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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84화 (84/203)

84화. 상단주는 휴가 중 (1)

“왜 그렇게 쳐다봐?”

삼랑은 예결의 질문에 눈을 가늘게 떴다.

“몰라서 물으십니까?”

남궁세가 직계와 술 마시러 간다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술을 잘 마시자마자 난데없이 흑점으로 가버리다니. 심지어 그게 다가 아니었다. 취해서 천년뇌각망을 시비로 변장한 그녀에게 떠넘기곤 주군과 함께 방에 틀어박혀 버렸다.

그러고 이틀을 꼬박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사흘째에 모습을 드러낸 예결의 얼굴은 깐 달걀처럼 반질반질했다.

‘만약 흑귀가 주군의 또 다른 신분이 아니었다면…… 내 목은…….’

삼랑은 괜히 오싹한 기분에 옷깃을 매만졌다.

호위를 처음 맡게 되었을 때, 주군은 문 공자가 뭘 하든 내버려 두라고 했었다. 다만 이번의 사건으로 그 ‘뭘 하든’에 이런 종류의 일탈이 해당되지 않다는 게 분명해졌다.

아직 관련 명령이 내려오진 않았으나, 삼랑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제하량이 또다시 문예결을 품었기 때문이다.

삼랑은 주군의 선택을 감히 평가하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강호의 금기 따위는 삼랑에게 그리 중요치 않았다.

까닭에 하량이 처음 예결을 품었을 때, 놀랐을지언정 이를 문제라 여기진 않았다.

해독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이번엔 그런 핑계조차 없었다.

문예결은 취해서 흑점의 문턱을 넘었고,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흑귀를 침상으로 끌어들였다.

‘욕망 때문에 안기엔 너무 아끼는 대상이 아닌가.’

반평생을 정파에서 나고 자랐지만 남은 반평생은 마도의 주구로 살았다. 그건 제하량의 안에서 강호의 도의나 금기 따위 전부 무너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제하량은 그의 사제를 지독하게 아꼈다.

지금은 죽어버린 곤륜의 선대 장문인의 유언을 무시하고 금역에 발을 디딜 정도로.

파문당하며 이미 의미를 잃어버린 호칭을 한 번도 부정하지 않고, 사제라는 이유로 문예결의 품에 온갖 것을 안겨주었다.

하량은 청해에서만 보내는 시간만으로는 모자라, 흑귀라는 거죽까지 뒤집어쓰고 사천으로 왔다.

마도육가의 방심을 유도하려는 의도도 있다지만, 문예결이 아니었다면 다른 방식을 선택했으리라.

‘강호일통이 목적도 아닐진대……. 이토록 오래 십만대산을 떠나게 될 줄이야.’

삼랑은 예결의 반들반들한 낯을 꼼꼼히 살폈다. 천하태평한 삼랑조차 심란하게 만들어놓고, 그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뚝뚝 흘러넘쳤다.

“대체 흑점에서 뭘 하신 겁니까? 흑귀를 조심하라고 두 번, 세 번 말씀드렸는데 제 말은 다 귓등으로 들으신 게지요?”

‘설마, 문 공자가 주군이 흑귀라는 걸 간파한 건 아니겠지?’

불현듯 떠오른 의심에 삼랑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주군의 인피면구는 만지면 체온까지 느껴질 정도로 완벽했고 그의 축골공은 숨 쉬듯 자유롭게 펼쳐지는 경지에 이르렀다. 심지어 목소리를 바꾸는 약은 삼랑조차 쓰지 못하는 것이었다. 성대를 태우는 독이기 때문이다.

제하량처럼 고강한 경지의 고수가 아닌 이상 목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뜨린다. 해독약도 의미가 없어서 자체 치유력으로 회복해야 하는데, 문 공자가 이처럼 치밀한 가장을 꿰뚫어 볼 리가 없었다.

“인맥을 두루 넓히는 중이라 그래.”

예결은 뻔뻔하게 답했다.

“청해상단을 잘 이끌어나가야 할 거 아니야. 중원삼대상단의 반열에 올려놔야지.”

그 꿈,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려던 삼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역시 삼랑은 이해해 주는구나.”

“후…….”

그녀의 한숨에는 다양한 감정이 녹아 있었다. 예결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그래도 흑귀의 정체에 대해 한 마디도 안 흘리는 걸 보면 대사형이 수하 하나는 잘 뒀다 싶었다.

“앞으로 사천에 자주 오실 거지요?”

삼랑이 확인차 질문을 던졌다. 예결의 의사를 미리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렇게 됐어.”

“주군께는 뭐라 말씀드릴까요?”

삼랑의 부리부리한 눈빛에 예결은 냉큼 답했다.

“대사형에게는. 음, 해독된 독이 후유증을 남긴 탓에 흑귀의 도움을 받게 된 걸로 하자.”

죽을 다 먹여준 후, 제하량 본인이 친히 만들어준 설정이다.

날로 먹는 걸 좋아하는 예결은 그 핑계를 감사히 받아 챙겼다.

“주군이 사실을 알게 되면 기절하실 겁니다.”

제하량을 연약하게 묘사하는 데에는 거부감이 있긴 했으나 삼랑은 태연자약한 낯으로 이를 해냈다. 예결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삼랑만 믿어.”

뻔뻔하게 대꾸한 예결이 잠시 뜸을 들인 뒤에 덧붙였다.

“그리고 사실 거짓말도 아니야. 망할 독살 시도 때문에 후유증이 생기긴 했거든.”

슬그머니 시선을 마주치니 삼랑이 기가 찬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뛰다 못해 날아다니는 걸 바로 옆에서 지켜봤는데 후유증은 무슨 후유증이냐는 표정이었다.

“대사형의 사제로 남으려면……. 어쩔 수 없어.”

