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77화 (77/203)

77화. 할 땐 하는 에스퍼 (7)

온전히 예결의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대한민국 공교육에서 영감을 받은 계략이다.

예결은 파한집의 한 구절을 흥얼거렸다.

‘홍엽(紅鬣)은 정이 있어 도리어 길을 아는데.’1)

바로 김유신과 천관녀 이야기다.

기생집에 드나들던 김유신은 모친의 훈계를 듣고 유흥가에 발을 끊었다. 하지만 김유신이 술에 취한 어느 날, 그의 애마는 주인을 늘 가던 천관녀에게로 데려간다.

김유신은 말의 목을 잘라버렸다. 대장부가 결심을 세웠는데 흔들리지 않기 위함이라고 전해진다.

‘일부러 훈련시켜도 그렇게 하기 힘들 텐데…….’

예결이 처음 그 일화를 들었을 때 느낀 감상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뱀뱀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그 일화에서 써먹을 건 있었다.

‘나는 절대로! 오려고 한 게 아니었지만! 어이쿠, 말이 와 버렸네?’

예결은 고삐를 쥔 옷소매 속에 숨어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리저리 줄을 잡아당긴 뱀뱀이를 끌어안고 배실배실 웃었다.

누가 보면 취해서 자기 손에 뺨을 비비는 취객으로 보일 것이다.

말이 혼자 흑점으로 방향을 튼 건 아니다. 여기엔 적뢰와 어울리면서 말 다루는 법을 익힌 뱀뱀이의 활약이 있었다.

“돌아가라.”

흑점의 문지기 둘이 창대를 교차하여 예결의 진입을 막았다.

“내가, 이 안에 계에신 분한테 잠시 할 말이. 정말 중요한 말이 있는데.”

초조한 척 아랫입술을 핥은 예결은 슬금슬금 말을 움직여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이제 문지기들은 예결의 목에 날붙이를 겨눴다. 다른 한 명은 말을 찌를 것처럼 창을 움직였다.

‘암. 암. 흑점은 위험한 물건을 많이 다루니까 아무리 주정뱅이라도 경계해야지.’

정작 그 위협의 대상이 된 예결은 흡족해하고 있었다. 그곳이 어디든 대사형이 있는 곳이라면 과잉 호위해도 부족함이 없다.

“이 주정뱅이가…….”

문지기가 예결의 웃음을 어찌 판단했는지 이를 으득 갈고 앞으로 성큼 움직였다. 창끝이 살가죽을 꿰뚫듯,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물러서!”

그때, 쨍한 음성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을린 뺨에 머리를 높게 올려묶은 그녀는 흑귀의 시비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예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삼랑. 나이스 어시스트!’

“바보 같긴. 이분은 지부장님의 손님이다.”

예결은 남궁운과 만날 예정이라며 삼랑에게 요릿집까지만 바래다 달라고 했지만 대사형에게 직접 명령받은 그녀가 돌아갔을 리가. 예결은 그녀의 몸속에 흐르는 생체전기가 멀어지는 척 돌아오는 걸 전부 느끼고 있었다.

“지부장님의?”

“내가 몇 번 드나들며 뵌 얼굴이니 틀림없다. 물러나.”

삼랑은 품을 뒤적거리더니 패를 하나 보여주었다. 문지기들은 말없이 물러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고 예결은 손을 팔랑팔랑 흔들면서 그사이를 지났다.

“다들 감사, 감사합니다.”

예결은 퍽 진심이었다. 삼랑은 한숨을 푹푹 쉬며 예결이 말에서 내리도록 도왔고 고삐를 흑점의 마구간지기에게 건넸다.

“옷소매 잘 갈무리하시구요. 옳지. 이쪽으로 가야 지부장님이 계세요.”

뱀뱀이가 흘러내리지 않았는지 확인하려 옷차림을 정리하는 척하면서 예결을 부축해준 삼랑이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시간 외 수당을 청구할 거라는 음산한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예결은 무시했다. 지금의 그는 주정뱅이 아닌가.

삼랑은 그를 흑귀가 쓰는 방으로 데려갔다.

‘삼랑 내비게이션 종료. 다음에도 재사용 의사 있음.’

마음속으로 별점 다섯 개짜리 후기를 휘갈기며 예결은 그녀가 떠미는 대로 침상 위에 엎어졌다.

“저기. 우리 뱀봼이… 뱀뱀이 밥 좀 챙겨주세요.”

바닥을 짚고 몸을 반만 일으킨 예결은 뱀뱀이를 꺼내 삼랑에게 떠넘겼다.

