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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87화 (87/203)

87화. 상단주는 휴가 중 (4)

멀게만 느껴졌던 반짝임이 손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낯선 감각이었다.

하량은 순간 번져나간 동요를 삼키며 웃음기 섞인 음성으로 사제를 놀렸다.

“휴가를 보내준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구나.”

“사실 저 어디로 놀러 가는 건 처음이에요.”

전생에는 항주에서 곤륜으로 이동한 장거리 여행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때는 곤륜파 입문이라는 목표가 있었으니 유람과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강행군이었다.

환생한 후에는 어딜 놀러 갈 겨를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유별났던 예결은 빠르게 S급 에스퍼 판정받았고, 부모님은 그를 어려워했기에 가족끼리 휴가를 즐긴 적은 없다.

매칭 가이드가 없으니 학교에서 가는 수련회나 현장학습도 참석하기 어려웠다. 예결이 흥미를 보일라치면 담임 선생님이 슬쩍 불러내서 관리 인력 부족을 호소해왔다. 학교 내라면 모를까 여행지에서 사고가 나면 무슨 보험 문제가 생긴다든가, 아무튼 복잡한 어른들의 사정이 있단다.

발그레한 뺨을 가진 어린아이 속에는 이미 성인이나 다름없는 정신이 깃들어 있었으나 남들은 그걸 몰랐다. 고등급의 미성년 에스퍼는 대체로 시한폭탄 취급당한다. 심지어 그 에스퍼에게 가이드도 없다면 더더욱.

예결은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범생처럼 굴면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덜 무서워할 거라고 판단한 까닭이다.

그렇게…… 예결은 집과 학교를 번갈아가며 지내다가 병원에 갇혔고 거기에서 나온 뒤에는 집과 학교, 그리고 센터를 왕복하는 단조로운 삶을 살았다.

마침내 가족끼리 첫 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 예결은 애써 내색하지 않았으나 제법 설렜다.

그러나 제대로 된 가족이 될 겨를조차 없이 부모님을 잃게 되었다.

예결은 슬픔을 느끼진 못했다. 다만 분노했을 뿐이다.

폭주라는 자멸적인 선택을 하면서까지 예결은 가족 여행을 망친 에스퍼 둘을 벼락으로 튀겨버렸다. 그 사실에 한 점 후회도 없었다.

‘만약 한 끗만 더 넘쳐서 대사형을 만나기 전에 죽었다면…….’

그건 지금 생각하면 좀 오싹하긴 했다.

“처음이라고?”

대사형의 음성에서 아연함이 느껴졌다.

“네. 곤륜파에 입문할 때 항주에서 중원을 가로질러 청해까지 오긴 했지만. 순수하게 유람을 목적으로 여행을 가는 건 처음이에요.”

“그러고 보니, 네 고향이 항주라 하였지.”

하량이 뒤늦게 깨달았다는 양 물었다.

“네.”

항주는 전생의 예결이 곤륜에 들어가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따지자면 고향인 셈이다. 그러나 예결은 항주에 큰 애착은 없었다.

“제가 항주 출신이라는 걸 기억하고 계셨군요?”

대사형이 별 볼 일 없던 사제의 고향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예결에게는 퍽 의외였다. 후기지수 시절의 제하량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온 중원을 누비는 협객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려 깊은 사내라고 한들 얼굴 몇 번 보고 이름이나 간신히 익힌 게 고작인, 심지어 스승마저도 다른 동문 사제의 고향을 기억할 여력이 있었다니.

‘이렇게까지 빛이면 태양계가 아니라 대사형계여야 하지 않나.’

예결은 중원 사람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주접을 조용히 해치웠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가게 되니 감회가 새롭겠구나.”

“으음. 지금은 거의 생각도 안 나서요.”

항주에서 태어났는지 항주에 버려진 건지 알 게 뭐란 말인가.

그곳에서 가진 기억 중 좋은 건 단 하나뿐이다.

제하량을 만난 것.

“비가 내리는데, 예서 무엇 하고 있니?”

값비싼 비단옷이 다 젖는 줄도 모르고 지우산을 내밀던 고아한 소년.

그때 그 세상 물정 모르던 도련님이 예결의 앞에 있었다.

‘어차피 맞아 죽거나 굶어 죽었을 거, 이 악물고 곤륜까지 가길 잘했지.’

예결은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때 목숨 걸고 중원을 횡단한 덕에 지금 제하량을 대사형이라 부를 수 있었다. 하량은 다정하긴 해도 타인에게 선을 긋는 사람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발이 짓무르고 발톱이 빠지도록 걸었던 게 하량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기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싸게 먹힌 편이다.

“녀석. 기억이 안 난다더니, 지금 웃고 있지 않느냐?”

“대사형이랑 같이 여행 가는 게 좋아서요.”

어떻게 항주까지 사랑하겠어. 대사형을 사랑하는 거지.

유행하던 노래의 가사를 대충 개사해서 흥얼거린 예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저는 더 늦기 전에 여행 준비하러 가볼게요.”

“준비? 무얼 챙기려고?”

“옷이라든가……?”

“가서 사면 된단다.”

예결은 하량의 금전 감각에 문제가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저런 사내니까 이십 년 만에 만난, 그리 친하지도 않았던 사제에게 청해상단을 쥐여준 거다.

“그래도 최소한은 챙겨야 하지 않을까요?”

“짐이 너무 무거우면 적뢰가 힘들어할 거란다.”

“하긴. 영물이라도 관절은 아껴야겠지요.”

