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화대 (1)
예결은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
“문 공자가 말한, 욕망을 가져서는 안 되는 대상이 당신의 대사형입니까?”
흑귀의 질문에 담긴 건 신중함이나 진지함이 아니었다.
예결의 살과 뼈를 샅샅이 헤집어서라도 원하는 답을 얻고자 하는 집요한 호기심에 가까웠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예결은 입을 몇 번 벙긋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하량의 시선이 그의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머리카락이 짧아서 드러난 목덜미는 희기만 했다.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살갗이다.
“때론 침묵도 답이 되는 법이지요. 이거 참……. 어려운 길을 가시는군요.”
얼핏 진심 어린 걱정처럼 들리는 발언이었다.
“사파 나부랭이라도 사형제에게 욕정을 품지 않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저열하기 짝이 없는 웃음기가 옅게 묻어나왔다. 고아한 곤륜의 대제자가 아니라 정말 사파의 무인인 것처럼.
‘대신 윗대가리 킬각 날카롭게 재다가 틈이 보이면 해치워 버리잖아요.’
예결은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그 ‘윗대가리’가 주군이든 사부든, 약한 부분이 있으면 냅다 물어뜯고 배신해서 권세와 부귀를 챙기는 게 사파의 생리 아니던가.
“재미있군요…….”
하량은 조용해졌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그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예결은 바짝 마르는 속을 타이르며 기다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여태 뿌려 놓은 복선에 대사형이 반응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조바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뱃속이 아우성을 쳐도 지금은 기다려야 할 때다.
“왜 저에게 오신 겁니까?”
마침내 침묵을 깬 흑귀가 물었다. 단순히 떠보는 것 같진 않았다.
“남궁운 공자와 절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남궁운이 왜 나와?
“친우입니다.”
예결은 딱 잘라 답했다. 에스퍼가 대체로 발정 난 개새끼라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한 번에 가이드 한 명만 상대한다.
어떤 학자는 이게 오리의 각인 효과와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꽂히는 조건은 확인된 바 없다. 가장 처음 만난 가이드가 아니어도, 매칭률이 가장 높은 가이드가 아니어도 에스퍼는 단 한 명만 물고 늘어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운명이지.’
제 차례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가이드는 목줄이라고 냉소했던 예결은 뻔뻔하게 생각했다.
단호한 기색을 읽은 건지 대사형의 음성이 한층 은밀해졌다.
“그래도, 어디에서 굴러먹었을지 모르는 뒷골목 낭인에게 오는 것보다는 오대세가의 도련님이 훨씬 안전할 텐데요?”
“승낙의 여부를 떠나, 그는 안 됩니다.”
예결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지인과 몸을 섞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신다면 이쪽에서 잠자리 상대를 찾아 드리겠습니다. 꼭 몸 파는 이가 아니어도 성욕만 해소할 상대를 찾는 이가 더러 있으니까요.”
흑귀가 냉큼 받아들일 거라 예상하고 이 자리에 왔기에 예결은 생각보다 덤덤하게 대사형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과거가 깨끗하고 정중한 치로 골라드리지요.”
“소용없습니다.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지는 게 불가능하니까요.”
예결의 말에 흑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묘해졌다.
마치 풋내 나는 어린 것을 보는 듯했다.
“곱게 자란 도련님이라 순진하시군요.”
아이에게 천자문을 일러주는 스승처럼 차근차근 설명했다.
“마음을 나누지 않아도 몸만 섞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흑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서가에서 작은 함을 들고 돌아와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정 동하지 않는다면 저와 하셨을 때처럼 약을 이용해도 됩니다.”
열어보라는 턱짓에 예결은 그 함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제법 화려한 세공의 연죽이 들어 있었다.
“문 공자께서는 흑점의 중요한 고객이시니 원하신다면 가장 부작용이 적은 배합을 알려 드리지요.”
은근한 투로 말하는 하량은 진정 중원을 아우르는 거대 암시장의 간부다웠다. 누가 흑귀를 보며 곤륜의 제자 제하량을 연상하겠는가?
말없이 연죽을 내려다보던 예결은 쓰게 웃었다.
“……흑귀 님의 제안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게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 함은?”
하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사제에게 자신이 모르는 영역의 문제가 존재한다는 게 퍽 불쾌했다.
“저는…….”
예결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다른 사람과의 접촉에서 불안을 느낍니다. 특히 제가 예상치 못한 일방적인 접촉일수록 그 불안감이 더 커지지요.”
대사형의 눈치를 슬쩍 살폈으나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얼굴에 가득한 흉터 때문인지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예결은 지체하지 않고 다음 미끼를 던졌다.
“혹 제가 처음 흑점에 왔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거악왕산.”
하량이 나직하게 예결을 인질로 잡고 패악을 부리던 사파 무인의 이름을 내뱉었다.
이미 처리한 것들은 잊어버리는 편이지만, 사제를 건드린 놈이라 그런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적당히 잊은 척 시늉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그때 꼴사납게도 흑귀 님에게 매달렸었지요.”
기억하십니까? 하고 묻자 하량이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닿는 순간…… 공포가 아니라 안도가 느껴져서. 그래서 그랬습니다.”
살짝 내리깐 예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바스러질 듯 처연한 낯으로 예결이 속삭였다.
“대사형 외에 그런 사람은 흑귀 님이 처음입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흑귀가 대사형이니까.
