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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89화 (89/203)

89화. 상유천당 하유소항 (1)

“정말 여기는 변한 게 없네.”

마침내 적뢰는 항주에 도착했다. 하량의 품에 안긴 채 예결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청해나 사천과는 다른 분위기를 품은 물의 도시는 예결의 어린 시절만큼이나 눈이 부셨다. 그러나 이 도시가 진정으로 아름다울 때는 역시 밤이었다.

향수라고 하기엔 다소 걸쩍지근한 감정을 삼키며 예결은 주변을 살폈다. 직물로 유명한 도시답게 오가는 이들이 입고 있는 옷의 색이며 무늬가 유독 시선을 사로잡았다.

‘염색 공방도 여전히 있으려나.’

당시 예결처럼 구걸하는 아이에게 자릿세를 떼 가던 사파가 하나 있었는데, 놈들이 쫓아올 때면 그 천들 사이에 숨어 있곤 했다.

색색의 천이 바람에 너울너울 흔들리는 모습은 분명 보기 좋았다. 그러나 예결은 하늘이 아니라 바닥을 내려다봤다.

곱고 예쁜 것, 부드럽고 다정한 것 따위는 그의 몫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 볕이 아주 좋을 때면, 천을 투과한 빛이 바닥에 색색의 그림자를 만들어내곤 했다.

어떤 순간은 무심코 아름다웠다.

“결아?”

하량의 부름에 예결은 퍼뜩 놀라 그를 돌아봤다.

“예?”

영 이상한 목소리를 낸 거 같았는데, 대사형은 웃지도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곧장 숙소에 가서 짐을 풀까? 그리고 옷부터 사러 가자꾸나.”

“좋아요.”

상념은 참 쉽게 흩어졌다.

하량은 적뢰를 몰아 항주 중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장원으로 향했다. 처음엔 객잔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시끄러운 저자에서 멀어진 뒤였다.

담벼락도 높고 주변이 조용한 걸 보면 여긴 거주지역이 분명했다.

“여기에도 장원이 있네요?”

떨떠름한 목소리로 관리인에게 적뢰를 건네주는 하량에게 묻자 그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쉬러 왔는데 번잡한 곳에 머무를 수는 없어서 따로 알아보았단다.”

곤륜에서 지내던 시절만 해도 제하량은 잘사는 집 아들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천생 도인이었다.

몇 벌 안 되는 도복을 손수 빨아 정갈하게 입고, 검도 장문인의 것을 물려받아서 썼다.

그 검소한 대사형을 기억하던 예결에게 지금의 그는 겪을수록 놀라움 그 자체였다.

“대사형…… 제가 돈 많이 벌게요.”

벽조목 생산량을 지금의 두 배, 아니 세 배 정도 늘리면 되지 않을까?

예결이 치밀하게 고민하는데 하량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청해상단을 중원삼대상단으로 만들겠다고 했었지? 내게 배 한 척도 선물해 준다고.”

대사형의 눈이 실로 곱게 휘어졌다.

“내 무척 기대하고 있단다.”

돌아가면 당장 연수목도 만들어 팔자.

예결은 코피가 흐르지 않았는지 확인하며 그리 다짐했다.

일고경성(一顧傾城)의 미인조차 무색해질 정도의 눈웃음이었다.

“믿고 맡겨 주셨으니 절대 실망하시지 않을 거예요.”

예결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호언장담했다.

가만 돌이켜 보면 여행길에 오른 순간부터 대사형의 기분은 무척 좋아 보였다. 이는 예결도 마찬가지였기에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 무리하진 말렴. 결이 네가 사천에만 있으면 내 너무 쓸쓸해질 것 같구나.”

‘당신 대체 누구랑 경쟁하는 거야…….’

흑귀라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 저렇게 천연덕스러운 말을 한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결의 귀에는 본인이 흑귀면서 흑귀를 질투하는 까닭에 저런 소리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렇게까지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곤란한데.’

무럭무럭 저 좋을 대로 자라나는 망상에 예결은 괴로워졌다. 아직 대사형을 반만 휘감았는데 벌써 판단력을 상실하면 곤란했다.

그가 하는 건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 아닌가. 이제 겨우 기사멸조의 허들을 넘었을 뿐이다.

“십수 년 만에 곤륜파에게 돌아갔는데도, 계속 대사형을 생각했는걸요.”

한 생애 내내 예결이 곤륜을 그리워한 이유는 제하량의 존재가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받기 위함이었다.

각성 때문에 망가진 제 뇌가 멋대로 만들어낸 환상이면 어쩌지,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여 닥치는 대로 곤륜산에 대한 자료를 찾아다니고, 하다못해 무협지까지 뒤적거리지 않았던가.

주변인이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걸 알면서도 도무지 포기할 수 없었다. 현실은 턱 끝까지 깔딱깔딱 차오르고 있었고, 까치발을 든 채 버티던 예결에게는 무엇 하나라도 좋으니 매달릴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탓에 필요 이상으로 대사형을 그리워하고, 또 미화하다가 완전히 돌아버린 게 아닐까 싶을 때도 있었다.

만약 끝나지 않는 꿈을 꿀 수 있다면, 그 꿈의 주인공은 분명 제하량일 테니까.

눈을 내리깐 예결은 조용조용 말했다.

“그러니 저는 항상 대사형의 곁으로 돌아올 거예요.”

“그래…….”

하량이 흘러내린 예결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고는 속삭였다.

“내 네게 잘해준 적도 없는데, 너는 이상하게 나를 따랐지.”

“잘해준 적이 없다니요? 대사형은-”

예결이 반박하려 들었으나 하량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 부족하여 그런다. 네게 받은 것을 돌려주려면 아직 너무도 부족해서 그래.”

