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상유천당 하유소항 (6)
심술이 조금 나는 바람에 큼지막한 리본을 묶어볼까 싶긴 했으나, 정작 시도해보니 지나치게 잘 어울리는 바람에 포기했다.
아쉬움을 삼키며 한 발짝 물러난 예결은 자신의 작품을 감상했다.
제하량의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묶여 있었다. 이만하면 잘 해낸 것 같았다.
“다 되었습니다.”
“목덜미가 시원하구나. 고맙다.”
자리에서 일어난 하량이 예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이 그의 손아귀에서 마구 헝클어지는데, 예결은 그저 좋아서 웃다가 하량의 얼굴을 확인했다.
쑥스러움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풋풋한 청년 같았다.
그 사실을 숨기려 일부러 예결의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은 것마저도 싱그러운 풋내가 난다. 그저 이 모든 상황이 어색하고 또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내를 보며, 예결은 무심코 진심의 한 조각을 내뱉었다.
“대사형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요.”
당신에게서는 내가 아는 가장 높은 산봉우리의, 영원히 녹지 않는 눈의 향기가 난다.
스무 해 동안, 예결은 제하량을 이루는 모든 것을 그리워했다.
정작 나고 자란 곳은 한 번도 떠올려본 적 없는 그에게 있어서 하량만이 향수(鄕愁)가 되었다.
“그래?”
하량의 시선이 저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사제를 담았다.
“내게서만?”
“……대사형에게서만.”
그 답에 하량은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지금보다 조금 이른 때에 들은 말이 떠올랐다.
‘아수라혈강시의 오감이 처, 천마신공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원치도 않는 것들을 참으로 많이도 가진 인생이었다.
모친의 애정, 무의 재능, 사제의 희생, 동문의 경애, 스승의 헌신, 살아남았기에 얻은 부귀와 권세…….
그러나 이건.
너는.
‘가지려 한 적도 없거니와…….’
하량은 손을 뻗어 사제의 뺨을 어루만졌다.
온기가 느껴졌다. 살아 있었다.
‘가져서도 안 되는 것인데.’
입 안이 바싹 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결이 제게 주어진 것이라면, 불운과 불행이 거듭하여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면.
“대사형?”
길어지는 침묵에 예결이 그를 불렀다.
머릿속을 들쑤시던 저열한 기쁨에서 헤어 나온 하량이 입술을 달싹였다.
“탐이 나더냐?”
“종종, 그럴 때가 있긴 하지요.”
예결은 부인하지 않고 배시시 웃었다.
“그럼 네가 가지렴.”
선뜻 꺼낸 말에 예결의 두 눈이 커졌다.
“예? 대사형에게서만 나는 향을 어떻게 가져요?”
“원할 때마다 와서 취하면 되지 않겠니.”
하량은 사제의 손을 끌어다가 제 머리카락을 쥐여주었다.
예결은 놀라서 동글동글해진 눈을 하고도 손을 움찔거렸다. 만지고 싶어 어쩔 줄 모르면서도 이래도 되나, 하고 심란해하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이 퍽 생생한 까닭에 하량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하량의 가장 오래된 심마가 말간 낯을 한 채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자아가 없기는 무슨.’
어차피 놈의 가설 따윈 엉터리였다.
그 스승인 마의조차 아수라혈강시를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니 어쩌면, 어쩌면 그의 사제도 아수라혈강시 따위가 아니라 그저 운 좋게 살아남아 자신에게로 돌아온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네게 유일한 것이라면. 결아.’
하량은 전부 그에게 줄 것이다.
“내 가진 것 중 네게 주지 못할 것이 없단다.”
설령 그것이 마지막 살 한 점, 최후의 피 한 방울일지라도, 그것이 사제의 허기를 달래고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면 무엇이 아깝겠는가?
“얼마든지 청하고, 네가 원하는 게 무어든 다 가져가렴.”
부러 덜어낸 진심이 혀끝에 맴돌았다. 그러나 하량은 이를 가까스로 삼켰다.
아직은 너무 이르다. 아직은.
그는 사제가 아무것도 모르길 원했다.
예결의 무지가 벌어다 준 유예 동안 무얼 해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 찰나의 말미조차 절실했다.
“너무 욕심내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이미 오늘 산 옷만으로도 장원이 다 터져 나가겠어요.”
예결은 하량의 속을 모르기에 제 시꺼먼 뱃속부터 숨기기에 급급했다.
“장원이야 하나 더 사들이면 그만이지.”
“안 돼요.”
“사들이는 게 싫다면 역시 새로 하나 지을까?”
연신 예결을 놀려대면서도 하량은 소원했다.
어린 사제가 이 하염없는 맹목의 근원을 모르기를.
그래서 오늘과 같은 날이 하루라도 더 이어지기를.
“대사형!”
알면서 모르는 척 능글맞게 구는 하량에게 예결이 발을 굴렀다.
하하, 하고 크게 웃는 소리가 청량하기 그지없었다.
달아날 생각도 없으면서 도망치듯 걸음을 옮기는 사내의 걸음은 구름을 희롱하며 노니는 용 같았다.
예결이 묶어준 청푸른 비단 끈이 하량의 등 뒤로 경쾌하게 나부꼈다.
어린아이 장난 같은 추격전 끝에 제하량은 예결을 미리 말해준 요릿집으로 데려갔다.
오향장육이 유명하다더니 과연 맛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항주에서도 일절로 손꼽히는 동파육에 광동에서 왔다는 숙수가 내어놓은 감칠맛 나는 나미계도 예결의 혀를 즐겁게 했다.
보통 사람은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예결에게는 옆에 곱게 앉아 있는 대사형이 더 효과가 좋았다.
“아, 대사형 옷 못 샀다.”