삼랑에게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가 따로 없을 것이다. 어차피 예결은 그녀를 상대로 해명하려는 게 아니다.

자신이 한 말을 반드시 전해 듣게 될 대사형을 노린 거지.

“어서 청해로 돌아가자. 대사형이 기다리시겠다.”

삼랑과의 대화를 마무리한 예결은 그녀를 채근했다. 한숨을 삼킨 그녀는 예결에게 말했다.

“장원에 돌아가면 저 찾지 마십쇼.”

“뭐 하려고?”

“문 공자의 다음 외출 전까지 끝내주는 휴가나 보내렵니다.”

“내가 속을 그렇게 많이 썩이나?”

“직업 특성상 저처럼 인내심 강한 사람도 드문데, 이러다가 화병이 날 것 같습니다.”

성격상 화병이 날 리가 없으면서 그걸 명분 삼는 삼랑을 보며 예결은 웃어버렸다.

“그렇게 해. 대사형께는 내가 말해둘게.”

가만 생각해보면, 삼랑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예결의 호위를 섰을 경우 진작 뒤로 넘어갔을 것 같긴 했다.

호위 대상자가 시야에서 이탈하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천의 암시장까지 들어가 그 간부와 몸을 섞질 않나, 심지어 고용주에게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숨겨달라며 부탁한다.

모르긴 몰라도 끝내주는 신경성 위경련을 얻게 되지 않았을까?

‘뭐, 삼랑은 앞으로도 부려 먹을 일이 많으니까 잘 대해줘야지.’

“진짜예요. 하루에 다섯 끼씩 먹고 끼니마다 술을 동이째로 비울 거예요. 또 온종일 무기고에서 안 나올 겁니다.”

“그래그래.”

“또-”

***

청해에 돌아오는 내내 예결은 제법 관대하게 삼랑의 휴가 계획을 들어줬다.

처음에는 심술 때문에 시작한 것 같은데, 말하다 보니 제법 흥이 났는지 잔뜩 들떠서 이런저런 말을 늘어놨다.

“천년뇌각망을 데려가서 훈련 좀 시켜도 됩니까?”

장원이 보일 즈음, 삼랑이 꺼낸 말에 예결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이대로 썩히기엔 너무 아까운 재능 아닙니까?”

삼랑이 안달복달하는 낯으로 말했다.

“저번에 산채를 싹 태워버렸을 때만 해도 그냥 아무렇게나 번개를 내리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벽조목을 만들 때 이런저런 시도에 맞춰 힘의 조절을 하는 걸 보고 괜히 영물이 아니라는 게 느껴지더군요. 그 능력을 조금만 더 다듬을 수 있다면 무척 도움이 될 겁니다.”

그거야…….

‘뱀뱀이는 마스코트고 힘은 내가 쓰니까 그렇지.’

사실을 말할 수 없기에 예결은 고개만 도리도리 내저었다.

삼랑은 제법 끈덕지게 예결을 졸랐다.

마치 희대의 천재를 만나서 ‘아버님! 이 아이를 제게 주시면 세계 최고의 인재로 키워 드리겠습니다!’ 하고 설득하는 한 분야의 거장을 보는 느낌이었다.

‘넘어가면 안 된다.’

뱀뱀이는 천재! 뱀뱀이는 짱! 이런 말을 온갖 버전으로 듣다 보니 솔깃한 것도 사실이지만 예결은 이성을 단단히 사수했다.

중원을 상대로 사기를 쳐야 하는데 벌써 밑천이 털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뭐라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렇지, 뱀뱀아? 하고 묻자 목에 걸쳐놨던 뱀뱀이가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외려 그 모습에 삼랑의 눈이 더욱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독하시군요.”

예결은 강적이었다. 감언이설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넘어오지 않는다.

“그럼, 잠입술 같은 걸 알려주는 건 어떻습니까?”

몇 번이나 거절당한 상황임에도 삼랑은 끈질기기 짝이 없었다.

“흠?”

삼랑의 제안에 예결은 처음으로 흥미를 보였다.

“말도 알아듣는 데다가 어지간한 건물에는 다 잠입할 수 있는 특수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예결이 고개를 끄덕이자 삼랑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진삼 행수 때처럼 항상 방이 비어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요. 몸을 잘 숨기는 법을 천년뇌각망, 아니. 뱀뱀이에게 알려주면 필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결과적으로 뱀뱀이의 안전을 위한 훈련이라는 것에서 예결의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예결은 뱀뱀이의 앙증맞은 뿔 위를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그 정도는 나쁘지 않을 거 같네.”

마침내 허락을 받아낸 삼랑은 신났는지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야호!”

본인 명의의 강남 빌딩 한 채를 봐도 저렇게 사랑스럽게 보긴 어려울 것 같았다.

“대체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예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뱀뱀이를 볼 때마다 탐욕스럽게 입맛을 다시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잠입을 할 줄 아는 영물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업계의 판도가 바뀔 수 있으니 그러지요! 심지어 제가 교육시킬 수도 있으니 한계도 파악할 수 있지요. 다른 놈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저를 무척 부러워할 겁니다.”

호호 배 아파 죽으라지, 하고 덧붙이는 삼랑에게서 은은한 광기가 느껴졌다.

“업계? 다른 놈들?”

예결은 그녀의 말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그러나 삼랑은 신이 나서 못 들은 건지 아니면 아차 싶어서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잽싸게 말을 달려 장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호위가 자신을 앞질러 나가는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었다. 예결은 혀를 차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방심한 건지, 나를 너무 믿는 건지.’

겪어볼수록 헐렁헐렁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절묘한 순간마다 쏙쏙 빠져나가는 걸 보면 빈틈이 없다.

‘대사형 수하는 다 흥미롭다니까.’

예결의 눈매가 예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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