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76화 (76/203)

76화. 할 땐 하는 에스퍼 (6)

어째 잔을 채울 때 손목을 꺾는 스냅이 예사롭지 않았다.

‘센터의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떠오르네…….’

센터에서 만난 에스퍼 중 한 명의 별명이 그랬다. 실제로 이중인격이라 그렇게 불린 건 아니었다.

가이드가 있을 때면 얌전히 사이다만 마시다가 그가 자리를 비우는 즉시 폭탄주의 달인으로 돌변하는 까닭에 붙은 별명이었다.

낯선 가이드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한 망나니 에스퍼의 향기를 애써 무시하며 예결은 잔을 받아 챙겼다.

“고맙습니다.”

“저도 부탁드립니다.”

운의 말에 예결은 흔쾌히 잔에 술을 따라 건네주었다.

다들 주거니 받거니 잔을 채워주니 분위기가 어느 정도 달아올랐다. 그때, 청성의 청윤이 자신에게 술잔을 내미는 소열에게 손을 내저었다.

“저는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아미의 제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술은 안 되지만 곡차는 괜찮지요.”

“곡차가 결국 술 아니오? 모름지기 도인이라면 수행을 방해하는 건 멀리해야 하오.”

“오, 우리 사부님은 곡차를 아주 즐기시는데.”

“……그.”

“우리 사부님은 장문인의 사매고 아미파의 장로. 아미제일검수 복마검. 전직 무림맹 원로.”

속사포처럼 사부의 스펙을 읊는 소열의 목소리는 ASMR 같았다.

졸지에 무림 대선배를 질타하는 꼴이 되어버린 청윤의 눈이 파들파들 떨렸다.

“으음. 어쩌면 우리 사부님은 도인이 아니라 불자라 곡차 정도는 괜찮은 건가? 소가주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결국 순진한 청성의 도사는 고장이 나버렸다.

“그, 제가. 아니……. 저도 곡차를 마시도록 하겠습니다.”

예결은 도와줘야 하나 싶어서 저쪽을 바라봤다. 그때 남궁운의 전음이 들렸다.

[괜찮습니다. 청윤은 남이 이렇게 핑계를 만들어줘야 마음 놓고 마실 수 있는 성격이거든요.]

아, 하고 예결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짠하고 잔을 부딪치자 남궁운의 눈이 조금 동그래지더니 잔을 비우는 게 보였다.

“나도. 나도.”

백환이 끼어들고, 당세기가 소심하게 그 뒤를 따랐다.

남궁운에게 초대받을 때만 해도 이런 자리가 될 줄 몰랐다. 그러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후기지수가 모인 것 치고는 생각 외로 소탈한 분위기에 예결은 마음이 편해졌다.

잔을 비운 예결이 웃으며 말했다.

“운이 소개해주시는 분들이라 그런지 다들 유쾌하시군요.”

“우, 운?”

당세기의 눈가가 당황으로 파르르 떨렸다. 개인 차이가 있긴 했으나 다들 조금씩 당황한 티가 났다. 이를테면 청성의 제자는 들고 있던 젓가락 중 하나를 놓쳤고 소열이 귀를 긁었다.

백환 혼자 눈을 휘며 웃는 게 보였다.

“우리 도도한 소가주께서 이름을 허락하는 이가 나오긴 하는군.”

“그러게요. 다들 뇌전검룡은 부인이 생겨도 존댓말을 쓰고 호칭까지 꼬박꼬박 붙일 거라고들 했는데.”

백환이 감탄하자 소열이 냉큼 받아서 놀려댔다.

“태어날 때도 ‘응애’ 하고 우는 게 아니라 ‘어머님, 소자 인사드립니다. 기체후일향만강하셨습니까?’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니까요.”

“그렇습니까? 저는 잘 모르겠던데요.”

예결은 남궁운이 의외로 철벽남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남궁세가라는 거대 단체를 이끌 예정이면서 너무 순진하면 걱정된다.

대사형 하나만으로도 벅찬 예결은 남궁운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아무튼. 회주가 누굴 소개해주고 싶다는 말에 냉큼 나와보길 잘했네요.”

회주.