예결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량은 심각하기 짝이 없는 낯으로 적뢰의 건강을 걱정하는 예결의 발언에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평범한 말과 비슷한 생김이긴 했으나 적뢰는 준영물이었다. 쉬지 않고 중원을 주파해도 붉은 땀을 몇 방울 흘리고 말 것이다. 게다가 꾸준히 진기를 불어넣어 신체 능력을 북돋아 줄 제하량이 함께이니, 사제처럼 가벼운 사내가 아니라 바위를 매달고 달려도 적뢰는 거뜬히 버틸 것이다.

예결이 영물에 대해 아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 그가 데리고 있는 천년뇌각망만 해도 산채에 벼락을 꽂아버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받지 않았던가.

물론 그게 실은 예결의 힘이라는 걸 보고하는 자도, 보고받는 자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러나 하량은 사제의 순진한 착각을 정정해주는 대신,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해상단도 주인이 자리를 오래 비우고 있으면 곤란할 터. 적뢰의 짐을 최대한 줄이고 빨리 항주에 도착할 필요가 있단다.”

“그런데 오는 길은 어떡해요? 올 때 짐이 늘어나면 적뢰가 힘들지 않을까요?”

문득 떠오른 좋은 생각에 예결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설마 항주에서 사들인 걸 전부 버리고 오라고 하진 않을 테고, 이렇게 말하면 옷 몇 벌 정도는 챙기라고 하실지도 모른다.

“일반 표국을 통해 청해까지 데려다 놓으라고 의뢰하면 되지.”

제하량은 언제나 답을 알고 있었다.

“아.”

예결은 항주에서 청해까지 택배, 아니 표행 비용을 계산하다가 그만 아찔해지고 말았다.

이 시대에는 산적이나 수적 및 중원에 널리 분포한 유해조수, 그리고 무림인의 갈등 등 여러 위험 요소가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표국은 위험수당을 받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배달 거리가 멀수록 그 위험수당도 올라간다.

“알겠어요. 몸만 가면 된다는 거죠.”

예결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왜…… 내가 대사형의 과소비를 걱정하는 입장인 거지?’

보통은 가이드가 에스퍼의 과소비를 걱정하는 편이었다.

그는 에스퍼 표어 공모전에서 만장일치로 낙선한 작품을 떠올렸다.

〈돈지랄은 가이드 모르게〉

출품자는 캐리어도 없이 카드 하나만 들고 해외여행을 가자고 한 에스퍼 선배였다.

그는 스위트룸에 체크인한 뒤 가이드에게 쇼핑하러 가자고 했다가 그 사실을 들켰고, 등짝을 맞았다.

아직도 햇볕이 쨍쨍한 날이면 맞은 자리가 아프다고 자랑하는 선배는 모두의 눈총을 샀다.

‘과소비를 지적하는 것도 다 애정이 있어서 해주는 거라니까?’

저렇게 생각하는 양반이 표어를 저따위로 제출한 건 자기가 가이드와 사이가 얼마나 좋은지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염장질에 지친 센터의 에스퍼들은 그를 작신작신 밟았다. 밟힌 선배는 오히려 행복해했다.

‘집에 가서 우리 자기한테 호 해달라고 해야지!’

그야말로 맑은 눈의 광기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제 운명을 짐작하지 못한 예결은 가이드를 만난 에스퍼는 전부 상태가 이상해진다고 생각하며 학을 뗐다. 그야말로 비 오는 날에 먼지가 날 정도로 선배를 패던 다른 에스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손을 멈췄다.

따끈따끈한 소식을 접한 센터장님은 사흘째 야근하느라 퀭해진 눈으로 명령했다.

‘저 새끼 튀르키예 사절단에 끼워서 보내버려.’

무려 한 달간 가이드 못 만남 형에 처한 선배는 그제야 조용해졌고 센터는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한시적 평화였다.

해외에서 돌아온 선배가 ‘오래 떨어져 있으니까 우리 자기랑 사이가 더 끈끈해진 거 같아!’ 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떠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미친 선배였다.

‘대사형을 안 만났다면 평생 그 선배를 이해하지 못했겠지.’

저런 인간을 떠올리며 아련한 기분씩이나 들게 되다니, 예결은 떨떠름해졌다. 새삼 자신이 비상식의 궤도로 진입했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에스퍼에게 있어서 온 우주의 이치는 가이드였다. 하량을 만난 이상 예결은 그 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항주가 초행이니 네가 큰 도움이 되어줄 거라 믿는다.”

대사형의 믿음에 예결은 너무 헤벌쭉해지지 않으려 애썼다.

“저만 믿으세요.”

그러나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호언장담을 하는 것만은 참는 게 불가능했다.

대사형이 자신만 믿겠다는데, 예결이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어서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매번 하량에게 도움만 받아왔으니 이번에야말로 자신에게도 활약할 기회였다.

이십 년, 아니지. 거의 삼십 년 전에 떠난 항주지만, 예결은 그 뒷골목이 어땠는지는 기억할 수 있었다.

‘생존을 위해 습득한 지식이라 그런가.’

빈민가와 여러 세력의 이권이 얽히고설킨 바닥은 황제도 손을 댈 수 없는 곳이었으니 지금도 여전하리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면면은 달라졌겠지만.

“근데 항주까지는 어쩐 일로 가시는 건가요?”

예결이 대사형을 힐끔힐끔 보다가 물었다.

“항주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하량의 낯에는 선량한 웃음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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