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상유천당 하유소항 (3)
“오늘 먹을 것을 받아 가라.”
문 사제라 불리던 이가 죽은 후로, 제하량은 속이 텅 빈 인형처럼 걸어 다녔다.
여전히 순종적이었으나 그의 정신은 아득히 먼 곳을 헤매는 듯 보였다.
진팔은 스승이 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함구하라는 말이 불만스러웠다.
좀 더 생생하게 살아서 절망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마의에게 제하량이 품은 건 절망이 아니라 미련의 자취일 뿐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계속 저 사내가 진정으로 망가지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오늘도 진팔은 제하량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아무리 스승의 명이 있었다지만 밤은 터무니없이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하품하며 마의의 저서를 뒤적거리던 진팔은 기척이 일자 고개를 들었다.
잠든 곤륜의 제자 사이에서 한 명이 꾸물꾸물 몸을 일으키더니 제하량에게로 접근했다.
제하량이 어떻게든 살리려 애쓴 동문이 죽었을 때 가장 많이 울었던 녀석이었다. 개중에서 가장 어려 보이기도 했고 감정적으로도 유약해 보였다.
어린 도사가 품을 뒤지는 동안 곤륜운룡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요 며칠 전부터 제하량은 감옥에 돌아가면 실이 끊긴 인형처럼 쓰러져 잠들었다. 사제의 죽음이 그를 정신적인 궁지로 내몬 데다가 마의의 실험은 제하량을 육체적으로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이대로면 곤륜운룡이 깨어나지 않을 듯해 진팔이 움직이려는 순간, 제하량이 깨어났다.
그는 상대가 누군지 확인할 겨를조차 없이 출수했다. 극한까지 몰아붙여진 탓에 곤륜운룡이 반사적으로 내지른 장에 어린 곤륜의 도사는 반쯤 날아가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청우…… 사제?”
깨어난 제하량은 상대를 알아보고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 미안하구나.”
몇 번이나 청우라는 이의 상태를 살핀 제하량이 물었다.
“배가 고팠느냐?”
얼마나 환멸이 날까? 저 음식은 어제까지만 해도 죽은 이의 입에 들어가던 게 아니었나?
곤륜운룡은 이제 겨우 제 몫을 되찾았는데 아무리 배가 주렸다지만 기다렸다는 듯 그걸 뺏어 먹으려 드는 어린 도사의 모습이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었다.
진팔은 정파라 젠체하던 곤륜의 바닥이 고작 이 정도라는 사실에 욕지기를 느낌과 동시에 희열했다.
“네에. 네.”
희게 질린 곤륜의 어린 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하량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손에 쥔 주먹밥을 본인의 뒤로 숨겼다.
“괜찮다. 나는 괜찮으니 너라도 먹으렴.”
청우는 사양 없이 주먹밥을 우걱우걱 먹어 치웠다.
행여 곤륜운룡이 빼앗을까 두려운지 그의 눈치를 몇 번이나 살폈다. 제하량은 어린 사제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건지 몸을 돌린 채 애써 눈을 감았다.
‘왜 다른 놈들이 안 깨어나지?’
이 정도로 요란하면 누군가는 깨어날 만도 했다. 불현듯, 그는 스승이 이 일에 개입했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곤륜운룡의 품을 뒤지면 먹을 게 있다고 어린 도사에게 귀띔하신 걸까? 아니면-
‘하여간, 의뭉스러운 분이시라니까.’
진팔은 혀를 끌끌 찼다.
그 밤을 시작으로 곤륜의 제자, 청우는 매일같이 제 대사형의 품을 뒤졌다.
“청우 사제. 몰래 먹지 않아도 괜찮아. 여기 있으니까…….”
곤륜운룡은 도둑에게 관대하기 짝이 없었다.
진팔은 저 귀한 걸 아낌없이 내주는 곤륜운룡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드시면 안 됩니다. 드시면 안 돼요…….”
청우라는 자의 정신은 최근 들어 부쩍 불안정해진 상태였다.