“차칸, 착한 애야. 아이 착해. 안 무니까. 물이랑, 고기랑. 응?”

“예에.”

삼랑이 떨떠름한 낯으로 뱀뱀이를 받아 들었다. 예결은 자신의 의무를 다한 집사답게 침상에 엎어졌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지만 어떻게 천년뇌각망을 모르는 사람한테 넘겨줍니까…….’

예결이 제 정체를 알아봤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그녀는 혀를 끌끌 찼다.

삼랑은 눈으로는 예결을 욕하면서도 숨 막히지 않게끔 얼굴의 각도를 고쳐주었다. 한숨을 쉰 삼랑은 뱀뱀이를 조심스레 품에 챙기고는 밖으로 나갔다.

예결로 말할 것 같으면 그녀가 돌아선 순간 얼굴을 다시 침상에 처박았다.

‘대사형 냄새.’

매일 정돈해서 그런지 아주 옅었지만, 희미하게 제하량의 체향이 느껴졌다. 마음의 안정을 부르는 향이었다.

정말 술에 취한 것처럼 헤헤거리던 예결은 인기척을 느끼고 잽싸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를 일으켜 세우는 손길에 부스스 고개를 든 예결은 눈을 끔벅였다.

“어……?”

흑귀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잭팟!’

예결은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삼랑이 여기로 곧장 안내해줄 때부터 반쯤 짐작하긴 했지만 정말로 대사형이었다.

사실 예결은 제하량이 사천에 와 있을 줄 몰랐다. 대사형은 예결이 청해를 떠나면 그때그때 어디로든 이동했기 때문이다. 행선지가 어디인지, 또 언제 돌아올지 같은 말은 미리 전해지는 법이 없다.

까닭에 자신이 취할 때마다 흑귀를 만나러 간다는 소식이 대사형에게 들어갈 때까지 일명 ‘홍엽 작전’을 계속할 작정이었다.

“술 깨는 약입니다. 드십시오.”

흑귀가 예결의 턱을 붙잡고 입 안에 차가운 것을 흘려보냈다. 일부러 제대로 마시지 않았기에 약이 입술 옆으로 흘러내렸으나 대사형은 아랑곳하지 않고 예결에게 약을 먹이는 것에 집중했다.

다 마신 후에 몇 번 헛기침하자 그는 손수 예결의 입가를 닦고 등을 쓸어주었다.

잠시 지친 듯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예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흑귀를 마주 봤다.

“여기가…… 이런.”

이제야 정신이 돌아와 부끄러운 이답게 마른세수하고는 몸을 일으키다가 휘청했다. 뒤로 넘어가려는 예결을 붙잡아준 건 바로 대사형이었다.

“천천히……. 아직 약 기운이 덜 돌았습니다.”

“죄송, 죄송합니다…….”

차마 얼굴도 마주 보지 못한 채 예결은 사과의 말을 입에 담았다. 흑귀는 그런 예결을 빤히 바라보고는 불쑥 말했다.

“제 시비 중 한 명이 외출하다가 돌아오는 길이어서 다행입니다. 듣기로는 문지기에게 큰일을 당하실 뻔했다지요?”

그는 짐짓 준엄하게 예결을 타일렀다.

“위험하실 뻔했습니다.”

전적으로 삼랑 프리패스를 생각하고 벌인 일이다. 그녀가 아니면 이 깊은 곳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테니까.

“제가……. 그만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전혀 몰랐습니다.”

“어떻게 또 흑점으로 오셨군요.”

예결은 얼굴을 붉혔다.

“무심코 안전한 곳으로 가려다가 그만.”

흑귀는 한숨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을 내뱉었다.

“흑점은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사천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고 사파와 마도의 종자들이 득실거리지요. 이곳에 온 첫날에도 느끼시지 않았습니까?”

하량의 시선은 예결을 꿰뚫어 볼 것처럼 날카로웠다.

“흐, 흑귀 님이 계시니까요.”

예결은 어깨를 움츠린 채로 더듬더듬 내뱉었다.

“흑귀 님이 계신 곳이라 제가 아, 안전하게 느꼈다면. 그것도 잘못인가요?”

“글쎄요.”

거친 음성에는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예결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술은 왜 이리 많이 드신 겁니까? 금일 만난 공자의 소행인지요?”

연이어 흑귀가 던진 질문은 비즈니스 관계에 캐묻기에는 다소 내밀했다. 게다가 교우관계까지 건드리는 사안이니 말이다.

“운, 그러니까 남궁 공자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제가 스스로의 고삐를 놓고 마셨거든요.”

“하면 어째서……?”

