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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93화 (93/203)

93화. 상유천당 하유소항 (5)

‘밤새웠다…….’

퀭한 눈으로 일어나 앉은 예결은 마른세수했다.

자려는 시도는 했다. 그러나 눈을 붙일라치면 대사형의 말이 자꾸 귓전에서 맴돌았다.

비치적비치적 일어난 예결은 작은 분재에서 놀고 있는 뱀뱀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끝에 간질간질하게 느껴지는 뿔의 감촉에 피곤함이 조금 가셨다.

뱀뱀이의 꼬리가 예결의 새끼손가락을 휘감고 살짝 몸을 비벼왔다.

“너라도 잘 쉰 거 같아서 다행이다.”

예결의 손끝에서 금빛 전류가 슬금슬금 뱀뱀이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인간의 음식도 먹긴 하지만 역시 제 힘을 나누어줄 때 가장 충만해 보였기에 틈틈이 건네주는 중이었다. 사실 고양이 이빨처럼 뾰족하게 솟아오른 뿔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한 것도 있었다.

뱀뱀이의 애정 표현을 즐기던 예결의 귀에 복도 끝에서부터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힘을 거두어들인 예결은 문을 활짝 열며 외쳤다.

“대사형!”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제하량이 아니라 어제 소개받은 관리인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예결은 상대가 대사형이 아닌 줄 알고 한 짓이었다. 무공을 할 수 없게 된 사제가 인기척을 구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평소에 미리미리 약한 척을 해놔야지.’

“일어나셨습니까?”

예결의 호칭에 조금 당황한 듯 고개를 숙인 관리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 자네로군.”

아쉬운 척 혀를 찬 예결은 바로 질문을 던졌다.

“대사형, 그러니까 제 대인은 어디 계시지?”

관리인이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답했다.

“잠시 출타하셨습니다.”

“벌써?”

이제 겨우 아침이었다. 하면 제하량이 새벽이나 그보다 이른 시간에 장원을 나섰다는 소리였다.

“이 시간 즈음 깨어나실 거라 들어 조반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괜찮다.”

예결은 딱 잘라 거절했다. 대사형도 없는데 그다지 끼니를 챙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차라리 크레파스 맛 나는 벽곡단을 먹고 말지.’

무협의 완전식품을 떠올리며 예결은 뱀뱀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사형이 언제쯤 돌아오실지 자네는 아나?”

“제게 따로 언질을 주신 바는 없습니다.”

중년인이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인 만큼, 회포를 푸는 시간이 길어질 거라 예상할 따름입니다.”

예결은 흠,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대사형이 없는 틈을 타서 옷을 사버릴까?’

어제 옷을 사러 가기로 했지만 너무 당황하는 바람에 여독을 핑계로 일찍 침실에 처박혔다.

때마침 대사형이 자리를 비웠으니 지금 필요한 것만 딱 사두면 대사형의 주머니를 지킬 수 있으리라.

‘그리고 난 대사형이 옷 살 때 따라가야지.’

그렇게 예결은 야심 찬 결론을 내렸다.

“잠시 외출할 테니 대사형이 돌아오시면 내가 저자에 나갔다고 말씀드리게.”

“호위를 준비하겠습니다.”

삼랑을 안 데려와서 의외라 여겼는데, 결국 대사형은 여기에도 호위를 준비해놓은 모양이었다.

예결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내 기다리지.”

마침내 항주의 저자로 나서게 된 예결은 길고 긴 꼬리와 함께였다.

삼랑이 있을 때는 그녀 하나로 괜찮았는데, 지금 예결에게 따라붙은 호위는 무려 넷이나 됐다.

이제 됐다고 예결이 진저리를 치지 않았다면 자칫 말에 하인까지 거느리고 이동할 뻔했다.

“여기 옷을 파는 곳이 어디지?”

“이쪽입니다.”

호위무사 중 우두머리 격으로 보이는 사내가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그 뒤를 따르며 예결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항주는 항주이나 예결이 주로 지내던 곳은 번화가와 그 뒷골목이다 보니 부유층의 거주지역은 영 낯설었다. 비교적 깨끗하고 넓은 거리가 그랬고, 마주치는 이들의 옷차림이 그랬다.

“여기서부터는 알겠군.”

길이 확 넓어지면서부터 예결은 주변이 눈에 익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은 변두리긴 했으나 예결이 주로 활동하던 거리에 가까워진 까닭이다.

‘옷 가게가 이쪽이었지.’

예결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십시오.”

상인의 환대를 받으며 가게에 들어선 예결은 망설임 없이 옷을 몇 벌 골라냈다.

곤륜 시절 생각나라고 하얀색에 푸른 자수가 놓인 옷 한 벌, 대사형 보시기에 환해 보이라고 노란색 옷 한 벌, 또 점잖아 보여야 할 때 입을 어두운 푸른색 옷도 한 벌.

“색이 곱군.”

예결이 옷을 꼼꼼히 확인하며 꺼낸 말에 상인이 웃으며 답했다.

“항주에서 직접 염색한 천으로 지은 옷입니다. 장인들만 모여 있는 공방이다 보니 염색의 질이 좋아 얼룩이 없지요.”

“내 항주의 염색 공방이 유명하다고 듣긴 했지.”

적당히 추임새를 넣어주니 상인은 어디에서 천을 받아오는지까지 줄줄 털어놓았다. 그중에는 귀에 익은 이름의 염색 공방이 하나 끼어 있었다.

‘나중에 가볼까나.’

이만하면 되었구나 싶어 계산하려는데 등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렸다.

“그 옆의 것이 네게 잘 어울리겠구나.”