마의는 원하는 실험을 어느 정도 마쳤는지 곤륜의 제자 중 제하량을 빼놓은 전부에게 강제로 마공을 익히게 했다.
‘구결을 외울 때까지 굶기고, 다 외운 후에는 강제로 마공을 익힌 자의 진기를 주입했지.’
곤륜파의 선공으로 갈고닦은 내공과 마공이 충돌하는 양상을 관찰하고 싶다는 게 그 이유였다.
몇몇은 혀를 깨물려 했으나 사람 다루는 데 익숙한 마의의 손아귀에서 그렇게 쉽게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공과 곤륜파에서 쌓은 진기가 충돌하였는지 몇 명은 폭사해서 죽었다. 육편을 치우고 피 냄새를 지우느라 포로들의 거처도 옮기게 되었다. 하필 제하량과 저 청우라는 사제는 같은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스승님이 부린 조화가 분명했다.
“괜찮네. 괜찮아…….”
곤륜운룡은 사제의 등을 몇 번 툭툭 두드려준 뒤 눈을 감고 돌아누웠다. 처음부터 건네주지 않는 것은, 훔쳐먹지 않을 때면 저 사제가 유독 불안해하기 때문이었다.
“저기 사, 사형.”
청우가 제하량을 불렀으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정말로 저는, 그러니까. 이유가 있어요. 대사형.”
“안다. 배가 고팠겠지.”
곤륜운룡은 이제 습관이 되어버린 말을 중얼거렸다.
“괜찮다. 괜찮아.”
진팔은 그 폭풍 전의 고요를 조용히 지켜봤다. 그리고 결국, 사건이 터졌다.
청우라는 어린 도사가 감옥의 벽에 머리를 박은 채 죽어 발견된 것이다.
진팔보다 앞서 돌아갔던 곤륜운룡은 울부짖고 있었다.
벽에는 도사가 피로 적은 글이 남아 있었다.
「믿지 못하시겠지만, 소제는 식탐 때문에 대사형의 식사를 탐한 게 아니었습니다.
마의가 하는 말을 엿들었습니다.
곤륜운룡이 쉬이 무너지지 않으니 음식에 약을 타겠다고 하였어요.
먹었는지 매일 확인하고 만약 남아 있다면 강제로라도 먹이라고.」
그 글귀로 진팔은 스승님이 놓은 수가 무언지 확인하게 되었다.
과연 지독한 사내였다. 무공에 재능이라곤 전혀 없는 몸으로 교주님의 신뢰를 산 존재다웠다.
「두려웠습니다.
하나 저들이 대사형을 욕보이려 드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배가 고팠습니다.」
동시에, 진팔은 두려웠다.
마의에게 있어서 저기 저 머리를 박고 죽은 곤륜의 제자와 자신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사부님이 보고 싶어요.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저도 이제 곤륜이 보입니다.
온전한 저 자신으로 얼마나 더 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곤륜이 보인다, 라.
진팔은 먼저 죽은 곤륜운룡의 동문이 무어라 했는지 떠올렸다.
「대사형은 곤륜의 대들보가 될 몸이니 부디 보중하시고 마공을 이겨내지 못한 이 나약한 사제를 용서하세요.」
푹 꺾인 제하량은 한동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절벽 끝에 버티고 선 소나무가 무참히 꺾여나간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으며 진팔은 조용히 생각했다.
스승님이 이런 상황까지 기대하고 밑그림을 그리신 걸까?
그는 범부라 도저히 스승의 진의를 알 수 없었다.
곤륜운룡의 안에 염옥의 불을 옮겨심은 날, 진팔은 마의의 부름을 받아 스승을 찾아갔다.
마의의 앞에는 곤륜의 문도 중 한 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지가 자유로웠음에도 저항 없이 몸을 내맡긴 이는 연신 중얼거렸다.
“배가……. 배가 고파.”
“배가 고픈가?”
스승님이 곤륜 문도의 턱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천마의 은총을 받았음에도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니 허기질 수밖에.”
