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할 땐 하는 에스퍼 (5)
검에 기댄 채 깜빡 정신을 잃었을 때, 그의 귀에 명랑한 음성이 닿았다.
[아 진짜, 내 말 안 들려요? 여기 있으면 안 된다니까?]
너절하기 짝이 없는 옷차림의 소년이 하량을 잡아끌었다.
“네가 또 왔구나.”
하량은 웃었다. 그냥, 웃음이 나왔다.
[미치겠네. 아니 이렇게 잘 차려입은 공자님이 여기에서 뭘 하는 거야.]
투덜거리며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는 손이 보였다.
감촉일랑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아이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 안다. 오늘도 짝귀와 독사가 오겠지?”
[어서. 어서…… 곧 짝귀랑 독사가 온단 말이에요. 그 형님들 눈에 걸리면 당신처럼 곱게 자란 도련님은, 응?]
주먹을 쥐고 허공에 감자를 먹이는 시늉을 하는 아이가 자꾸 어깨 너머를 바라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가고 싶지 않은데…….”
초조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하량은 홀린 듯 몸을 일으켰다. 그는 저 소년에게 너무도 약했다.
[이쪽, 이쪽으로……!]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육신의 무게조차 잊고 소년의 환영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소년은 날다람쥐처럼 날랜 몸놀림으로 요리조리 복잡한 뒷골목을 누볐다.
행여 놓치게 될까 두려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려도 소년과의 거리는 좁힐 수 없다. 느릿느릿 걸음을 옮긴다고 해서 멀어지는 거리는 아니라는 걸 하량을 안다. 두 발로 설 기운조차 없어 두 팔로 바닥을 기어서 쫓았을 때에도 소년은 아주 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반복된 술래잡기는 언제나 끝이 있었다.
잡힐 듯 말 듯, 멀고도 가까운 이를 쫓다 보면 어느새 하량은 저승의 문턱에서 삶의 경계에 도착하고 만다.
북적이는 번화가의 소음이 가득한 경계에서 그 아이는 작별 인사 같지도 않은 인사를 쏘아붙인다.
[다시는 여기 오지 마요. 이런 뒷골목은 당신처럼 곱게 자란 도련님이 올 만한 곳은 아니니까.]
소년의 환영은 타닥타닥하는 발소리와 함께 멀어져갔다.
숱한 경험 끝에 하량은 자신이 그 뒤를 아무리 쫓아봤자 상대를 만날 수 없음을 안다.
살아서는 따라가지 못하리라.
이 모든 건 옛 기억의 반복일 뿐이니까.
‘너는 정말…… 나를 놓아주지 않는구나.’
이토록 손쓸 도리 없이 엉망이 된 인간인데.
하량은 그렇게 또 살아갔다. 고단함도 지긋지긋함마저도 잊어버릴 정도로 계속.
그리고 그는 옛 사문을 찾아갔다가 곤륜산의 발치에서 사제를 찾았다.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고, 말을 걸면 돌아보고, 그리고 필사적으로 뛰거나 바닥을 기지 않아도 손쉽게 붙잡을 수 있는.
“……그래도 내 너를 한눈에 알아본 것은 기뻤단다.”
하량은 온화하게 웃었다.
“결이 너만은 잊지 않았다는 게, 내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게다.”
다정하게 손을 겹쳐오는 사내의 체온이 차갑고 묵직했다.
“소제가…… 소제가 잘못하였어요.”
“으응?”
하량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양 그를 바라봤다. 예결은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입술만 움직여 속삭였다.
“대사형이 저를 이토록 귀애하시는데……. 소제가 잠시 잊고 있었던 거지요.”
“네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대사형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왜 죄를 청하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 그는 괜찮다고 말한다.
어차피 ‘제하량’은 모르는 일이니까.
“소제가 잘하겠습니다.”
예결은 조심스럽게 하량의 손을 마주 잡으며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
눈 감은 채, 하량의 손이 아니라 그를 붙든 제 손등에 뺨을 기대고는 소곤소곤 속삭이며 눈을 감았다.
“다시는 대사형을 떠나지 않을게요.”
이게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바치는 맹세인지, 아니면 이십 년 전 제하량을 무참히 두고 떠난 사제가 하는 말인지 예결은 구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뭐 어떤가. 그는 다시 태어난 이래 평생을 경계에 어설프게 걸쳐진 채 살았는데.
중요한 건, 그가 이 약속을 지킬 거라는 사실이었다.
***
“문 공자.”
남궁운이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결은 주변을 뚤레뚤레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남궁운의 맞은편에 앉았다.
“흔쾌히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예결은 손사래를 쳤다.
“청해에서 요양 중이시라 들어서 찾아뵈려 했는데 몸소 사천까지 와 주지 않으셨습니까.”
“남궁 공자께서 제 목숨을 구해주신 은인 아닙니까.”
남궁운의 초대 때문에 사천에 온 건 아니었다.
그날 밤, 대사형에게 일종의 ‘선포’를 하고 왔으니 그다음 단계 작업을 위해 사천에 왔을 뿐이다. 남궁운의 초대는 그 과정에서 사용한 핑계였다.
‘은혜도 모르는 사람 소리를 들으면 대사형에게 누가 돼요!’
주먹을 쥐고 깜찍하게 허공에 휘두르며 한 주장에 제하량은 의외로 그를 순순히 보내줬다.
‘조심해서 다녀오렴.’
“은인이라니요. 그저 돌아오는 길에 동행했을 뿐입니다.”
딴생각하던 예결은 남궁운의 말에 새삼 기가 질려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오롯한 선의와 진심으로 가득한 눈이다.
