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상단주는 휴가 중 (5)
“드디어 출발이군요.”
진영이 착잡한 시선으로 예결과 하량을 바라봤다. 주군에게 독 오른 족제비라도 진상해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한 바가 있긴 했으나 역시 붙여놓으니 심란했다.
“자리 비운 동안 상단 잘 부탁해.”
예결은 천연덕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돌아서자 붉은 갈기의 준마가 보였다.
적뢰는 주인인 홍여의 키에 맞춰서 몸집도 키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큰 편이었다. 그래도 에스퍼다운 날렵한 운동신경으로 올라타려고 하는데 대사형이 불쑥 다가왔다.
“올려주마.”
어느새 진영과 대화를 마쳤는지 대사형이 다가왔다.
“앗.”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이미 번쩍 들린 뒤였다. 하량은 그를 안장 앞쪽에 앉혔다.
“뒤에 앉아 가면 안 될까요?”
예결은 소심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기왕 같이 타고 갈 거라면 예결은 뒤에 앉아 욕심껏 대사형을 끌어안고 싶었다. 말에서 떨어지는 게 무서운 척 팔에 힘을 꽉 주면 대사형이 뭐라고 할 리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하량은 이 문제에 있어서 매우 단호했다.
“최고 속력으로 적뢰를 몰 예정이니 자칫 떨어질 수도 있단다.”
안으려다가 안긴 꼴이 되었으나 정작 착석하고 나니 이것도 나름 만족스러웠다. 꾸물꾸물 안정적으로 자세를 잡자 황금빛 뱀이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예결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하량이 뱀뱀이를 보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뱀뱀이가 꽤 무거운 보퉁이를 들고 있구나.”
“아, 이거요?”
예결은 뱀뱀이를 들어 보이며 답했다. 제하량과 문예결, 그리고 뱀뱀이 중 가장 짐이 많은 건 바로 뱀뱀이였다.
“삼랑이 챙겨준 거예요.”
예결은 뱀뱀이가 목에 매달고 있는 보따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도 뭐가 들어 있는지는 몰라요. 슬쩍 확인해 볼까요?”
안에 봐도 돼? 하고 묻자 뱀뱀이가 꼬리로 보따리를 밀어내 예결의 손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 꼬리로 슬금슬금 매듭을 풀어주는 진귀한 재주를 선보였다.
“오……. 입으로 물고 꼬리로 밀어서 저걸 또 하네?”
“영물이라지만 정말 영특하기 그지없구나.”
뱀뱀이가 풀어낸 보따리 안에서 암행복이 튀어나왔다. 뱀뱀이 사이즈에 맞춘, 제법 귀여운 두건이었다.
진삼의 방에 침입할 때, 대충 천을 묶어서 뱀뱀이한테 씌워줬던 걸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삼랑, 바느질도 잘해?”
예결의 질문에 뱀뱀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적뢰를 꼬리로 가리켰다.
“홍여 시켰구나…….”
어쩐지 숙연해진 예결은 말꼬리를 흐렸다. 삼랑이 홍여에게 뱀뱀이의 옷을 만들어 달라고 조르는 모습이 저절로 상상이 갔기 때문이다.
“삼랑은 천보다 가죽을 꿰매는 데 더 능한 편이라 홍여를 시켰을 거다.”
예결은 다시 보퉁이를 뱀뱀이에게 잘 묶어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삼랑 없이 항주에 가도 되나요?”
“퍽 정이 든 모양이구나. 아쉽지만 삼랑은 우리와 함께 갈 수 없단다.”
하량은 다정하게 설명했다.
“적뢰가 세 사람을 태울 수는 없으니까.”
일리가 있었다. 적뢰가 지치지 않는다고 해도 부피가 문제였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삼랑이 제 호위니까 여쭤봤어요.”
“삼랑은 퍽 유능하지. 하지만 결아.”
맞닿은 하량의 몸에서 청량한 웃음소리가 느껴졌다.
“미덥지 못한 모양이지만, 이 우형의 실력도 꽤 괜찮단다.”
예결이 채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적뢰가 출발했다.
장강으로 향하는 여정 동안, 예결은 현대의 자동차가 얼마나 위대한 발명인지 깨달았다. 아무래도 착석감도 착석감이지만 그보다 대단한 건 유리창이다.
‘오픈 스포츠카 타고 다니던 선배들 다 미친 거 아니야?’
벌레라든가, 나뭇잎이라든가 먼지 따위가 얼굴로 날아든다. 그래도 하량은 주춤하거나 속도를 줄이는 법 없이 적뢰를 몰았다.
저 이물질들이 모두 푸르스름한 무언가에 튕겨 나갔기 때문이다. 예결이 짐작하기로는 기막 같았다.
고작 벌레나 나뭇잎 막자고 기막을 사용한다니, 무림인 진기명기가 따로 없었다.
‘아니지, 무림인에게도 진기명기로 느껴질 정도 아닌가?‘
일전에 삼랑이 소리 차단을 위해 검막을 펼칠 때도 놀란 바 있다. 내공 소모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하량은 단순히 예결의 쾌적함을 위해 이물질이 다가올 때마다 기막을 사용하고 있었다.
동체시력은 물론, 순발력과 내공까지 이 모든 삼박자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불가능한 짓이다.
“근데…….”
예결은 몸이 덜컹덜컹 흔들리는 동안 혀를 깨물지 않기 위해 애쓰며 말을 꺼냈다.
“역시 대사형이 천하제일인 맞죠?”
등 뒤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말발굽 소리에 잘 들리지도 않던 예결의 질문에 하량이 전음으로 답했다.
[사제는 이 우형을 너무도 우러러보아 큰일이야.]
