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화대 (6)
부스스 눈을 뜬 예결은 헛웃음을 흘렸다.
자고 일어나니 안대도 치워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씻겨 놓았는데 그의 손만은 여전히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손이 앞으로 모여 있는 걸 보니 새로 결박한 게 분명했다.
예결은 실뜨기하는 아이처럼 팔을 죔죔 움직여봤다. 잡아당기니 꽉 조여드는 게, 역시 정사 한중간에 예결을 속박하는 데 썼던 그 매듭이 분명했다.
‘대사형 재치 있네.’
예결은 감탄했다. 그는 지금 제 가이드의 모든 것에 관대했다.
무엇보다도 지금 몸 상태로는 도무지 기분이 나빠질 수 없을 것 같았다. 대사형이 저를 쉼 없이 몰아붙인 덕에 전신이 날아갈 듯 가볍다.
혹시나 싶어서 하량이 잔뜩 못살게 군 가슴도 확인했으나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예결은 조금 안심했다.
굳이 불편한 곳을 꼽자면 아랫배가 신경 쓰였다.
안에 든 것도 없는데 조금 더부룩했다. 아니, 허전한 건가?
따지자면 환상통에 가까운 감각이다. 갑자기 몸이 어색함을 호소하는 이유야 뻔했다.
제하량과 나눈 색사 때문이다.
몸이 닳아 없어져도 좋다고 생각하며 열락에 몸을 맡겼던 예결은 어느 순간 혼절했다. 의식이 멀어진 후에도 몸은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중간중간 정신이 돌아올 때면 예결은 내벽과 배 속을 치받는 하량의 움직임에 아랫배를 감싼 채 헐떡였다.
양물로 막힌 뒷구멍 안에 정액이 가득했다. 대사형은 성기를 뺄 겨를조차 없이 예결을 탐하고 있었다.
흘레붙을 때면 씨가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못하게 막는 번식기의 짐승 같았다.
쾌락과 괴로움을 도통 분간할 수 없을 때까지, 그렇게 쥐여 짜였다.
‘대사형을 설득하는 게 생각보다 순탄했다.’
밑그림을 열심히 그려놓긴 했지만 일이 잘 돌아갈 거라고 마냥 낙관하진 못했다.
가장 큰 변수가 바로 제하량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대사형은 사제와 몸을 섞는 일에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눈치였다. 이를 재차 확인한 예결은 잠시 이맛살을 찌푸렸다가 상념을 갈무리했다.
그래도 미약 때문에 안겼던 첫 번째와 달리, 이번에는 쌍방 합의하에 색사를 나눴다. 소기의 목적 이상의 성과도 얻었다.
유일하게 아쉬운 건 막바지에 정신을 잃었다는 거였다.
‘가이딩이 임계치를 넘어서 기절한 건가?’
센터에 거의 전설처럼 내려오는 가설이다. 예결이 알기론 아직 증명된 적은 없다.
그는 입맛을 다셨다.
‘이제 장가는 다 갔다.’
가이드를 날름 잡아먹어 놓고 예결이 다른 누구를 만나겠는가?
어쩔 도리 없이 대사형을 책임져야지.
‘근데 왜…… 내가 아니라 대사형이 기사멸조를 범하는 구도가 된 걸까.’
예결은 차마 대사형에게 안길 수 없어 흑귀와 몸을 섞는다는 설정인데, 대사형은 신분을 감춘 채 사제를 범하는 상황이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지만, 예결의 기분은 묘했다.
처음 목표를 정할 때만 해도 십 년 내로 성과를 내면 대단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십 년은 무슨, 반년이 가기도 전에 대사형과 몸을 섞는 사이가 되었다.
여기가 보수적인 중원무림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일어나셨군요.”
기다렸다는 듯 흑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그릇이 들려 있었다.
“가볍게 드실 만한 음식을 가져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조금 출출했던 예결은 반갑게 손을 내밀려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이걸 풀어달라고 해야 하는데.
슬쩍 눈치를 보는 티가 났을 텐데도 하량은 예결의 손목을 못 본 척 곁에 앉았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씻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요.”
의식 잃은 이를 씻기는 일은 퍽 힘들었을 텐데 하량은 생색 비슷한 것도 내지 않았다. 그는 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고소한 냄새가 예결의 비강을 자극했다.
“죽이군요.”
양이 제법 많았다.
대사형이 예결의 평소 식사량을 모를 리 없는데 이렇게 많이 가져온 걸 보면 다 먹이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직접 해왔습니다.”
심지어 직접 만들었다고?
‘절대 안 남긴다.’
예결은 결연히 마음먹었다.
“흑점에는 숙수가 없습니까?”
하량이 요리를 직접 해온 건 좋은데, 그가 자신 때문에 손에 물을 묻힌 건 또 탐탁지 않았다.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어찌 남에게 맡기겠습니까?”
“그래도, 그런.”
“너무 부담스러워하실 것 없습니다.”
대사형이 딱 잘라 말했다.
“직접 주방에 다녀온 것은 제가 타인이 한 음식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
그 정도의 힌트만으로도 예결은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했다.
“흑점은 귀한 물건이 거래되는 만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흑귀 님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많습니까?”
예결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혹 자신에게 청해상단을 넘겨준 빈자리를 메꾸려고 암시장처럼 위험한 곳에서 일하는 거면 어쩌나 싶었다.
눈치껏 그럴 리가 없다는 건 알지만, 아직은 물증 없는 심증이었기에 더 조바심이 났다.