겸양도 이 정도면 문제가 있었다.
‘가이드는 날개 없는 천사를 뜻하는 말인가?’
대사형도 그렇고, 눈앞의 남궁운도 가만 보면 사람이 아니라 다른 종족인 게 분명하다.
“남궁세가의 무인이 지키고 있으니 아무도 덤비지 못한 것이겠지요.”
예결은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내리깔았다.
“회복되는 대로 어찌 보상을 해드려야 할지 고민해 봤습니다만…… 부끄럽게도 남궁세가의 후계자의 격에 맞는 물건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보상이라니요.”
남궁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을 내저었다.
“저희는 친우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까?”
“예?”
예결이 어안이 벙벙한 낯으로 남궁운을 바라봤다.
솔직히 나중에 뱀뱀이를 보고서도 돌려달라는 말을 안 할 정도로 빚을 지워놓으려 하긴 했는데, 대뜸 친우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친우? 남궁세가 후계자가 나한테? 무림인도 아니고 양민인데?’
사심으로 가득했던 예결에게 우정 공격은 제대로 허를 찔렀다.
“……아, 제가 혼자 너무 앞서나간 모양이군요.”
남궁운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아니, 아뇨. 아닙니다.”
예결은 손을 내저었다.
“그저 일개 상인인 제가 남궁 공자의 친우가 될 수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질 못하여…….”
말꼬리를 흐리자 남궁운이 웃었다.
“이름으로 불러 보십시오.”
이름?
놀라운 진도에 예결은 입 안이 마르는 걸 느꼈다.
“운…… 공자?”
“공자는 떼고 이름만 불러야지요. 제 성은 운이 아니라 남궁이 아닙니까.”
남궁운의 음성에서 웃음기가 묻어났다.
“……운.”
한층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되었으나 남궁운은 만족하였는지 환하게 웃었다.
“예결이라 불러도 됩니까?”
“남궁, 운 마음대로 하시지요.”
“말도 놓으라 하고 싶은데…….”
남궁운이 예결을 바라봤다.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살래살래 내젓자 남궁운이 입맛을 다셨다.
“천천히 익숙해지기로 하지요.”
‘뭐야?’
방금 되게……. 사냥감을 싹싹 발라먹으려다가 멈춘 맹수 같지 않나?
예결은 고아한 학 같던 남궁운의 어디에 맹수가 있나 싶어 제 눈을 의심했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찻잔을 들어 올려 가린 남궁운이 화제를 돌렸다.
“금일 예결을 청한 것은 제가 어울려 지내는 후기지수를 소개해주기 위함입니다.”
“그, 후기지수라 하면 무림인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남궁운은 경쾌하게 답했다.
“어찌 그런 자리를.”
예결이 질문의 답을 채 얻기도 전에 방에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랜만입니다. 남궁 공자.”
“여어. 뇌전검룡. 그간 잘 지냈나?”
쏟아지는 인사를 자연스럽게 받아준 남궁운은 사람 좋은 얼굴로 그들 한 명 한 명을 예결에게 소개해주었다.
“여기, 이 사내는 청성의 청윤입니다. 그 옆에 앉은 이는 아미파의 소열이라 합니다.”
무뚝뚝한 인상의 사내는 포권을 했는데 쾌활한 낯의 여인이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저쪽은 홍여 같고 이쪽은 덜 게으른 삼랑 같네.’
“이쪽은 옥형문의 소문주인 백환입니다. 그리고 이 친구는-”
“사천당가의 소가주인 당세기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는 얼핏 당서악을 생각나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처진 눈매 하며 슬쩍 예결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심약한 티가 났다.
‘부엉이와 올빼미의 차이인가…….’
당서악이 원체 호인처럼 구는 편인 데다가 항상 웃고 있긴 했지만 비슷한 얼굴로 진짜 순둥하게 구는 이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예결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청해상단의 문예결입니다. 이렇게 무림의 젊은 영웅들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상인이라는 말에 약간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남궁 소가주가 누굴 소개해준다기에 기대했는데 청해상단주이실 줄이야.”
선뜻 입을 연 옥형문의 소문주 백환이 허허 웃었다. 사교적인 성격으로 보였다.
슬쩍 누락한 예결의 신분을 언급하며 분위기를 잡는 걸 보니 저쪽은 남궁운의 언질을 따로 받았지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남궁운이 옥형문 소속으로 가장해서 상행 호위에 합류했었지.’
백환과 남궁운과 연이 깊은 모양이다.
“어린 나이에 대단하시군요.”
“별말씀을요.”
겸양이 아니라 진짜 별말씀이다. 예결은 청해상단을 대사형 덕에 날로 먹었을 뿐이다.
“실례합니다. 술 들이겠습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데 요릿집의 시비가 등장했다. 여러 음식과 술을 착착 상 위에 까는데, 한순간에 잔칫날처럼 변모했다.
“자자. 소개는 이쯤 되었으니 일단 배부터 채울까요?”
반지르르한 요리의 모습에 냉큼 젓가락을 든 예결은 젓가락을 들고 오향장육을 한 점 집어먹었다.
입에서 살살 녹는 육질이며 마지막까지 입 안에 향긋하게 남는 향신료의 조화에 예결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려 오대세가와 구파일방 후기지수들이 검증한 맛집이라는 게 느껴졌다.
‘다음에 사형이랑 와야지.’
위치를 머릿속에 꼼꼼하게 새기며 예결은 청해에서 잘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제하량을 떠올렸다.
‘그럼 뭐, 흑귀 데리고 오는 거고.’
퐁! 하고 경쾌하게 뚜껑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자 남궁운이 조금 멋쩍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한 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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