자신은 무림인이라 작은 소리라도 들을 수 있다지만 평범한 일반인인 사제가 듣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해서 전음을 사용하는 배려심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저번에 적뢰 타고 이동할 때 이보다 훨씬 느린 속도였는데도 벌레라든가 흙먼지 때문에 엄청나게 고생했는데, 대사형이랑 타니까 너무 쾌적한걸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기예에 가까운 거 같은데…….”
[잡기가 많을 뿐이지. 말을 너무 하지 말렴. 그러다가 혀를 씹겠구나.]
부끄러워하시기는.
예결은 항주에 가면 제하량을 칭찬감옥에 가둬야겠다고 결심했으나 일단은 입을 다물었다.
평소 시키는 대로 잘하는 착한 사제라는 걸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사천에서 대사형 모르게 하고 다니는 ‘나쁜 짓’에 좀 더 신경이 쓰일 테니까.
***
“오랜만입니다.”
교룡왕이 인사를 건넸다.
“교, 교룡왕…….”
예결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하량과 연소소를 번갈아 쳐다봤다.
청해에서부터 말을 달려서 이제 막 장강에 도착한 참이었다. 강줄기가 굵어지는 곳 나루터에 상선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위에 올라타자 장강수로채의 우두머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예결은 놀랐다거나 겁을 먹진 않았으나 필사적으로 일반인 같은 반응을 쥐어짜낸 참이었다.
“이미 이야기가 된 상황이란다. 너무 놀라지 않아도 괜찮아.”
하량은 나긋나긋한 투로 예결을 안심시켰다.
“적뢰가 워낙 눈에 띄는 명마다 보니, 배를 타고 이동할 때는 차라리 수적의 배를 이용하는 게 좋거든.”
“그렇게 된 거군요. 또 영업하러 오셨는데 저희랑 마주친 게 아닐까 싶었어요.“
예결이 짐짓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에 교룡왕이 입꼬리를 쓱 끌어올렸다.
“첫 만남이 독특하긴 했지요. 오랜만입니다. 문 공자.”
“그나저나. 내 자네에게 직접 맞이하러 나오라고 하진 않았는데, 무거운 걸음을 했군.”
“마침내 원을 이뤘으니 주군께 인사를 드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연소소가 웃었다. 예결은 절대로 당서악의 행방을 묻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가시는 길에 불편한 일이 없게끔 살피라고 수하에게 일러두었습니다.”
교룡왕은 생각보다 공손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강호인 애송이 따위로 느꼈을 사내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게 느껴져서 예결은 새삼 놀랐다.
이토록 확실하게 상하관계가 잡혀 있을 줄이야.
“교룡왕의 노잡이라면 믿을 만하지.”
하량이 서늘한 낯으로 답했다.
예결은 어쩐지 그 표정이 낯설어 멍하니 대사형을 바라봤다.
‘이건 또…… 상당히 위압적인데.’
수하에게만 보여주는 표정이었는지 하량은 예결과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이쪽이 오히려 특별 취급이라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그저, 예결은 욕심쟁이라 자신이 모르는 제하량도 전부 알고 싶었을 뿐이다.
고개를 돌리다가 예결의 표정을 본 교룡왕이 멈칫하더니 흥미롭다는 시선을 던졌다.
어느새 시침을 뚝 뗀 예결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그럼, 저는 먼저 교룡채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편안한 뱃길 되시길.”
연소소가 떠난 뒤, 선실로 안내받은 예결은 본인의 방에 눌러앉지 않고 바로 대사형에게 향했다. 그림처럼 단정하게 교의에 앉아있던 하량은 고개를 돌렸다.
“왔구나.”
“혼자 있을 생각을 하니 심심해서요.”
옆에 털썩 앉은 예결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일찍부터 품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항주에 아는 사람이 있으신 줄은 몰랐어요.”
“그래?”
“네. 대사형의 연고지도 동쪽인가요?”
그러고 보니 제하량은 예결의 고향이 어딘지 알아도 예결은 대사형의 고향이 어딘지 몰랐다.
왠지 무심하기 짝이 없는 사제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산동 출신이란다.”
하량은 순순히 본인의 출신지를 알려주었다. 산동이면 항주와 은근히 가까운 편이었다.
비로소 어린 제하량이 어떻게 항주까지 왔는지 알 것 같았다. 항주는 워낙 유명한 곳이니 가족과 함께 놀러 왔던 모양이다.
항주가 유명한 휴양지인 만큼, 워낙 미친 물가를 자랑하긴 했으나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대사형은 값비싼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역시 귀한 집 출신인 게 분명했다.
“산동이면, 제갈세가와 황보세가가 있는 곳이네요.”
문득, 대사형과 염문이 있던 채봉이 황보세가 출신이었다는 게 생각났다.
‘비겁하게 같은 동네 출신이라는 사실을 이용해서 대사형과 친해진 건가?’
그보다 수십, 수백 배는 비겁한 짓을 하고 있는 예결은 뻔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채봉을 위해 토끼 남편, 여우 애인, 사슴 구남친 삼종세트 기원을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 오대세가 두 가문이 자리 잡은 땅이지.”
“그럼 항주에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것도 혹시……?”
산동의 인척이 항주로 이사를 갔나? 하는 질문이 예결의 시선에서 묻어났다. 하량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는 사람이라 했던 건, 오래전에 신세를 졌던 자의 제자란다.”
하량의 설명에 예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어디에 사는지 처음으로 알게 되어서 말이야. 수소문을 좀 해봐야 할 거 같으니 정보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 우형과 어울려주렴.”
“당연하죠.”
사양 따윈 모르는 뻔뻔한 사내가 방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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