“대사형?”

완전범죄 실패.

애석함을 금치 못한 채 예결은 고개를 돌렸다. 제하량이 그곳에 서 있었다.

워낙 인파가 북적거리는 거리인 데다가 저를 둘러싼 호위도 여럿이라 일부러 오감을 죽였는데, 그 탓에 누군가가 다가온다는 걸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내가 너무 늦을 뻔했구나.”

말이야 민망하다는 투였지만 남몰래 옷을 사러 다녀오려 했던 예결을 때맞춰 찾아낸 게 즐거웠는지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예결은 그 미소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급하게 와서일까, 아니면 얄궂은 바람이라도 만난 걸까. 하량의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헝클어져 있었다.

옷차림도 평소처럼 수수하지 않고, 옛날 옛적 항주에서 만났던 그 어린 공자처럼 은근히 화려했다.

“으음. 소제는 대사형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슬금슬금 밑장빼기를 시도하자 제하량이 픽 웃었다.

“그래?”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혼자 저자로 나온 예결이 야속하면서도 그 속이 참으로 빤하게 들여다보인다.

“이 색도 네게 잘 어울리는구나. 또 이 옷도 괜찮아 보여.”

하량의 손에 색색의 비단옷이 들렸다. 화려한 수가 놓인 장포를 예결의 얼굴에 대 보고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팔에 걸쳤다.

“사, 사형.”

예결은 그의 주변을 서성거리며 하나라도 덜어내려 했으나 하량은 재주 좋게 사제의 손길을 피했다.

“여기 새겨진 용이 뱀뱀이를 닮았으니 이것도 사지.”

제하량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상인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져 있었다. 금실로 수를 놓았으니 정말 눈물 나게 비쌀 것이다.

“그, 괜찮아요. 대사형!”

두 사내가 누비기엔 좁은 가게를 가로질러 아슬아슬하고 잡힐 듯 말 듯 한 추격전이 이어졌다.

“이 색이 너와 잘 어울리니 한 벌 챙겨야겠구나.”

“아까 고른 옷이랑 같은 비단을 쓴 옷인데요?”

어떻게 한 번 쓴 핑계를 두 번 사용한단 말인가?

예결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잘 어울리는데…….”

대사형의 눈매가 처연하게 내려갔다.

예기치 못한 미인계에 힘도 없고 줏대도 없는 에스퍼는 나약해지고 말았다.

“아, 알았으니까 딱 그것까지만 챙기고 그만 계산하죠.”

울상을 지은 예결이 거의 애원했으나 제하량은 딱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다.

“너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기쁘구나.”

문득, 발을 동동 구르며 하량을 따라다니던 예결의 뇌리에 합리적인 의심이 스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부러 잡혀줄 것처럼 굴어 놓고 절묘하게 거리를 벌리는 거 맞지?’

그런 게 아니고서야 에스퍼의 운동 신경으로도 따라잡지 못하는 건 말도 안 된다.

무림인이면서 어떻게 무공 한 자락 배우지 못한 양민을 상대로 저런 수를 쓴단 말인가?

‘반칙이다. 반칙.’

그러나 하량이 아무리 치사하게 나온들 예결이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반칙 정도가 아니라 판을 엎는다고 해도 그저 좋다고 두 손 놓고 지켜보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결국 예결은 당초에 목적했던 것보다 서너 배도 넘는 옷가지에 둘러싸인 채 무림 쇼핑을 마무리했다.

“이 정도면 항주에서 체류하는 동안 부족함이 없겠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죄 때문에 옷이 늘어난 거 같은데, 맞죠?”

낡고 지친 예결의 추궁에 하량은 그저 의뭉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말 한마디 없이 그저 와닿는 깊고 다정한 시선에 예결은 무어라 더 따질 전투력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관리인이 그러는데 아침을 걸렀다지. 내 근처에 오향장육을 잘하는 요릿집을 알아봐 두었으니 거기로 가자꾸나.”

그 괘씸죄였냐고.

예결은 고개를 들어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사이 하량은 바지런하게도 호위 둘을 시켜 방금 산 옷을 장원으로 가져다 놓으라 명령했다.

아침 거른 죄를 통감한 예결은 하량을 보다가 퍼뜩 무언가를 떠올렸다.

“잠시만요.”

급하게 가게로 돌아간 예결은 무언가를 사 오더니 가게 앞의 의자를 팡팡 두드렸다.

“여기 앉아보세요.”

하량은 순순히 낡은 의자로 몸을 옮겼다. 사제가 그의 등 뒤에서 잠깐 부스럭거렸다. 무얼 하는가 하여 힐끗 쳐다보니, 예결이 입에 비단 끈을 물고 있는 게 보였다.

“음?”

예결은 말도 못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앞쪽을 향해 턱짓했다. 제하량은 순순히 고개를 돌렸다.

일단 예결은 대사형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휘휘 빗어 정돈했다.

번화가라 오가는 사람도 많고 시끄러운데 이상하게도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스치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이상하리만치 편안한 기분에 하량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빗이 없어서 다행인가.’

예결은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머리카락의 감촉에 조용히 감탄했다. 참으로 탐스럽고 긴 머리카락이었다.

드라이기도 없는 중원인 만큼, 한 번 감을 때마다 온종일 머리를 말리고 있을 대사형을 생각하니 웃음이 비식비식 흘러나오려 했다.

‘물론 열양지기 같은 거 사용하면 한 번에 마를 테지만.’

비단 끈을 놓치지 않으려 애써 실룩대는 입술을 진정시킨 예결은 나름 솜씨를 부려 제하량의 머리를 묶었다.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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