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할 땐 하는 에스퍼 (4)
“만두입니까?”
삼랑의 질문에 예결이 고개를 팩 돌렸다. 소셋물을 가져다준 시비도 안 한 말을 굳이 하는 그녀가 얄미웠다.
“……얼음 좀.”
얼굴이 부은 건 예결도 예기치 못한 결과였다. 태어날 때 울어본 게 전부라 몰랐다.
‘대사형과 몸을 섞을 때도 울긴 울었는데. 그땐 가이딩을 받고 있어서 얼굴이 무사했나?’
“아니, 여기가 북해빙궁도 아니고 무슨 얼음이 있겠습니까?”
“없으면 어쩔 수 없지.”
“잠깐만 기다리셔요.”
투덜거리던 삼랑은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재주 좋게도 얼음을 가지고 나타났다.
참 도깨비방망이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예결은 얼음을 눈가에 가져다 댔다. 차가운 감촉에 정신도 함께 깨어나는 듯했다.
“시원하다.”
삼랑이 빙공을 익힌 거 같진 않았는데 이건 또 어디에서 얻은 걸까?
“저녁을 대체 얼마나 드셨길래 얼굴이 이렇게 부은 겁니까?”
예결이 엉엉 울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은 삼랑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 많이 먹긴 했지…….”
음식에 포위당했던 지난밤을 떠올리던 예결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대사형은?”
삼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새 예결이 하량을 티 나게 피해 다니더니 갑자기 찾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나 삼랑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제 석찬을 함께 했으니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겠지.’
워낙 헐렁헐렁한 삼랑은 남의 속사정까지 깊게 파고들지 않는 편이었다.
“잠시 출타하셨습니다.”
예결은 아쉬움에 내심 혀를 찼다.
‘첫술에 배부르라는 법은 없으니까.’
대사형은 사제가 수음하며 그의 이름을 좀 불렀다고 놀라 달아날 정도로 깜찍한 성품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를 집어삼키는 게 지금보다 덜 복잡했을 거다.
“언제쯤 돌아오실까?”
“늦은 밤에는 오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 공자께서 찾으셨다고 언질을 넣어둘까요?”
“아니.”
예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냐. 됐어.”
거듭 부정해 놓고도 예결은 흘깃 대사형의 거처 쪽에 시선을 준 후에 방에 틀어박혔다.
평소 즐기던 산책은커녕 끼니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니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마주친 삼랑의 눈이 점점 더 가늘어졌다.
정작 뱀뱀이와 놀며 시간을 보내는 예결은 평온 그 자체였다. 덫을 놓았으니 사냥감이 걸리길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할 리 있겠는가?
‘삼랑. 너만 믿는다.’
예결은 삼랑이 자신이 그를 찾았다는 말을 대사형에게 전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삼랑이 이제 교대하고 물러가겠다는 말을 전하고 채 이 다경(삼십 분)이 지나지 않아 문밖에 누군가가 접근했다.
인기척은 물론, 발소리도 나지 않았다.
기다리던 님의 방문을 확실한 예결은 황급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허리끈도 엉망. 옷깃도 좀 풀어 헤쳐져 있고.’
미리미리 준비하긴 했지만 이런 건 언제나 만전을 기해도 모자란다.
“결아.”
그 목소리에 새삼 밖에 선 사내가 제하량이라는 걸 확인한 예결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이럴 때가 아니라고 소리 나지 않게 뺨을 찰싹찰싹 때리니 옆에서 몸을 동그랗게 만 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뱀뱀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결이 입술로 검지를 쓱 가져가며 쉿, 하고 입술을 벙긋거리자 뱀뱀이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방울뱀처럼 소리가 나는 것도 아니면서.’
“결아. 혹시 벌써 잠들었느냐?”
귀여운 반려영물의 모습에 소리 없이 웃은 예결은 거듭 자신을 부르는 대사형의 목소리에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자, 잠시만요!”
