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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79화 (79/203)

79화. 화대 (2)

섬뜩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예결은 좋은 의미에서 오싹해졌다.

어깨를 살짝 움츠린 예결은 달아나고 싶은 이처럼 보였다. 그의 손은 여전히 문고리를 놓고 있지 않았다.

‘후회하는 건가?’

가만히 사제를 관찰하던 하량의 눈이 어둑해졌다.

취기를 몰아내는 약을 주었다고 한들 흐려질 대로 흐려진 판단력으로 저지른 일이다. 상황에 압도되었던 예결이 새삼 물리고 싶어 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때, 허리끈을 붙잡은 흑귀의 손 위에 예결의 손이 겹쳤다.

승낙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사제를 돌려세운 하량은 그를 단숨에 안아 올렸다.

깜짝 놀라 대사형의 목에 손을 두른 예결은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제 몸을 침상 위에 내려놓을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아……!”

하량은 예결의 목덜미 위에 나직한 숨을 내뱉었다.

바투 가까워진 살 내음이 그의 머릿속을 쑤석거렸다.

‘달다.’

예결의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그의 체향이 하량을 잠식해 나갔다.

‘달아.’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방식은…….”

예결의 턱을 들어 올린 하량이 속삭였다.

“처음 했던 대로 하는 겁니다.”

처음 했던 대로?

예결이 무어라 묻기도 전에 대사형은 그에게서 앗아간 허리끈으로 눈을 가려버렸다.

“누구를 상상하셔도 좋습니다.”

머리 뒤로 비단을 단단히 매듭짓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문 공자의 마음속에 있는 ‘그분’을 불러도 무방합니다.”

시야가 캄캄해지는 동안 두 손을 모은 채 얌전히 기다린 예결이 물었다.

“왜 눈을 가리시는 거죠?”

이런 게 대사형의 취향이면 곤란하다.

맞춰주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안에 들어온 하량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상상의 여지를 남기기 위해서지요.”

능청스럽기 짝이 없는 너스레였으나 예결은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 거짓말 말고요.”

‘하다가 또 축골공이 풀려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까 봐 그러는 거 같은데.’

의표를 찌르는 예결의 말에 흑귀로부터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제가 무척, 정말 무척이나 보기 흉한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사형의 손가락이 예결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곱게 자란 도련님의 눈에는 다소 자극적일 겁니다.”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 내놓는 진실에는 새파란 날이 서 있었다.

비아냥으로 한 꺼풀 가리긴 했으나 그날이 향하는 방향은 타인이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

문득 예결은 대사형이 만들어낸 ‘흑귀’가 온전한 거짓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극적이긴 했어요.”

예결은 조용히 속삭였다.

“저는 어릴 적부터 뒷골목에서 자랐는데. 거기에서는 흉터가 많으면 다들 무서워했거든요.”

앞이 보이지 않아 더듬더듬 뻗은 손으로 대사형의 손에 깍지를 꼈다.

물러날 법도 했는데 흑귀는 얌전히 손을 내줬다. 예결의 말에 호기심이든 흥미든 느낀 게 분명했다.

“그래서……. 무서운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무서운 사람.”

하량의 음성이 잦아들었다.

“그래서 흑귀 님의 흉터를 처음 봤을 때, 무심코 탐이 났지요.”

한동안 침묵이 길었다.

그러나 예결은 전혀 겁나지 않았다.

‘흑귀가 뭐 어때서. 사천에서 지낼 때는 대사형보다 자주 보니까 정도 들던데.’

조금 왜소한 사내. 온몸은 흉터투성이에 말투는 밉살스럽기 짝이 없다. 암시장의 음험한 간부인 척 가장하고 있으면서 정작 예결이 손해 볼 짓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결이 죽는 줄 알고 그 한 몸 바쳐 살려줄 정도로 다정하기 짝이 없는 사내 아닌가.

“제가 너무 발칙한 소리를 했나요?”

힘을 풀고 스르륵 미끄러뜨린 예결의 손을 하량이 단단히 잡아 올렸다.

“발칙하면 어떻습니까.”

건조하기 짝이 없으나 웃음기 비슷한 것이 그의 음성에 맴돌았다.

“어차피 제 밤은 문 공자가 사들였고……. 오늘 나눈 이야기는 이 방을 벗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당겨진 손가락 끝에, 하량의 입술이 닿았다.

예결은 아랫배를 저릿하게 만드는 가이딩에 몸을 흠칫 떨었다.

‘아…….’

가이드가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하면 동조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가이딩의 질도 크게 달라진다고 했던가. 당시 예결은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다.

그만큼 희귀한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느낌이라는 말은 없었잖아!’

부드러운 박하 향의 파도가 밀려와 스미듯 속이 울렁거렸다. 멀미가 나는 것과 유사하지만 토할 것 같다기보다는 가슴이 부드럽게 쥐여 짜이는 느낌이다.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괴롭다.

‘아니야.’

예결은 괴롭다고 생각한 순간 이를 부정했다. 괴로운 게 아니다.

그보다는 켜켜이 쌓인 감정의 밀도가 한순간 들이닥쳤기에 구별할 수 없어서 뭉뚱그렸을 뿐이다.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감정 전이 현상에 예결은 하량이 받아들이는 세상을 어설프게나마 엿볼 수 있었다.

그에게 묻고 싶었다.

왜 기쁨과 슬픔, 안도와 공포 모두가 괴롭게만 느껴지는 건지.

“아흑……!”