차를 홀짝이던 예결은 퍼뜩 떠오른 생각에 서글픈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옷 가게에서는 제하량을 말리느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도 못했다.
‘이건 대사형 때문이다.’
사람이 딱 봤을 때, 뭔가 부족함이 있어야 채워 넣어야겠다는 생각도 하는데 등 뒤에서 나타난 제하량은 지나치게 완벽했다. 미남이라는 거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항주의 하늘 아래에서 본 하량은 어딘지 모르게 싱그러웠다.
‘어릴 적 그를 여기에서 본 기억 때문이겠지.’
“내 옷?”
사제가 낙담하는 기색에 시선을 준 하량이 답했다.
“사제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단다. 내 입고 다닐 것은 우리가 머무르는 장원에도 갖추어져 있으니까.”
금일 대사형이 입고 있던 새 옷이 어디에서 나온 건지 알게 된 예결의 입술이 아쉬움에 벌어졌다.
“하지만……. 항주까지 왔는데.”
기왕이면 직접 골라주고 싶었다.
부유한 고관대작이 입는 비단옷, 성인 남성이 입는 장포, 무림인이 즐겨 입는 무복이라든가. 원령포는 목이 조금 갑갑해 보일 것 같으니 빼고, 호복도 잘 어울릴 터다.
‘수트…… 수트를 입혀보고 싶다.’
하늘이 이 세상에 제하량을 태어나게 했으면서 테일러는 내리지 않은 건 너무도 부당한 일이었다.
“여기 괜찮은 염색 공방도 많아서 천이 좋아요.”
예결은 애절한 음성으로 하량을 설득했다.
“염색 공방이라, 아는 곳이 있느냐?”
하량의 질문에 멈칫한 예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에 조금, 일손을 거들던 곳이 있긴 하지요.”
예결은 상인의 입에서 오르내리던 이름을 떠올렸다.
선예공방.
뒷골목에 가까운 염색 공방 중 하나였다. 예결은 짝귀나 독사를 피해 그곳으로 숨어들곤 했다.
염색 공방의 일꾼은 예결이 거기 숨어 있다는 걸 알았으나 적당히 눈감아줬다.
일종의 거래였다. 예결은 사파의 무인을 피해 숨을 장소가 필요했고, 저들은 돈 한 푼 안 줘도 부릴 수 있는 아이를 눈감아주는 것으로 노동력을 갈음했다.
어릴 적부터 영악했던 예결은 그 정도면 공평한 거래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떤 늙은 일꾼 한 명은, 가끔 남은 음식이라며 예결에게 먹을 걸 챙겨줄 때가 있었다.
저도 모르게 오늘은 안 주냐고 묻게 될 거 같아서 예결은 노인에게 변변찮은 대화 한 번 청하지 못했다.
너무 기대하면 안 된다.
타인의 눈길 한 번, 손짓 한 번에 정을 붙이게 되면 정작 괴로운 건 예결이었다.
동정은 정말 쉽게 주어지는 만큼, 쉽게 거두어지는 까닭이다.
“가보고 싶진 않더냐?”
“스무 해나 흘렀으니까요.”
예결에게 먹을 걸 나눠주던 노인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초연한 속내를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낸 예결은 아차, 싶어 덧붙였다.
“항주까지 왔는데, 가고 싶은 곳도, 만나고픈 사람도 없다니. 좀 이상하지요?”
보통 사람은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에 애착을 드러내는데, 항주가 고향으로 느껴지지 않다 보니 깜빡했다.
“이상할 리가.”
하량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나 역시도 고향을 그다지 그리워하지 않는단다.”
“아…….”
“몰랐는데, 사제와 내게 공통점이 있었구나.”
하량이 선하게 웃어 보였다. 슬쩍 눈치를 살피던 예결은 불안함이 자취를 감추는 걸 느꼈다.
‘십년감수했는데, 이게 또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그래도 소식이 궁금한 사람은 있긴 하네요.”
예결의 말에 하량이 그린 듯한 미소를 걸친 채 물었다.
“그게 누구지?”
“염색 공방이 하나 있는데, 제가 어릴 적에 종종 거기에서 일을 거들었거든요. 그때 밥을 나눠주던 노인분이 계셨어요.”
“……그래?”
어쩐지 대사형의 음성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이미 돌아가셨을 것 같지만,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으면 향이라도 올릴까 싶어서요. 괜찮을까요?”
“나도 함께 가자.”
“예?”
“사제가 어릴 적에 돌봐주신 분이라면 이 우형도 감사를 전하고 싶어 그런다.”
“그럼. 일단 공방으로 가요.”
공방 주인이 뭘 알고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오래 일한 일꾼인 만큼, 그를 기억하는 염색공이 몇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요릿집을 나선 예결은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하량은 워낙 훤칠하다 보니 예결과 속도를 맞추기 위해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그게 또 배부른 맹수 같아서 신기했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항주의 골목에서도 예결은 어렵지 않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어떤 시절의 기억은 머릿속 깊이 남는다더니.’
상념을 털어내며 예결은 설명했다.
“항주가 워낙 번화한 도시다 보니 공방은 저자에서 좀 떨어져 있어요. 물가에 가까워야 하는데 또 땅값은 싼 데에 지어야 하니까 뒷골목하고도 가깝죠.”
“그래?”
“네. 선예공방은 제가 지내던 곳과 가까워서 자주 가게 되었어요. 근데…….”
뭐라 말하려던 예결은 멈칫했다. 목표로 했던 염색 공방이 때마침 눈에 들어온 까닭이다.
한때 세월을 입어 고풍스럽던 현판은 살짝 기울어져 있었고, 문도 한 짝이 완전히 부서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익숙한 난장판의 향기였다.
“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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