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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85화 (85/203)

85화. 상단주는 휴가 중 (2)

청해를 떠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는데 어쩐지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오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장 큰 과제를 하나 해결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말을 데려가겠다는 하인도 사양하고 직접 마구간까지 걸음을 옮긴 예결은 야율홍여를 마주쳤다.

“오랜만입니다.”

적뢰의 붉은 갈기를 빗겨주고 있던 사내는 예결의 등장에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문 공자를 뵙습니다.”

홍여는 처음 만날 때부터 예결에게 예의를 차렸다. 만날 때마다 뭔가 탐탁지 않다는 양 예결을 경계하는 진영이나 말 안 듣는 남동생 취급하듯 구는 삼랑과는 결이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기사 같다고 해야 하나.’

말수가 적고 우직하다.

예결은 적뢰를 만나 신이 나서 목을 길게 뺀 뱀뱀이를 홍여에게 건네줬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뱀뱀이를 받아서 적뢰의 머리 위에 올렸다.

홍여는 두 영물이 즐거이 소통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다시피 했으나 예결은 그가 무척 흐뭇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둘이 사이가 좋네요.”

“적뢰는 자신과 비슷한 존재를 접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니까요.”

“처음이라는 건…….”

“적뢰는 저희 부족이 키우던 말 사이에서 돌연 탄생한 준영물입니다. 새끼였을 때부터 영특했던 건 물론이고, 성체가 되기 전부터 무리 전체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되었을 정도지요.”

갑자기 홍여의 말이 많아졌다. 아마도 적뢰가 그에게 가족만큼이나 큰 존재인 모양이었다.

“그간 고독했을 겁니다. 만약 뱀뱀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저는 적뢰가 친구를 필요로 한다는 것도 몰랐겠지요.”

한참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키가 큰 데다가 단단한 거암처럼 보이는 무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뱀뱀이’라는 이름은 참 깜찍하게 들렸다.

“사천에 날 데려다준 후에 한동안 떠나 있을 거라 들었는데, 이번에는 금방 돌아온 모양이네요.”

“주군의 호출이 있어서 두어 시진 전에 청해에 도착했습니다.”

‘대사형이 어디 멀리 가시려나.’

고작 며칠 전까지 사천에서 제하량을 독점해 놓고도 예결은 아쉬워졌다.

“대사형은 장원에 계시나요?”

“예.”

“그럼 삼랑이 데리러 올 때까지 뱀뱀이를 부탁드릴게요.”

“삼랑에게 넘겨줘도 괜찮습니까?”

홍여가 처음으로 우려 섞인 기색을 드러냈다.

“예전부터 영물의 능력에 관심을 많이 보였습니다.”

예결은 저 무뚝뚝한 남자에게서 걱정을 끌어낸 삼랑의 집착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혹시 적뢰도 당한 적이 있는 건가요?”

“몇 번 발굽에 차이기 일보 직전까지 갔는데 포기하지 않더군요.”

대단한 근성이었다. 예결은 감탄했다.

“정말 꾸준하구나…….”

“악의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최대한 많은 수단을 확보하는 게 그녀의 삶의 방식일 뿐입니다.”

나름 동료라고 감싸주는 홍여의 모습에서 의리가 느껴졌다.

“삼랑은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저는 그녀가 제 호위를 맡아줘서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진영이나 홍여보다 낫다. 만약 진영이 호위로 붙었다면 그는 시종 예결을 감시했을 거고 홍여라면 삼랑에게 하는 것처럼 이번만 눈감아 달라고 조르는 건 꿈도 꾸지 못했으리라.

‘삼랑 정도의 유연함이 있어야 이중 스파이로 써먹지. 홍여는 딱 봐도 절대 타협해줄 인간이 아니잖아.’

예결은 다시 한번 대사형의 인선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럼, 뱀뱀아. 나 다녀올 테니까 삼랑이 괴롭히면 찌릿찌릿 해버려. 알았지?”

‘찌릿찌릿’이 뭔지도 모르면서 금빛 뱀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하여간 대답은 잘한다니까.”

흡족함이 담긴 투로 중얼거린 예결은 홍여에게 인사를 건넨 뒤 마구간을 빠져나왔다.

청해의 공기는 유독 맑았다. 향신료가 공기 중에서 느껴지는 듯한 사천과는 다르다.

어쩌면 저 멀리 보이는 곤륜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딘지 모르게 그립지만 멀기만 한 눈의 향기.

‘한평생 그리워할 줄 알았는데.’

저 향을 잊지 못해 예결은 항상 외로웠다. 지도상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신화나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곤륜산은 아득히 멀기만 했다.

예결이 찾는 것은 그의 현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전생의 문예결은 친부모가 생기면 막연히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식의 외로움을 걱정하기보다는 그의 광증을 두려워했다.

‘괴물로 태어났으니, 뭐.’

통계상 미성년 에스퍼의 손에 상해를 입는 집단은 그들의 가족이다. 그러니 예결이 생각하기에 그들의 공포는 온당했다.

다만 예결조차 돌보는 법을 몰라서 내버려 둔 외로움은 그의 안에 고여들었다.

흘러넘치는 법도 모르는지 하염없이, 또 끝없이.

“결아.”

현실에서 헤어나온 예결은 그의 꿈을 마주했다.

“대사형.”

부름이 들리는 방향으로 돌아선 예결은 하량을 향해 달려갔다. 마지막 순간 크게 휘청하기에 하량은 저도 모르게 팔을 내밀었다. 예결은 기다렸다는 듯 덥석 안기며 그의 품에 매달려 속삭였다.