술렁이는 감정을 추스를 겨를조차 없이 예결은 목이 물리는 감각에 신음했다. 정신이 완전히 다른 데에 가 있던 탓에 습격이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하량은 그가 입 맞춘 손을 끌어당겼다. 예결은 속절없이 끌려가 그에게 몸을 맡겼다. 흘러내린 옷소매 아래로 드러난 살갗에 대사형이 코끝을 가져다 대고 숨을 들이쉬었다.

“음…….”

나직한 한숨에 예결의 등허리가 오싹하게 젖어 들어갔다.

‘좋은 향이 나나?’

다른 건 몰라도 대사형에게서 좋은 향이 난다는 건 확실했다. 예전의 제하량에게서는 서느런 눈 냄새만 품고 있던 사내였는데, 지금의 그에게서는 호사스러운 향이 난다.

깊게 들이마시지 않으면 향이 있다는 걸 알 수 없을 정도로 은근한데, 또 그렇게 폐 깊숙이 받아들이면 잔뜩 뒤섞여 무슨 향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사향 같기도 했고 백단향이나 침향 같기도 했다.

여러 겹으로 켜켜이 쌓여서 그 정체가 모호한 향기는 비밀을 잔뜩 품은 지금의 대사형과 잘 어울렸다.

“읏.”

허리끈을 잃은 옷이 힘없이 흘러내렸다. 어깨가 노출되며 서늘한 공기를 접한 맨살이 흠칫 떨렸다.

“너무 긴장하지 마십시오. 먼젓번처럼 다정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예결은 눈이 가려져 있음에 감사했다. 만약 대사형과 시선이 마주쳤다면 의심의 눈초리를 숨기지 못했을 거다.

시작이야 부드럽고 다정했으나, 색사가 끝까지 온건했던 건 아니었다. 쾌락에 온몸이 녹아버린 바람에 거친 몸짓조차 쉬이 받아들였을 뿐이다.

나중에는 내공까지 불어넣어서 예결의 정신과 몸을 강제로 깨워 놓기까지 했다. 오로지 미약의 해독을 위해서라기엔 지나치게 집요한 정사였다.

“아흣! 거긴……!”

예결이 속으로 꽁알거리는 걸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가슴에서 야릇한 통증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튕긴 예결은 하량을 붙든 손에 힘을 줬다.

하량은 꽃물이 든 양 옅은 도홧빛의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양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 탓에 심장에 닿을 수 있을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차라리 통증에 가까운 감각이었으나 예결은 어설프게나마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가이딩 진짜…….’

예결은 코끝을 찡긋거렸다. 그게 무슨 신호라도 된 양 하량은 고개를 숙여 그의 가슴을 머금었다. 오돌토돌한 혀끝이 민감한 가슴에 닿자 예결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뒤로 뺐다.

앙살스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예결을 쉬이 보내줄 생각이 없는 하량은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밀어 침상 위로 쓰러뜨렸다. 예결은 두 팔을 늘어뜨린 채 허리 위에 올라탄 대사형이 가슴을 물어오는 감각을 견뎌야 했다.

“으응, 흣!”

가슴이 흠뻑 젖고 있었다. 하량의 입질은 간지럽다기엔 조금 더 아프고, 고통스럽다기엔 가볍기 짝이 없었다. 예결은 그리 의식해본 적 없는 유두가 호소하는 감각이 낯설었다.

“거, 거긴 이상, 한데. 아……!”

“문 공자께서 싫다고 하시니 여기는 이대로 둘까요? 옷태가 달라질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마침내 입을 뗀 흑귀가 다른 쪽 가슴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로 살짝 비틀며 물었다.

“어쩌면 매일 문 공자에게 붙어 다니는 호위가 의아해할지도 모르겠군요.”

“그, 아안, 안. 아흣! 안 되는데……!”

그다지 아프지도 않게 꼬집었으나 예민하기 짝이 없는 유두는 붉게 물들어 성을 냈다. 이 모습을 사제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하량은 거푸 채근했다.

“어찌 가슴이 한쪽만 솟아 있느냐고 하면 어찌 답하시렵니까?”

“그게.”

눈이 가려진 채 입을 몇 번 벙긋거린 예결이 도리질을 했다. 뭐라 말할지 떠올리려 해도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럴 필요성을 느껴야 변명하지.’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가슴 좀 빨린 게 어때서 변명씩이나 찾는단 말인가? 센터 인간에게 말했으면 염장 지르지 말라고 걷어차인다.

게다가 삼랑은 다 알고 시치미 뚝 뗀 채 모르는 척할 인간이다.

그러나 예결은 아직 물리지 않은 가슴을 쥔 채 앞으로 내밀었다.

“여, 여기도…….”

‘하지만 대사형이 이런 거 좋아하시는 거 같으니까.’

제 딴에는 기특한 결심이라며 자화자찬했다. 사실은 양 가슴 다 만져지고 싶었을 뿐이다.

“아래를 여는 동안 혼자 만져 보십시오.”

“……네?”

진심으로 당황한 음성이 예결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저와 내기를 하시는 겁니다. 여기가 다 열리고, 제 물건을 처박기 전까지…….”

하량의 손이 예결의 둔부를 단단하게 틀어쥐며 그 사이를 갈랐다.

앞이 보이질 않으니 그야말로 무방비 그 자체였던 예결은 헛숨을 들이켰다. 반사적으로 벗어나려 바르작거려도 몸이 완전히 제압당한 채였다.

대사형의 숨이 그의 입술을 스칠 듯 가까운 거리에 머물러 있었다.

“비슷한 크기로 만들어 놓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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