예결은 그 단어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용봉지회의 회주가 남궁 공자로군요.”

저도 모르게 느낀 거리감에 호칭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의식하지 못한 채 한 일이었다.

“소, 소열 낭자가 놀려서 남궁 공자라 하신 거라면 그냥 이름을 부르셔도 됩니다. 그리고 예. 맞습니다. 여기 계신 뇌전검룡 남궁운 소협은 무림대회에서 우승하고 만장일치로 용봉지회의 회주 자리에 올랐습니다. 최연소지요.”

당세기가 붉어진 얼굴로 말을 와르르 내뱉었다. 누가 봐도 남궁운의 추종자 같았다.

“최연소라…….”

이런 것까지 대사형을 닮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남궁 공자는 정말 무림사에 전무후무한 기재일 겁니다. 분명 천하제일인이 될 테지요. 이런 이와 한 시대를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가슴 벅차는 일인지…….”

당세기가 주절주절 떠드는 말은 예결의 기분을 가라앉게 했다.

‘남궁운 전에 제하량이 있었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그를 기억하는 이가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이 예결을 무척 쓸쓸하게 만들었다.

“이토록 대단한 분이었다니. 제가 함부로 운의 이름을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결은 동요를 가리기 위해 그럴듯한 핑계를 지어 올렸다. 당세기가 배시시 웃었다.

“남궁 공자가 직접 허락해주지 않았습니까? 실로 부럽군요…….”

술 한 모금에 취하기라도 했는지 입매가 흐물흐물했다. 질투보다도 그저 부러움만 가득한 당세기를 보고 있자니 대체 어떻게 당서악과 같은 세가 출신인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말랑말랑한 인간이다.

아마도 그래서 남궁운이 이 자리에 당세기를 포함한 것이리라.

“그저 함께 사선을 넘다 보니 친밀함을 느낀 것 같습니다.”

“사선이라면 역시…….”

홀짝홀짝 잘도 마시던 청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끼어들었다.

“교룡선에 납치당한 사건 말입니까?”

“아. 저도 그 이야기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저희 문도가 돌아와서 하나같이 남궁 공자와 교룡왕이 맞부딪히던 순간이 어땠는지 묘사해 주던데…….”

“운이 불쾌하지 않다면 저도 제가 보고 들은 것을 좀 말해볼까요?”

예결은 잘나가는 재담꾼처럼 물었다.

“술맛을 돋우는 것에는 영웅담만 한 게 없죠.”

그렇게 예결의 혓바닥 위에서 백칠십 대 일로 싸운 뇌전검룡 남궁운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예결이 또래 인터넷 문화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인터넷 소설의 액기스만 뽑아 만든, MSG 팍팍 친 영웅담은 맛깔스럽기 그지없었다.

남궁운은 자꾸 그런 적 없다며 끼어들었으나 백환이 신나게 벌주를 먹였다.

점차 흥이 무르익으며 다들 술을 물 대신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 음주를 가장 저어하던 청성의 제자는 술병을 끌어안은 채 누워 있었다. 좀 편하게 해 주려고 술병을 앗아가도 애착 인형을 빼앗긴 아이처럼 도로 찾아갔다. 소열은 청윤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비파를 켜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입으로 비파 소리까지 흉내 내는데, 퍽 잘했다.

당세기는 아까부터 울다가 어린아이처럼 새근새근 잠들었고 백환은 벽에 대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보이지 않는 이에게 ‘그렇지.’라든가 ‘그놈이 나빴네.’ 하고 추임새를 넣어주고 있었다.

느낌상 연애 상담이라도 해주는 거 같았다.

‘개판이군.’

그러나 이 개판에서도 살아남은 자가 있었다.

예결은 여전히 반듯하게 앉아 있는 사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백면서생 같은 얼굴로 모두가 뻗은 후에도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만약 술 냄새만 아니라면 붓글씨 연습을 하는 중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십니까?”

“예. 무척이나.”

예결은 흥겨운 척 어깨를 살짝 앞뒤로 떨었다. 술에 취한 척이야 그리 어렵지도 않다.

“마지막엔 저희 둘이 남았군요.”