“사제가 돌아왔습니다.”

말갛게 웃는 예결의 얼굴은 만년설 위에 반짝이는 햇빛 같았다.

“어서 오렴.”

홀린 듯 답한 하량은 자유로운 손으로 예결의 뺨 위를 어루만졌다.

대사형은 왜 피했느냐고 묻지 않고 돌아온 탕아를 받아주었다.

“사천에는 잘 다녀온 것 같구나. 삼랑은 어딜 가고 혼자 있느냐?”

예결은 빈 손목을 보여주며 답했다.

“뱀뱀이 훈련시키고 싶다기에 보내줬어요.”

“어디서든 호위는 떼어놓지 말아야지.”

“어차피 대사형이 여기 있으시잖아요.”

또박또박 답하는 예결의 눈에는 깊은 신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대사형이 있는 곳에서 누가 제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겠어요?”

“……이 우형을 너무 믿는구나.”

하량은 탐탁지 않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면서도 예결의 손을 붙잡고 이끌었다.

“저 멀리 곤륜을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예결은 멈칫했다. 하필 들킨 장면이 미묘했다.

“곤륜이 그립더냐?”

아득히 먼 푸른 산을 향해, 저 높은 봉우리를 감싼 구름을 올려다보던 예결의 시선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애수에 젖어 있었다.

“아뇨. 그보다는.”

예결은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아서요.”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하량의 반문에 예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서는 이루지 못할 일이라고 여겼으니까요. 먼발치에서나마 곤륜을 바라보는 것도, 대사형을 만나게 된 것도…….”

예결에게서 희미하게 묻어나곤 하던 불안이 명징한 형태를 취했다.

“지금 꿈을 거닐고 있는 게 아닐까 하여 소제는 두렵습니다.”

문득 바라본 하량의 표정이 모호했다. 어찌 보면 걱정 같기도 했으나 또 달리 보면 웃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만약 꿈이라면.”

하량이 속삭였다.

“그래서 깨어나면 어찌할 테냐?”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간다면?

‘돌아가긴 무슨. 죽었겠지.’

예결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봉인을 강제로 뜯어서 사용한 힘으로 습격자들을 숯덩이로 만들었다. 대신, 그의 몸은 폭주를 일으켰다.

매칭 가이드도 없으니 깨어나봤자 제압당한 뒤 에스퍼 전용 방공호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며 잘 듣지도 않는 진통제나 달라고 애걸하는 신세가 될 거다.

설령 살아날 방도가 있다고 해도, 도무지 살고 싶지 않았다.

예결은 하량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또 잠들면, 다시 꿈을 꿀 수 있겠지요.”

예결은 부러 눈을 감았다.

“운이 좋아 대사형을 찾는다면, 그땐 다시 깨어나지 않을래요.”

“그래.”

하량은 예결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네가 그리 말해주어 다행이구나.”

분위기는 안온하기 짝이 없었다.

하량에게서 밀려 들어오는 가이딩이 퍽 나긋나긋했다. 예결은 이러다가 깜빡 잠들어 버리겠다 싶어서 대사형을 붙들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대사형이 자장가를 불러주세요.”

“자장가?”

하량이 어색한 투로 되물었다. 이런 요구를 받아보는 건 생전 처음이었다.

“네.”

하량을 쥔 예결의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정말 이게 꿈이고,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에 악몽을 꿀 것 같았다. 만약 대사형이 없는 꿈이라도 꾼다면 이 장원의 지붕 두어 개 정도는 해 먹을지도 모른다.

‘뱀뱀이도 삼랑에게 보내놨는데.’

아무리 단단하기 짝이 없는 에스퍼라도 제 가이드 앞에서 속살을 내보일 수밖에 없다는 게 이런 뜻이 아닐까 싶었다.

“그럼 무척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량이 저한테 매달려오는 예결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는 자장가가…… 하나뿐인데. 잘 기억나지 않는구나.”

대사형이 잘 못 하는 것도 있구나 싶어서 예결은 낮게 웃었다.

“그냥 흥얼거리기만 해도 좋아요.”

“그 정도라면야.”

하량은 예결의 거처까지 그를 데려다주었다. 가볍게 씻고 나온 예결은 침상에 드러누우려다가 하량에게 붙들렸다.

“머리카락은 말려야지.”

“괜찮아요.”

“그러다가 감모라도 들면 어쩌려고.”

예결은 눈을 도르륵 굴렸다. 여기가 무림이라 그렇지 그는 S급 에스퍼였다. 그것도 무려 공격계.

게다가 매칭 가이드까지 만났는데 어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살아남겠는가?

이 방에서 감기에 걸릴 수 있는 사람은 제하량뿐이었다.

“졸린데.”

예결의 나직한 투덜거림에 하량은 웃어버렸다.

“내가 하마.”

어디에선가 영견을 가져온 그는 손수 사제의 머리를 말려주었다. 미용실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전문가의 손길보다 투박하고 거칠었으나 예결은 외려 이편이 마음에 들었다.

‘헤어드라이어 같은 거 없어서 다행이다.’

완전히 수동으로 머리를 말리는 동안 예결은 잠시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긴 여행 때문에 누적된 피로보다도, 이 순간이 가져다주는 안온함에 취한 것에 가까웠다.

사제가 졸고 있다는 걸 깨달은 하량은 그의 몸을 조심스레 침상에 눕혀주고는 야금을 가슴께까지 끌어 올렸다.

슬그머니 방을 빠져나가려 할 때, 그의 등에 예결의 부름이 닿았다.

“어디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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