그에게 주입된 마공은 빠른 성취를 주는 대신 허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마공치고는 안정적인 편이라 선별되었다. 그 깊은 뜻과 안배를 모르는 우둔한 정파 것들이 수혜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진팔은 미미한 안타까움마저 느꼈다.
이미 몇 날 며칠을 굶은 도사는 퀭한 눈으로 마의를 바라봤다.
“나, 나도 잘하고 싶은. 배가 고파. 아니, 고픕니다.”
“자네가 곤륜운룡처럼 순종적인 것도 아닌데 무얼 믿고 먹을 걸 준단 말인가?”
마의의 질문에 남자는 말 없이 흐느꼈다. 한참이나 훌쩍이는 이를 내버려 둔 채, 마의가 진팔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스승이 그에게 물었다.
“곤륜운룡은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비교적 잘 버티고 있습니다.”
“그만한 무골을 가진 실험체는 다시 얻기 어려우니 어떻게든 숨을 붙여놓거라.”
진팔은 스승의 어깨 너머 배가 고프다 중얼거리던 사내의 눈에 기이한 안광이 서리는 것을 발견했다.
“존명.”
분란의 씨앗을 던진 마의는 더할 나위 없이 온화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스승의 뜻을 짐작하게 된 진팔은 자리를 벗어나기 무섭게 곤륜운룡을 찾아갔다. 처음 봤을 때와 달리, 그 사내는 부쩍 작아 보였다.
“곤륜운룡.”
그대로 지나쳐 가려던 제하량은 진팔의 부름에 그의 앞에 멈춰 섰다.
“먹을 것을 받아 가야지.”
우뚝 멈춰 선 곤륜운룡의 모습은 처음 온 날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다른 이들보다 단정하고, 고아하기 짝이 없다. 다만 그의 두 눈은, 언제나 검고 먹먹하던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당신은…… 당신은 알고 있었습니까?”
그리 물어 놓고도 제하량은 스스로가 우스운지 픽 웃었다. 창백한 낯에 어우러지는 조소는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진팔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담대한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곤륜운룡의 안에 깃든 시뻘건 불길이 저를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까?”
사내는 고집스레 질문을 반복했다.
“왜, 자네에게 먹으라 준 것을 남에게 뺏기기라도 했나?”
진팔은 이죽거렸다. 고작 포로 따위에게 한순간이라도 압도당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내 스승님께 아뢰어서 자네가 먹을 것을 탐한 놈들을 매질해야겠어.”
제하량은 침묵했고, 진팔은 미리 챙겨 온 주먹밥을 내밀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제게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까?”
“일월신교에서 내리는 은총을 감히 포로 따위가 거부하겠다는 것이냐?”
“차라리 나를 천 갈래, 만 갈래 찢으십시오.”
“글쎄.”
진팔이 속삭였다.
“이미 산산조각이 난 것 같은데.”
제하량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바닥 위에 대나무 잎으로 싼 주먹밥을 건네준 진팔은 등골을 쭈뼛하게 만들던 긴장이 가시고, 그 자리를 가학적인 희열이 대신하는 것을 느꼈다.
제깟 것이 분노한들, 절망한들 자신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기는 일월신교의 한복판이었고, 놈은 역린을 빼앗긴 어린 용이었으니까.
두 번째 포로가 벽에 머리를 박고 죽은 뒤, 곤륜의 포로는 다시 한 감옥에 모였다. 감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지쳐서 기절하듯 몸을 늘어뜨린 이들 가운데, 몸을 움직여 제하량의 앞에 멈춰 서는 이가 있었다.
늦은 밤, 제하량은 제 위에 올라타 정신없이 몸을 뒤지는 사제의 손길에 눈을 떴다.
먼젓번의 경험으로 손을 내지르지 않은 제하량은 침착하게 물었다.
“사제, 이게 무슨 일인가?”
하나 상대는 이미 대화가 통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제, 이제 제 차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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