“속이 역할 정도의 거부감이나 불안감, 공포 따위를 느끼지 않고 온전히 의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대사형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의지할 수 있다, 라.”
하량은 그 말을 곱씹듯 내뱉었다. 예결은 애절한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그래서 흑귀 님이어야 합니다.”
사내 맛을 알게 되어 어쩔 줄 모르는 척하는 건 어렵지 않다.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미치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그러나 대사형은 알아야 했다. 예결이 불쾌감을 느끼지 않고 살갗을 맞댈 수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제겐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까요.”
기사멸조의 허들은 생각보다 쉽게 뚫렸다.
하지만 그건 전부 대사형이 제하량과 흑귀를 손쉽게 나누어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결이라고 이를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손쉽게 단정 짓지 마십시오. 중원은 생각보다 넓은 곳입니다.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살갗을 비벼 보라고요?”
예결은 헛웃음을 흘렸다.
“……버티지 못할 겁니다. 저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니까요.”
체념의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 고통을.”
생각만으로도 고통스럽다는 듯, 예결은 몸을 옹송그렸다.
뚝뚝 끊어지는 단어의 사이사이로 예결이 말하지 않은 어떤 감정이 새어나갔다.
다시 반듯이 허리를 세운 그는 처음보다 창백해진 얼굴로 대사형을 마주 봤다.
“제 비밀을 공유한 사람이 더 늘어나는 걸 원치 않습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사내는 예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다른 건 몰라도 예결의 고통만은 외면하지 못한다.
마침내 흑귀가 입을 뗐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각은 무슨.
예결은 제하량에게 그럴 여유를 허락할 의사가 없었다.
“제게 그러셨잖아요.”
주먹을 꽉 움켜쥔 예결이 자리를 피하려는 흑귀의 등에 대고 말했다.
“대사형에게 끝까지 비밀로 하고 싶다면 흑점을 통해 의뢰하라고.”
하량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분명 이는 그가 했던 말이다.
사제가 어디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손아귀에 넣고자 했던 말이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 몰랐다.
모든 상황이 정교하게 맞물려 그의 앞으로 사제를 내몬다.
‘왜, 너는.’
가장 밝은 곳으로, 좋은 곳으로 떠밀어도 다시 그가 있는 곳으로 밀려온다.
하염없이 뭍으로 달려오는 파도처럼.
뭐가 잘못된 걸까.
“값은 어찌 치르시렵니까?”
하량은 입을 열었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고작 하난데, 이 모든 걸 합리화할 이유는 자꾸만 늘어간다.
“값이라 하심은……?”
훅 차오르던 희열조차 잊을 수밖에 없는 표현이었다.
“흑점은 그게 무엇이든, 마땅한 대가만 있다면 손님이 원하는 것을 대령하는 곳입니다.“
은근하게 낮아진 음성은 어느새 장사치의 것으로 변모해 있었다.
“특별한 물건을 원하신다면, 그에 걸맞은 성의를 보이셔야지요.”
물건이라.
그 단어를 혀 위에 굴려본 예결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예결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대사형이 답했다.
“문 공자의 비밀을 화대로 받겠습니다.”
오.
예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살 수 있냐는 말 같은 건 기대하지 않았지만 아예 몸을 파는 형태로 일을 끌어갈 줄은 몰랐다.
‘이 가이드……. 울리고 싶다.’
아니,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에스퍼 앞에서 화대 운운한단 말인가?
눈 시뻘겋게 뜨고 대사형 잡아먹을 궁리만 하는 예결에겐 지나치게 자극적인 언행이었다.
“이미 알고 계시던 비밀이 무슨 값어치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무려 청해상단주의 약점 아닙니까? 여태까지는 신의 때문에 비밀을 지켜 드렸지만, 이 거래를 승낙하시는 순간 상품으로 간주할 생각입니다.”
흑귀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상단에 해가 될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상단은 제 것이 아니니까요.”
예결은 힘없이 답했다.
애초에 그 청해상단이 대사형 것이다. 흑귀가 약점을 제멋대로 이용하거나 팔아치울 거라 은근히 암시하고 있지만 예결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대사형은 그저, 예결이 불안감에 이 거래를 물리길 원하는 것이다.
“장사치는 손해 보는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퍽 악당처럼 들리는 어조였다.
“어찌하시렵니까?”
예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 정도 망설여야 이 순간의 번민이 대사형에게 전해질지 셈하다가, 결국 그만두었다.
원하는 걸 모두 얻었는데 왜 이렇게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그럼. 거래를 받아주신 걸로 알겠습니다.”
더듬더듬 해야 할 말을 내뱉은 예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할 이유가 없는데, 다리가 약간 후들거렸다.
휘청휘청 위태로운 걸음을 옮긴 예결은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당겨 열었다. 복도의 빛이 그의 눈을 찔러왔다.
‘일단, 삼랑부터 찾아서…….’
그때였다. 어깨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흉터투성이의 손이 장지문을 눌러 닫았다. 예결은 어깨를 흠칫 굳혔다.
흑귀는 그 손으로 문을 닫아걸었다. 철컥, 하고 빗장을 지르는 소리가 제법 불길하게 들렸다. 다른 쪽 손은 예결을 뒤에서 끌어안듯 움직이더니 허리끈을 슬쩍 잡아당겨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저 손을 가져다 댄 것처럼 보이는데 매듭은 언제 풀렸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쇳소리처럼 거친 음성이 예결의 귓전을 타고 스몄다.
“상품은 확인해 보셔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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