“벌레의 수를 일일이 헤아려본 적은 없습니다.”
하량이 웃었다.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흑귀 특유의 살벌하기 짝이 없는 얼굴임에도 어쩐지 믿음이 갔다.
“자. 제 사정은 이만하면 되었고. 식사를 하셔야지요.”
하량이 수저를 들어 올렸다.
‘아무리 봐도, 먹여주려는 거 같지?’
예결은 눈을 도르륵 굴리다가 답했다.
“이걸 풀어 주시면 제가 먹겠습니다.”
손을 들어 올려 시위하니 하량이 답했다.
“저는 묶을 줄만 알지 푸는 법은 모릅니다.”
거짓말쟁이.
예결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
“하지만 이건 새로 매듭을 지은 거 같은데.”
“잘라냈지요.”
“이번에도 잘라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결의 요구에 흑귀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식사하신 후에 도와드리겠습니다.”
흑귀와 적당히 거리를 두려고 연신 사양했던 예결은 결국 얌전히 입을 벌리는 신세가 되었다.
‘대사형이 실수해도 절대 티 내지 말자.’
예결의 결심이 무색하게도 대사형의 시중은 깔끔했다.
죽 자체는 뜨거워 보였으나 입에 들어올 때면 항상 적당히 식어 있었다. 입에 든 것을 다 먹기 전에 미리 수저를 가져와 부담을 주지도 않았다. 행여 이에 수저가 부딪히면 어쩌나 하고 미리 걱정했던 게 우스울 지경이었다.
처음엔 어색하게 대사형의 시중을 받던 예결은 갈수록 적응해 답삭 답삭 잘도 받아먹었다. 온갖 응석을 다 부려도 받아줄 상대 앞에서는 좀 뻔뻔해지는 편이었다.
이상하게 간질간질했다. 다시 태어난 후 생긴 부모님도 예결을 이렇게 어화둥둥 보살펴주진 않았다.
센터를 오가며 예결을 살펴주는 어른이 늘어나긴 했으나 그는 언제나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붕 뜬 채였다.
예결의 안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마른 우물 위로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하염없이 물을 길어와도 매양 말라버리던 땅이 은근히 젖어 들고 있었다.
“이것만 먹으면 끝입니다.”
대사형의 말에 예결은 힐끔 그릇을 확인했다. 어느새 그 많던 죽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의 입만 쳐다보며 손을 움직이는 일이 번거로웠을 법도 한데 대사형은 끝까지 신중하게 제 일을 마무리했다.
예결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흡족함이 가득했다. 새가 모이 받아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 같았다.
“덕분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안온한 시간이 너무 빨리 끝난 기분이었다.
“평이 후하시군요.”
“정말로요.”
겸양의 말에 예결이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 흑귀 님의 손이 너무도 무인의 것이라 요리를 못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맛있어서 놀랐어요.”
편견을 가진 게 미안할 정도였다.
“저런.”
대사형의 한쪽 입꼬리가 느른히 올라갔다.
“그래서 직접 드시려고 한 겁니까? 맛이 이상할 거 같아서?”
짓궂은 질문이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예결은 손사래를 쳤다.
그러다가 양손을 한꺼번에 움직였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린 예결은 내심 혀를 찼다. 슬슬 묶여 있는 상태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쯤 되면 제 적응력과 무던한 신경 줄이 두려울 지경이다. 대사형이 이대로 안 풀어 주고 매일 밥을 먹여줘도 그러려니 할지도 모른다.
“믿어드리지요.”
대사형이 퍽 관대하게 선언했다. 예결은 배시시 웃었다.
흑귀와 나누는 대화는 제하량과 나누는 것과 사뭇 달랐다. 그리고 그 차이가 제법 각별하게 와닿아서 즐겁다.
하량은 어디에선가 날붙이를 가져와 손을 묶은 끈을 끊어주었다. 제법 부드러운 것이 값비싼 천 같았는데, 대사형은 도통 아끼는 법이 없었다.
곤륜의 제하량은 무척 검소한 사내였는데 말이다.
“다음에 사천에 오면.”
마침내 풀려난 손목을 매만지던 예결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때 또 흑귀 님을 찾아와도 되나요?”
가능하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확답을 받아 가고 싶었다. 내일의 대사형은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니까.
심지어 그가 손에 넣은 건 제하량이 아니라 그가 뒤집어쓴 흑귀라는 껍데기였다.
언제 폐기할지 모르는 거짓 신분으로 내건 약속이, 예결에게는 전부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제하량이라도 흑점의 간부씩이나 되는 신분은 희귀할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봐도 조바심은 완전히 사라지질 않았다.
“어느 장사치가 손님을 거절하겠습니까”
미운 말.
예결의 눈이 가늘어졌다.
원래도 흑귀의 표정을 알아보기 어렵긴 했으나 지금은 유독 덤덤했다.
“물론, 흑점의 흑귀는 아무나 만나지 않지만, 한번 거래를 튼 이상 끝까지 신의를 지킬 겁니다.”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좋아요.”
도무지 속내를 숨기지 못하고 밝아지는 얼굴에 하량은 저도 모르게 사제를 끌어당겼다.
흑귀에게 호응하기엔 지나치게 살갑게 느껴지는 접촉이었다. 예결이 어색함을 애써 삼키는데 흑귀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문 공자께서도 잊지 마십시오.”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가 당신의 비밀을 받아 갔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어떤 의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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