일부러 우당탕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다급하게 문으로 달려갔다. 그 앞에 우뚝 멈춰 선 예결은 장지문 위로 제하량의 그림자가 비치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금방 열어드릴게요…….”
문을 열려고 든 손으로, 예결은 저도 모르게 하량의 그림자를 가만가만 쓸어보았다.
그래봤자 온기도, 촉각도, 그 무엇도 느낄 수 없는데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뛰었다. 스무 해 평생 꿈속에서만 만날 수 있던 사내가 이 문 너머에 있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대로 문을 열면 대사형이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닐까.’
예결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다.
“오셨어요?”
장지문을 살짝 밀어 고개를 빼꼼 내밀자 대사형이 보였다. 단출한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윤곽이 어슴푸레 반짝였다.
하량의 어깨에 달빛이 매달려 있었다.
“삼랑이 네가 나를 찾았다고 하더구나.”
“아.”
어딘지 모르게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분위기의 제하량이 건넨 말에 예결은 정신을 차렸다.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시선이 예결의 연기에 생생함을 더했다.
“오늘 하루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다가 알게 된 거란다. 삼랑은 주군인 내 명을 따를 수밖에 없으니 너무 야속하게 여기지 말렴.”
“알아요. 그저, 대사형께 심려를 끼쳐드린 거 같아서…….”
예결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게 부끄러웠어요.”
진짜 부끄러웠다.
여길 봐 달라고 형광색 응원봉도 흔들고 핸드폰에 전광판 앱까지 설치해서 관심을 끌더니 정작 눈이 마주치자마자 몸 둘 바를 모르고 시선을 피하는 꼴 아닌가.
“심려라.”
하량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내 너를 많이 걱정하였다.”
‘가이드 걱정시키는 거 너무 좋아하지 말랬는데.’
“잘못했어요.”
속이야 어떻든 예결은 얌전히 반성하는 사람처럼 말했다.
“밤이 너무 늦었-”
하량이 이만 가보겠다는 듯 입을 열자 예결은 그를 붙잡았다.
안 돼. 못 가.
“……여기 서 계시지 말고 어서 들어오세요.”
살갗이 아니라 옷소매를 잡아당긴 것에 불과한 손길이다. 그러나 하량은 우뚝 멈춰 선 채 예결을 가만히 눈에 담더니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그래. 그러자꾸나.”
저보다 훨씬 체격이 큰 사내가 순순히 따라오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양도 아니고 맹수를 우리에 몰아넣는 감각이 이럴까.
하량은 내부를 쓱 살폈다. 침상에 잠시 머무른 그의 시선이 어둑해졌다. 엉망으로 뒤엉킨 야금은 흡사 뱀이 벗어놓은 허물과도 같았다.
아마도 하량은 지난밤, 예결이 저 위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리고 있으리라.
사제의 사생활 따위는 전혀 모르는 척, 느릿느릿 걸음을 옮긴 하량이 창가의 교의에 걸터앉았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대사형이야말로 이 방의 주인 같았다.
예결은 그의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량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식사를 걸렀다지?”
이 방 안에 들어오긴커녕 그냥 돌아가려 해놓고는, 저게 궁금해 발걸음을 멈춘 모양이었다.
삼랑에게 흘려 넣은 제 일과가 착실한 덫 노릇을 하고 있음이 만족스러웠다.
“입맛이 조금 없었어요.”
“입맛이 없다고?”
하량의 낯이 심각해졌다.
“……고민이 있어서요.”
예결이 일부러 생략하고, 하량은 끝까지 모른 척할 맥락이 이 대화 속에 녹아 있었다.
“내가 해결해줄 수 없는 고민이니?”
긴긴밤, 예결이 달랠 길 없는 욕망에 저를 얼마나 간절히 찾았는지 기억하고 있을 사내가 던지는 질문은 참으로 잔인했다.
그러나 예결은 웃어버렸다.