운의 말에 예결은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이렇게까지 마신 건 처음입니다. 다들 괜찮으실까요?”

“새 친우를 만나는 자리라 모두 자제력을 잃은 모양입니다.”

예결은 웃어버렸다.

자제력을 잃기는 무슨.

무림의 후기지수는 도산검림에서 살아가는 자들이다. 더러는 한 문파나 세가의 얼굴이기도 한 이들이 체면치레까지 잊고 이렇게까지 마실 수 있는 건 그들의 리더인 남궁운이 허락했기 때문이다.

예결이 보기에 남궁운은 상대를 억누르거나 강제로 제압하지 않아도 발휘되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상대의 빗장을 풀고 진심으로 따르게 만드는 것이다.

“말이 없으시군요. 무언가 생각하고 계십니까?”

“운이 왜 이런 자리를 만들었는지 궁금해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사람들이니 만나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글쎄요.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만.”

운은 중원의 저 반대편인 안휘에 본거지를 둔 남궁세가의 후계자다. 그런 이가 사천까지 와서 예결에게 친우 운운하며 만남의 장을 마련해줬다.

예결은 불과 얼마 전, 사천당가의 행사를 크게 망쳐놓았다. 정확히는 교룡왕이 저지른 짓이라곤 하나 화풀이하려면 보통 가장 약한 이에게로 화살이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남궁운은 그 사천당가의 후계자를 비롯한 여러 후기지수를 소개해 주었다.

‘당세기와 안면을 터 두면 사천당가가 내게 불이익을 주려고 할 때 막아주겠지. 여기 있는 여러 후기지수와도 안면을 튼 것도 내 안전에 도움이 될 거고.’

옥형문은 아미파의 속가이니 빼놓는다 치더라도, 청성파와 아미파, 그리고 사천당가 모두 사천에 뿌리를 박은 거대 세력이다. 아무리 사천당가의 위세가 대단하다 한들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청성과 아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를 도와주려 한 것이겠지요.”

남궁운은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예결이 무슨 짐작을 했는지까지 다 알아챘음에도 모르는 척하는 게 그의 그릇을 보여줬다.

“운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천은 넓다고 하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중 셋이나 되는 세력이 각축전을 벌이기엔 손바닥만 한 장소다.

그럼에도 그 후기지수들은 남궁운의 주도하에 화합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운은 퍽 심혈을 기울였으리라. 오늘 앉아 있는 이 술자리만 해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뭔가 문제가 생길 기미가 느껴질 때마다 분란을 억누르고 균형을 맞춰온 티가 났다.

‘현대에 태어났으면 외교관으로 딱 맞는데.’

하필 말보다 칼이 빠른 시대에 태어난 평화주의자 가이드를 바라보는 에스퍼의 시선에서 안타까움이 뚝뚝 흘러넘쳤다.

“제 얼굴에 너무 금칠을 하는군요.”

‘또 또 또 그런다.’

남궁운이 또 겸양의 말을 내뱉고 있었다.

잘 차려 놓은 상을 안 먹어도 될 정도로 쥐고 태어난 것이 많으니 저토록 여유로운 강자인 것을 이해했다. 그래도 제 밥그릇은 스스로 챙겨 먹는 법을 배워야 했다.

남은 언제까지고 강탈하기만 할 테니까.

“……너무 겸손하게 굴지 말아요.”

예결은 일부러 눈을 느리게 끔벅이며 속삭였다.

“가끔은 생색도 내고……. 응? 감사 인사도 받고.”

제 가이드는 아니지만, 이 정도는 해줘도 괜찮겠지.

“좋은 사람한테도…… 원동력은 필요하잖아요?”

예결은 배시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또.”

남궁운은 조금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예결은 뉘 집 아들인진 몰라도 대사형 다음으로 잘생겼다는 극찬을 머릿속으로만 삼킨 채 방을 나섰다.

이제는 사천에 온 원래 목적을 달성하러 갈 차례다.

“아니. 뱀봼아. 여기는 흑점이좒아!”

그렇게 한참 영업 중인 흑점 앞에 하나도 안 취한 주정뱅이와 반려영물이 나타났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7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