하량을 슬슬 피해 다녔다.

가이드가 눈앞에 있는데, 심지어 손도 잡아주고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가끔 뺨도 만져준다는데 그걸 슬슬 피해 다니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할 땐 해야지.’

예결은 나약해지려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이 계획에서 가장 큰 문제는 약발이 얼마나 들었는지 도통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대사형은 원체 차분한 편이었고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걸치고 있었기에 심적인 동요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오늘, 드디어 결실 비슷한 것을 맛봤다.

진영과 대화를 나누고 대사형을 피해 걸음을 옮겼을 때, 눈앞에서 문이 닫혀버리는 걸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기뻐서.

‘드디어 해냈다.’

대사형이 사뭇 강압적으로 저녁 약속을 잡고 문을 열어주는 순간, 예결은 눈물까지 찔끔 흘릴 뻔했다.

“향신료를 좀 다르게 쓴 건가요? 아니면 들어간 향채가 달라졌나.”

하량은 평소처럼 재잘재잘 떠드는 예결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지켜봤다.

“고기를 한 번 구웠다가 탕으로 끓여냈다고 하더구나. 네 마음에 들었다면 다음에도 같은 방식으로 요리해서 올리라 전해두마.”

“국물이 담백해서 더 좋은 거 같아요.”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릴 정도로 열심히 웃다가 하량과 시선이 마주치면 후다닥 그릇에 고개를 처박았다.

“이것도 먹어 보렴.”

하량이 그릇을 밀어주며 꺼낸 말에 예결이 반응했다.

“음식을 다 제게만 밀어주시면 어떡해요? 대사형도 드셔야죠.”

어쩌다 보니 음식에게 포위당하기라도 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사제가 잘 먹는 모습이 흡족해서 그만.”

제법 궁지에 몰렸으리라 예상한 하량은 뜻밖에도 느긋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대사형의 가면은 퍽 견고했다.

“진영에게 가르침을 자주 청하더구나.”

“제가 상단 일을 잘 모르는 바람에 자꾸 편법을 시도하다 보니 여러 문제가 일어난 것 같아서요.”

이쪽도 질 수는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예결은 선량한 사제의 흉내를 냈다.

“진영은 네가 상단 일을 퍽 잘 해내고 있다고 칭찬하던데…….”

“진영이요?”

순간 새어나가려 한 삐딱한 호기심을 갈무리한 예결이 기쁘다는 듯 답했다.

“다행이네요.”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다소 삐걱거리는 줄 알았는데, 그와 친해진 것 같아 내 안심이 되는구나.”

제하량의 앞에서도 진영을 긁곤 했던 예결은 어색하게 웃었다.

삼랑과 야율홍여, 그리고 위진영 중에서 대사형과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을 경계하는 건 에스퍼의 본능 같은 거였다.

“하지만 너무 친밀해지지는 말렴.”

“예……?”

“질투를 하게 되잖니.”

하량은 담백하게 웃었다.

“질투……라니요.”

자기가 들은 게 맞나 싶어서 예결은 몇 번이나 눈을 끔벅였다.

“이 우형은 참으로 졸렬한 사람인지라, 내 뒤를 쫓아다니던 사제가 다른 사내를 알게 되었다고 멀어질까 애면글면하게 되는구나.”

단어 선택이 교묘하고 의미심장했다.

현재 상황상 제하량은 사제가 ‘다른 사내를 알게’ 되었다는 걸 모른다.

예결이 돌아오기 전 삼랑에게 매달렸기 때문이다. 삼랑은 흑귀가 제하량이라는 걸 알기에 주군에게 보고를 올리지 않겠다고 순순히 약속했다. 예결의 예상대로였다.

사형제지간에 성생활 같은 걸 거론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일로 만들어 버리는 쪽이 편리하다.

“사제가 어찌…… 어찌 다른 이와 교분을 나누게 되었다고 하여 대사형을 뒤로하겠습니까?”

하량은 차마 사내를 알게 되었다는 말을 그대로 옮겨 쓰지 못하고 단어 선택을 바꾸는 예결을 가만히 지켜봤다.

“제게는.”

예결은 바싹 마르는 입술을 찻물로 축이고 답했다.

“제게는 언제나 대사형뿐입니다.”

가냘프긴 해도 결연함이 담긴 음성이었다.