제하량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대사형은 절대로 해결해주실 수 없는…… 또 그래서도 안 되는 고민이지요.”
고의로 누락했으나 결코 숨기지 않은 마음이 한순간 하량의 앞에서 피어났다가 저물었다.
“내가 손쓸 일이 없다니…… 실로 안타깝구나.”
지금 대사형은 더없는 진심만을 입에 담고 있었다.
“사제가 세 살배기 아이도 아닌데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대사형을 찾으며 엉엉 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찾아야지. 악착같이 매달리고, 세상이 떠내려갈 듯 울어야지.
“그냥, 계절이라도 타는 모양이에요. 금방 괜찮아질 테니 대사형께서는 너무 염려치 마셔요.”
“혼자 해결해볼 생각이더냐?”
하량이 물었다. 그의 질문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네.”
예결은 고집스레 답했다.
“그래…….”
하량은 눈을 내리깔았다. 달빛이 만들어낸 속눈썹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수심 가득한 음영을 만들어냈다.
“네 결심이 그러하다면 응원해 줘야겠지……. 하지만 왜 이다지도 쓸쓸할까.”
“쓸쓸하시다니요?”
예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린 사제가 훌쩍 자라난 것 같아 내 마음이 소란한 모양이야.”
“이미 예전에 다 컸는걸요.”
아끼는 건 좋지만 빈 둥지 증후군을 앓는 건 곤란하다. 예결은 대사형의 자식이 아니라 연인이 되고 싶었다.
“안다. 너는 예진즉에 어른이 되었겠지.”
하량이 쓸쓸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래도 나는 열일곱의 너와 아주 오랜 시간을 보냈단다.”
열일곱.
예결이 하량 대신 마두의 칼에 몸을 던지고 죽은 나이다.
“왜 잊어버리시지 않고.”
속삭이듯 질문을 던지면서도 예결은 번민했다.
하량이 제 희생을 잊지 않은 덕에 예결은 그의 품에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대사형이 삶이 아니라 죽음을 되새기며 어떤 마음이었을지 생각하면 괴로웠다.
“글쎄.”
예결의 질문에 하량이 속삭였다. 그의 시선은 예결의 얼굴에 닿아 있으면서도 동시에 아주 먼 곳을 헤매고 있었다.
“잘 모르겠구나.”
하량은 웃으며 그의 몸 위로 쏟아지던 더운 피를 생각했다.
뜨거웠다. 차라리 불에 데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그가 본 것 중 가장 환하게 타오르던 눈이 빛을 잃고,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남았다.
죽음은 너무도 손쉽게 그로부터 사제를 앗아갔다.
슬픔을 곱씹고 절망을 깨닫기도 전에 맨발로 달궈진 사막을 걸었다. 악명 높은 마교로 끌려가 고통받으며 동문을 한 명이라도 더 건사하려 애썼다.
사제에게 빚진 삶을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그렇게 치열했는데, 모든 노력은 하량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릴 뿐이었다. 그에겐 자신이 느낀 감정이 무언지 규명할 여유조차 없었다.
살아남기에 급급하던 시절을 보내고 죽기 위해 애걸하다가 마침내 체념했던 어느 날, 하량은 사제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오염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예결은 인간으로 죽었다.
제하량은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되어 죽을 기회조차 박탈당했는데.
언제고 곱씹어보리라 간직하고 있던 마음 위에 원망과 질시, 그리고 분노 따위가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진정 뒤틀리고 무너진 것은 그의 몸이나 다시는 사문으로 돌아가게 될 수 없어 마도의 주구로 전락한 신세 따위가 아니었다.
‘한때 마음 깊이 귀애했던 것을 영영 사랑할 수 없게 되어버린 정신이야말로 영락해버린 것을.’
하량은 저를 둘러싼 것들에 무뎌졌다. 비탄이나 절망, 고통 모두가 멀어지고 아늑한 어둠만이 남았다. 그가 걷는 길은 시산혈해가 가득했다.
[여기 있으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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