대사형의 질문에 예결은 어색하게 웃었다.

“고민이 생겼거든요.”

“고민이라. 제가 해결해드릴 수 있는 것입니까?”

청해에서 대사형과 보냈던 그 밤, 제하량이 물었던 것과 같은 질문이 흑귀의 입술에서 튀어나왔다.

“예.”

예결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를 바라보는 흑귀의 시선에 이채가 서렸다. 대사형에게는 도울 수도 없고 또 도와서도 안 된다고 한 문제의 해결책을 흑귀에게로 와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는 반쯤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흑귀 님을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새 입술이 긴장으로 바싹 말랐다. 예결은 이를 혀로 핥고 싶다는 충동을 애써 내리눌렀다.

“부탁이라. 말씀해 보시지요.”

낮아진 음성은 보다 위협적이었다. 예결은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한 말인 것처럼 내뱉었다.

“저를 안아주세요.”

어차피 다 탈 거면 불은 내가 질러야지.

예결은 이래 봬도 맘만 먹으면 할 땐 하는 에스퍼였다.

“안아달라고 하심은 단순히 포옹을 원하는 건 아닐 테고.”

대사형이 예결의 손목을 잡고 죽 끌어당겼다. 엉겁결에 그의 품에 안기게 된 예결은 당혹을 담아 흑귀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이를 드러낸 채 웃는 그의 낯은 제법 야만스러웠다.

“또 아래로 사내의 양물을 받고 싶으시다는 겁니까?”

제하량에게서는 볼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흉포함이었다. 예결은 홀린 듯 그를 눈에 담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예.”

그를 움켜쥔 흑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대사형이 그에게 준 것 중 가장 큰 고통이었다.

저를 옥죄는 악력에도 신음 한 번 내뱉지 않은 예결이 더듬더듬 내뱉었다.

“제, 제가……. 발정이 난 거 같아요.”

의외로 하량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고개를 푹 숙인 예결은 잠시 뜸을 들였다. 흑귀를 붙든 예결의 손에서 미미한 떨림이 전해졌다.

뜸을 들이던 예결은 대사형의 미간이 살짝 좁아진 후에야 속삭였다.

“그런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는 대상에게 음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바로 당신에게.

“매일 밤, 그분에게 안기는 꿈을 꿔요.”

가냘프게 떨리는 예결의 음성이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흑귀를 마주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그의 귀에 독을 마저 흘려 넣었다.

“다리를 벌리고 음탕하게 흐느끼며 더 깊이 들어와 달라고 애걸하다가……. 잠에서 깨어나면 전부 꿈이었다는 걸 깨닫고 절망하지요.”

예결의 음성에서 배어 나오는 자조를 읽어낸 대사형이 숨을 참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해 보려고 아등바등했지만…….”

그는 일부러 문장을 끝맺지 않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하량에게 예결이 수음에 실패한 그 밤을 떠올릴 여유를 주는 것이다.

“저는 이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분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저를 쓰고 싶다는 것이군요?”

“네.”

흑귀의 질문은 단도직입적이었다.

‘제발.’

예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순간을 공들여 준비했다.

그간 예결은 하량의 손에 이 이야기의 발단과 전개, 위기, 그리고 절정을 쥐여줬다.

사건의 발단은 예결이 미약에 중독돼 흑귀와 몸을 섞은 것이다.

전개는 쾌감을 알게 된 예결이 다른 누구도 아닌 대사형을 원하게 되어 그를 피해 다녔다는 것.

위기는 이를 깨달은 예결이 제 욕망을 애써 억누르려다가 실패했던 밤이다. 사제를 걱정하며 서성거리던 대사형은 그렇게 덫에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절정은 지금 이 순간이다. 하량을 원하는 마음을 꺾을 수 없었던 예결이 모종의 결심을 하고 흑귀에게 자신을 안아달라 청한 것.

‘결말은…….’

결말만은 예결의 몫이 아니다.

이 마지막 페이지는 대사형이 채워 넣게 될 것이다.

“‘그분’이라…….”

흑귀가 손을 뻗어 예결의 턱을 들어 올렸다. 예결은 기대 어린 시선을 숨기기 위해 눈을 내리깔았다.

“제게 몸을 열던 밤, 애처로이 울며 찾던 사내에게 구원을 원한 것이 아니었군요? 도와달라고……. 그래서 찾은 게 아니었어.”

혼잣말처럼 뇌까리는 하량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걸렸다.

“분명……. ‘대사형’이라고. 그리 말씀하셨지요?”

1) 이인로, 구인환 엮음, 『파한집』, 신원문화사, 2003,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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