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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86화 (86/203)

86화. 상단주는 휴가 중 (3)

달아나려는 대사형을 현장 검거한 예결의 음성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가물가물해서 잘 떠지지 않는 눈도 방긋 웃고 있었다.

“이런.”

문가에서 주춤 멈춰 선 하량은 도망치려다가 들킨 사람치고는 퍽 뻔뻔하게 혀를 찼다.

“들켰구나.”

“자장가…… 불러 주셔야죠.”

졸려 죽을 것 같다는 목소리면서 왜 자장가가 필요하다는 건지.

기묘한 집착에 하량은 쓴웃음을 지었다.

돌아오는 김에 교의를 가져오려 했으나 예결은 침상의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여기, 여기예요.”

곤혹스러움에 미간을 살짝 좁히면서도 하량은 사제의 곁에 앉았다.

어릴 적 몇 번 들어본 자장가를 떠올리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예결이 불쑥 하량의 손을 잡아 왔다.

얼른 시작하라는 듯 손깍지를 끼고 힘을 주는 예결을 내려다보는 하량의 낯에 옅은 온기가 맴돌았다.

이내 느릿하고 단조로운 선율이 하량에게서 흘러나왔다. 나직한 저음으로 흥얼거리는 자장가는 제법 감미롭게 들렸다.

“대사형은 정말 못 하는 게 없네요.”

잠에 반쯤 취한 투로 예결이 웅얼거렸다.

“머리도 잘 말리고…… 자장가도 잘 부르고…… 다정하고. 대체 못 하는 게 뭐야?”

종래에는 혼잣말 같은 투덜거림으로 번지는 말에 하량은 사제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답했다.

“그래 보인다니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었다.

“퍽 안간힘을 쓰고 있거든.”

***

사천에서 돌아온 예결은 예전의 그로 돌아와 있었다.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살갑게 몸을 붙여왔다.

자장가를 불러준 밤이 계기인 것처럼 예결은 하량에게 덥석 들러붙었다.

‘캥거루. 코알라. 왈라비.’

요새 예결의 모습은 딱 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었다. 하량은 예결이 매달리거나 덥석 안겨도 스스럼없이 받아주었다.

진영은 볼 때마다 심란한 얼굴이었고 삼랑은 뱀뱀이 맞춤 은잠술을 연구하느라 신경을 안 썼으며 홍여는……. 그냥 홍여였다. 그는 적뢰를 돌보는 일 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래도 예결이 관찰해본 결과, 대사형의 세 수하 중에서 가장 무신경한 건 홍여가 아니라 삼랑이었다.

가장 중요한 대사형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예결이 사천에서 돌아온 이래 항상 온화한 상태였다.

청해를 떠나기 전, 예결이 그를 피해 다닐 때만 해도 미미하게 드러났던 균열은 다시 모습을 숨겼다.

그러나 이는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었다.

안도와 함께 아주 자그마한 마뜩잖음이 생겨났다.

“-그래서 이번에 남궁 공자가 소개해준 후기지수를 통해 상단의 계약을 따냈어요.”

상념에 잠긴 하량을 앞에 두고 예결은 재잘재잘 떠들었다.

대사형이 원체 바쁜지라 삼시세끼를 같이 먹는 건 어려웠다. 예결이 장원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하량은 어디론가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장원에 함께 있을 때면 하량은 식사는 놓쳐도 담소를 나누는 다과 시간만큼은 꼭 확보해 두었다.

지금 예결은 흑귀 이야기를 적당히 숨기는 척하기 위해 상단의 실적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대사형이 아는 ‘순진한 사제’는 사천에 가서 사파의 낭인을 붙잡고 뼈와 살이 불타는 밤을 보냈다고 말할 수 없는 까닭이다. 예결은 그 일탈을 최대한 숨기려는 방편으로 상단 이야기를 과할 만큼 떠들게 되었다는, 그런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처음엔 천연덕스럽게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예결의 모든 계획이 그러했듯, 이 또한 변수가 존재했다.

‘한참 학교 다닐 때도 이런 건 안 했는데.’

학교 다닐 때도 안 했던 짓을 하는 기분이라 부끄러워진 것이다. 심지어 제하량은 전교 꼴등을 해도 진심으로 잘했다며 격려해줄 사내라 더 그랬다.

“근자 들어 사천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더구나.”

하량이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혹, 꿀이라도 발라둔 게냐?”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사천에 들락날락하는 이유가 무언지 빤히 알면서 건네는 농에는 뼈가 있었다.

예결은 그 질문에 화들짝 놀란 사람처럼 어깨를 움칠 떨었다. 그러나 애써 평정을 가장한 음성으로 답했다.

“아무래도 사람을 여럿 알게 되어 그런 모양이에요. 상단을 생각하면 어느 한 명 소홀히 대할 수 없으니까요.”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주워섬기면서도 슬쩍 시선을 피하는 걸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음을 어필했다.

“새로 교분을 나누는 이가 늘었다는 건 기쁜 일이지.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너를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구나.”

하량의 음성이 어째 미적지근했다.

예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흑귀 일을 감쪽같이 숨기는 것에 섭섭함을 느끼신 거겠지?’

대사형은 저 곤륜의 산봉우리와도 같았다. 예결은 눈사태를 일으키기 위해 발을 구르고, 돌을 던지고 뜨거운 물을 들이붓는 중이었다.

슬금슬금 그 성과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동안 청해를 비울 예정인데, 사제가 외롭지 않을 것 같아 내 안심이야.”

“예?”

예상치 못한 말에 예결은 고장이 나 버렸다.

“이번에 일이 생겨서 멀리 가게 되었단다.”