“너무 부족하다고만 말하지 마세요.”

손을 뻗은 예결은 제하량의 손목을 쥐고 끌어왔다. 그는 순순히 따라온 하량의 손을 가슴 위에 얹고 말했다.

“살아 있잖아요. 심장 소리도 들리고, 따뜻하고…… 그렇죠?”

“그래.”

“그런데 대사형은 자꾸 넘칠 정도로 채워주시려 하니까, 저는 드린 것에 비해 받은 게 너무 많은 것 같아요.”

하량은 눈을 내리깔았다. 무어라 말 한마디도 안 했는데 불만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예결은 이제 자신이 대사형의 표정 일부를 알아맞힐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조금 즐거워졌다.

함께 더 오래,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면 더 많은 것을 알아볼 수 있게 되리라.

그런 생각을 하면, 예결은 가슴이 벅찼다.

“우리 둘의 의견이 정반대로구나.”

“그러니까 천천히 간극을 좁혀야죠.”

씩 웃은 예결이 하는 말에 하량은 무심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마구 흩트려 놓았다.

어린 동생 취급하듯 정겹기 짝이 없는 손길이었으나 예결은 투덜거림을 삼키고 순순히 몸을 맡겼다.

‘언제쯤 나를 불편하게 여겨 주려나…….’

지금보다 더 의식하고, 지금보다 더 어렵게 여겼으면 좋겠다.

속내야 어떻든, 예결은 양순한 사제의 탈을 뒤집어쓴 채 눈을 내리깔았다.

하량은 만족스러울 만큼 사제의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고 화제를 바꿨다.

“사실 이 장원에 괜찮은 탕옥이 있다고 하더구나. 온천이 솟은 자리에 집을 지었다던가.”

과연 물의 도시, 하고 예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항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긴 했으나 온천 같은 건 구경도 못 해봤기에 호기심도 들었다.

“함께 들어갈까?”

까닭에 하량이 이런 제안을 했을 때,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아뇨. 괜찮아요.”

예결은 생각하기도 전에 툭 내뱉었다. 뇌를 거칠 겨를조차 없이 본능이 반응한 수준이었다.

너무 단호하게 거절한 게 아닐까 싶었지만 예결은 정말 대사형과 같은 탕을 쓰면서 제정신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저는 요 며칠 내내 적뢰의 등에 매달려 있었더니 조금 피곤해서요. 오늘은 가볍게 씻고 먼저 자러 갈게요.”

그래도 대사형이 오해할 여지는 최대한 없애야겠다 싶어 거의 숨도 쉬지 않고 우다다 내뱉었다. 사제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하량은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저런, 많이 피곤한 모양이구나. 그럼 다음에…….”

“대사형도 푹 쉬세요!”

예결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량을 뒤로한 채 달아났다.

에스퍼가 살면서 절대로 믿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가이드를 앞에 둔 스스로의 이성이었다.

사제가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자 하량은 제 손을 내려다봤다.

‘지나치게 충동적이었어.’

떠나지 않을 거라고, 천천히 간극을 좁혀 나가자고 말하는 사제를 보는데 무심코 손을 움직였다. 마지막 순간에야 이를 깨닫고 일부러 예결의 머리카락만 못살게 굴었다.

예결이 무엇 때문에 저를 멀리했는지 알면서도 온천 따위 이야기나 주절거린 건 그 때문이었다.

자신이 항주에 있는 동안 사제가 흑귀를 기다리며 사천을 맴돌 거라는 생각에 불쾌한 나머지 그를 데려와 놓고, 앞으로 며칠 동안 예결이 저를 피해 다닐지도 모르는 짓을 저질러 버렸다.

참으로 아둔하기 짝이 없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군.’

사제가 우러러보는 시선이 좋아 잘나 보이려 애썼다. 하량은 어렸던 예결이 그를 위해 무엇을 바칠 수 있을지 하나도 몰랐다. 그저 한때의 치기에 취한 아둔한 소년이었을 뿐이다.

단지 하량의 운이 좋았고, 예결의 운은 너무도 나빴기에 하필 그 시절에 서로를 만났다.

세월이 흘러, 하량은 그 소년을 잊었다. 그러나 예결을 만난 순간 너무도 쉽게 과거는 현재가 되어 그를 휘둘렀다.

자꾸만 사제를 지켜보게 되는 것도, 웃음이 늘어나는 것도, 그리고 범위 내에서 통제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것도 모두 같은 결을 품고 있었다.

“교의 하늘을 뵙습니다.”

온화한 얼굴로 장원을 소개해 주었던 관리인이 혼자가 된 하량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중년의 남자는 흡사 인형처럼 무감정해 보였다.

“양의 행방은?”

퍽 소름 끼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량의 음성에는 동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항주의 뒷골목에서 장의사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환자로 다녀간 아이가 그의 손목에 숨겨진 표식을 확인했습니다.”

“좋아. 잘해주었다.”

마의의 가르침을 받은 족속은 하나같이 독하기 짝이 없었다. 전부 잡아 죽였다고 생각하면 어딘가에 또 살아 있는 자가 있었다.

근 몇 년 동안 놈의 뿌리를 뽑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하량이 가꾸는 정원은 깨끗해진 상태였다.

단, 이놈은 마의가 아직 살아 있을 때 그의 휘하에서 달아난 자라서 근래에 들어서야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데려올까요?”

“아니다.”

하량의 입꼬리가 서늘한 호선을 그렸다.

“내 직접 가지.”

나약하기 짝이 없던 소년의 시름에 귀 기울이며 보내기엔 이 밤이 너무도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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