하량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순하게 웃어 보였다.

“내 사제가 이토록 지극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시험하게 되는구나. 결이 네가 참으로 고생이 많다.”

“아닙니다.”

예결이 손사래를 쳤다.

그러는 동안에도 하량은 예결을 면밀히 관찰했다. 사제는 하량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몸을 움츠리거나 시선을 피하고 때로는 얼굴을 붉혔다.

소극적이라거나 소심해서가 아니다. 예결의 수줍음에는 명백히 다른 함의가 있었다.

‘그게 뭘까.’

사제를 상대할 때만 새어 나오는 흥미와 욕망이 하량을 자극했다. 그는 예결이 궁금했다.

언제까지고 그럴 것이다.

그의 호기심이 상대를 망칠 것을 알면서도 하량은 예결에게로 기우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저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곤륜으로 보낼 적에도 그랬고 어쩔 도리 없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다시 자신의 곁으로 데려올 때도 그랬다.

“차가 다 떨어졌구나.”

하량이 찻주전자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예결은 저 안에 찻물이 아직 남아 있다는 걸 알기에 의아해졌다.

그러나 대사형의 말이 곧 법도나 다름없다.

“아, 시비에게 가져오라 하겠습니다.”

“무얼 그리 번거로운 일을. 식사도 거의 끝마치지 않았느냐. 네 찻잔을 잠시 빌려주면 입술만 축이고 돌려주마.”

의외의 부탁이었다.

무림인이 아니고서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게 떨리는 손이 도자기 찻잔을 살짝 하량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한 모금 마시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느긋하게 예결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하량이 우아하게 그의 잔을 가져갔다. 하량은 찻잔 살짝 돌려 예결이 입술을 댔던 자리에 본인의 입술을 겹쳤다.

명백한 고의였다.

“향이 좋구나.”

눈을 살짝 내리깐 채로 대사형이 읊조린 말에 예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가 희게 질렸다가 다시 발그레해졌다.

순진한 에스퍼에겐 지나치게 자극적인 장면이었다.

‘대사형 미친 거 아니야……?’

어차피 같은 차를 마셨을 텐데 향이 좋다느니 같은 말을 덧붙일 이유는 또 무어란 말인가?

예결은 혼란스러워졌다. 애초에 자신 따위는 연애 대상 비슷한 걸로도 고려하지 않기에 이렇게 거침없는 건가 싶었다.

‘그날 밤엔 잘만 세워놓고.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야?’

억울함에 투덜거리는 예결에게 하량이 찻잔을 돌려주기 위해 팔을 뻗었다.

“고맙다.”

“그, 별일 아니었으니까요.”

두 손을 내민 예결의 목소리가 여리게 떨렸다.

맹세컨대 이다음에 일어난 일은 그가 의도한 게 아니었다.

찻잔을 사제의 손에 돌려준 하량은 빠져나가면서 그의 손등을 슬쩍 어루만졌다. 실수라면 실수라 변명할 수 있을 정도로 변변찮은 접촉이었다.

그러나 며칠 내내 굶주려 있던 에스퍼에게는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예결은 맞닿은 살갗에서 미약한 가이딩이 흘러들어오자 너무 놀란 나머지 손에서 힘을 빼 버렸다.

이제 막 예결의 손아귀로 넘어온 찻잔은 그대로 아래로 추락해 버렸다.

쨍그랑!

“아……!”

잡아챌 겨를조차 없이 산산조각이 난 찻잔의 모습에 예결의 두 눈이 커졌다.

“죄, 죄송해요. 제가. 제가 치울게요.”

선명한 당혹이 그의 낯에 스쳤다. 예결은 지체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S급 에스퍼라지만 강화계는 아니었기에 깨진 잔을 치우다 보면 자칫 손을 벨 수도 있었다. 평소였다면 그마저도 계산하고 움직였을 테지만 지금은 이렇게 허둥지둥하는 것은 오로지 당황 때문이었다.

무릎을 꿇고 손을 뻗으려는데 하량이 그를 강하게 붙들고 일으켰다.

예결은 드물게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시선으로 대사형을 올려다봤다.

“위험하지 않니.”

그를 가볍게 제압한 하량이 아이를 어르듯 말했다.

“시비를 불러 치우라고 할 테니 앉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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