“어, 언제 돌아오세요?”

“달포가 넘기 전에 돌아올 생각이다만, 더 길어질지도 모르지.”

찻잔을 들어 올리는 하량의 낯은 여상했다.

‘아 설마, 그래도 사천에 가면 흑귀가 있겠지?’

없을 것 같다.

“대관절 어딜 가시기에…….”

중원에는 비행기도 없고 자동차도 없지만 천하에 둘도 없는 명마, 적뢰가 있었다.

어지간한 말의 두 배, 세 배는 빨랐고 지구력도 대단해서 기수의 체력만 받쳐준다면 여포의 적토마에 준하는 기량을 보여줬다.

그런 적뢰가 있는데 어째서 달포나 걸린단 말인가?

“항주.”

항주? 예결은 눈을 끔벅였다.

아니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청해인데, 항주까지 간다고?

현대로 따지면 상하이 바로 아래에 있는 곳이다. 중원의 서쪽 끝이라는 소리다.

‘적뢰로도 답이 안 나오네.’

예결은 속으로 탄식했다.

항주까지 간다는 말을 들으니 정말 대사형과 한 달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았다.

‘아니, 대사형 바쁜 거 아니었나?’

제하량의 본업은 모르지만 일단 그가 흑귀라는 신분을 따로 굴리고 있다는 걸 안다. 몸이 두 개쯤 되는 사람처럼 살아야 할 텐데 어느 세월에 항주까지 어떻게 갈 것이며 왜 가느냔 말이다.

‘흑귀도 특수한 사정 때문에 사천지부를 비워두고 있겠군.’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기분에 예결은 탁자 위에 엎어졌다.

“결아?”

사제가 뱀뱀이처럼 엎어진 채 몸을 흐느적거리자 하량이 놀라서 그를 불렀다.

“대사형이 자리를 비우시면…… 너무 쓸쓸할 거 같아요.”

“가지 말라고는 안 하는구나?”

“어떻게 그래요…….”

‘당분간 벽조목 생산은 물 건너갔군.’

아쉽긴 했다.

계속 암시장을 통해 상품을 처리한 탓에 비자금은 확보했으나 실적이 적자를 향해 추락하던 중이었는데, 이걸 흑자로 끌어올린 일등 공신이 바로 벽조목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번에 감태나무 군락지를 확보했다. 예결은 삼랑으로부터 그 소식을 듣자마자 연수목 제작 테스트하러 갈 생각에 드릉드릉하고 있었다.

넘치는 힘도 해소할 겸 돈도 버는 재미가 쏠쏠했다.

“내 청해를 비우면, 사천에 가 있을 생각이니?”

예결은 선배 에스퍼들의 피눈물로 쓰인 책의 첫 번째 챕터를 떠올렸다.

‘어디 보자, 그 챕터 제목이…… 〈가이드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현명한 에스퍼의 처신〉이었나?’

“대사형이 자리를 비우신 동안 염려할 일이 생기지 않게끔 상단 일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대사형은 사제의 어른스러운 발언에 감탄이라도 했는지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 입가가 움찔거리는 것이……. 기특함이나 대견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렇게 섭섭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선?”

하량의 추궁 아닌 추궁에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린 예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찻물에 비친 제 얼굴은 스스로가 보기에도 표정 관리가 하나도 안 되고 있었다.

역시 선배 에스퍼들은 도움이 하나도 안 된다.

‘가이드에게 부담을 주는 영악한 에스퍼의 처신’ 같은 내용을 알려 줬어야지, 이렇게 선량한 방식으로 어느 세월에 가이드를 꼬신단 말인가?

“……티가 많이 나나요?”

“네가 이렇게 솔직한 아이라는 걸 새삼 느끼고 있단다.”

그 말에 거짓말쟁이는 괴로워졌다.

이래 봬도 천하에 둘도 없는 사기꾼인데 솔직한 아이라니? 예결이 보기엔 대사형이야말로 순진해서 큰일이었다.

‘내가 지켜 드려야지.’

제하량의 인생에 거짓말쟁이는 예결 한 명으로 충분했다.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웃으셔도 괜찮아요.”

다정하고 배려심이 깊은 하량은 예결의 마음에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반쯤 돌린 뒤 어깨를 들썩였다.

꾹 눌러 참은 흐느낌 같은 게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에스퍼의 청각이 뛰어난 게 지금만큼은 원망스러웠다.

‘웃음이 많은 사람도 아닌데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역시 솔직하게 말하길 잘한 거겠지?’

애써 자기합리화를 마친 예결은 대사형을 기다렸다.

겨우 진정된 후에 돌아선 하량은 심통이 나 볼이 잔뜩 부어 있는 예결을 보고 두 번째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무림인답게 하량은 본인의 감정을 빠르게 갈무리했다.

“어디 보자…….”

웃음기를 뺀 담백한 음성에 예결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동안 일을 열심히 했으니 휴가를 가야지. 안 그러니?”

“휴가……요?”

예결은 눈을 끔벅였다.

“함께 가주겠니?”

대사형의 말과 함께 천사의 트럼펫 소리가 들렸다.

“너만 괜찮다면 말이다.”

이상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느껴지는 제안이었다. 예결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요.”

약간 얼떨떨했다. 솜사탕이라고 생각하고 먹었는데 입 안에서 파핑 캔디가 톡, 톡 하고 터지는 기분.

‘같이 가는 거였어?’

예결은 너무 헤벌쭉해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거듭 답했다.

“정말 좋아요.”

하량은 무어라 예결을 놀리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귀애하는 어린 사제가 무방비한 낯으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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