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95화 (95/203)

95화. 상유천당 하유소항 (7)

“엉망이군.”

하량의 말대로였다. 내부는 온통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다.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일꾼들이 쥐면 구겨질세라 고이고이 다루던 직물이 바닥에 뒹굴었다. 더러는 북북 찢어져 있었고 그 위로 흙 발자국이 어지럽게 뒤엉킨 채였다.

염색할 때 쓰는 물도 아무렇게나 섞여 탁해져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비가 한 번 내리기라도 했는지 젖었다가 마른 천에서 나는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비강을 간질였다.

군데군데 말라붙은 핏자국을 발견한 예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 정을 주지 않았다지만 어린 시절 그나마 몸을 피할 수 있었던 공간이 이리된 걸 보니 속이 편치는 않았다.

본디 낡았을지언정 늘 정돈되어 있던 공방이었다. 비록 사람들이 쓰는 공간은 궁색한 편이었으나 그들의 손끝에서 태어나는 색은 항주에서도 손꼽히게 찬란하고 화려했다.

“원래 이런 곳은 아닌데…….”

예결은 말꼬리를 흐렸다.

금으로 된 대들보나 대리석 주춧돌 따위를 기대하고 온 것은 아니라지만 이건 명백하게도 파괴가 지나간 현장이다.

“선객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제하량의 명료한 정리에 예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이 참상을 눈에 담았다.

대단한 걸 기대하고 온 건 아니라지만 정작 어린 시절 알았던 장소가 완전히 무너진 것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맥이 빠졌다.

“돌아가요.”

“음?”

예결의 단호한 말에 하량이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여기에 있다가 험한 일에 휘말릴지도 모르니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행여라도 사형이 알아듣지 못했나 싶어 또박또박 말한 예결은 망설임 없이 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그가 채 등을 돌리기도 전에 하량은 예결을 붙들었다.

“네게 도움을 주었다던 노인을 찾고 싶지 않았니?”

“하지만, 나름 번듯한 장사까지 하고 있던 염색 공방이 이 지경이 된 건 분명 사파가 얽힌 일일 거예요.”

전생에 항주에서 유년기를 보낸 예결은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돈을 빌렸는데 안 갚았다면 업장을 이렇게까지 망쳐놓지는 않거든요. 이자만 받아도 본전은 충분히 챙길 텐데 채무자가 돈 벌 장사 밑천을 건드리는 건 일반적이지 않아요.”

바닥을 나뒹구는 값비싼 비단을 본 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사파 놈들이 칼질 외엔 모르는 멍청이라 여기는 이도 더러 있지만 그들은 양민의 고혈을 빨아들이는 일에 최적화된 존재였다.

비단이 있다면 들고 가서 팔아치우는 자들이 굳이 흙발로 짓밟고 못 쓰게 만들었다는 건 그 이상의 수익을 기대할 때뿐이다.

‘우리가 여기 있는 걸 누가 보기 전에 나가야 한다.’

항주 밑바닥의 스페셜리스트 문예결은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는 하량의 옷자락을 붙들고 잡아끌었다. 그러나 대사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흐음…….”

“대사형? 가야 한다니까요?”

예결이 기억하던 시절, 항주 뒷골목에 터를 잡았던 짝귀나 독사가 살아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는다. 다만 짝귀와 독사의 전에는 혈부가 있었고 그전에는 흑견이라는 자가 있었듯이, 그들이 사라졌다고 해도 항주 사파의 계보는 이어졌을 거다.

하나같이 다른 인간들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 모두가 비슷비슷하게 잔인하다.

“하나만 묻자꾸나.”

하량이 여상한 투로 입을 열었다.

폐허가 된 풍광을 배경처럼 두르고 있음에도 긴장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태도였다.

“여전히 그 늙은 일꾼을 찾고 싶으니?”

예결은 열심히 설명했다.

“제 의사는 상관없이, 이미 이 공방은 끝난 거예요. 설령 황 노야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엮이지 않는 게 좋아요.”

그러면서도 예결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인기척을 살폈다. 하량이 묘한 표정으로 예결을 내려다보더니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내 저열한 자들이 여기에 다녀갔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게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할 수는 없단다.”

예결은 눈을 끔벅였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놀랍게도, 예결은 제하량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결은 당혹을 숨기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고작 향 한 번 올리고 말 일인걸요. 대단한 숙원도 아니고 대사형이 물어보지 않으셨다면 기억해 내지도 못했을 텐데, 무엇 하러 번거롭고 험한 일에 얽히지요?”

슬쩍 물러서던 예결을 하량이 가볍게 안아 올렸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하량을 마주 끌어안은 예결은 저를 바라보는 깊고 검은 눈에 사로잡혔다.

“결아, 그건 말이다.”

하량은 예결의 샛노란 소매에 살짝 뺨을 가져다 댔다. 옷 가게에서 나오기 전 갈아입은 새 옷이었다.

“곱고 예쁜 옷을 입혀주는 것만이 사치가 아니기 때문이란다.”

나직한 속삭임이 전하는 문장은 명징하지 않고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예결은 신탁을 받드는 신관처럼 하량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내 하나뿐인 사제가 무얼 원하든, 무얼 하고 싶든 전부 이루었으면 좋겠구나.”

“전부요?”

확인하듯 예결이 건넨 질문에 하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아주 사소한 거라도?”

소리를 내 말하진 않아도 예결의 뇌리엔 여러 욕망이 스쳐 지나갔다.

“그럼.”

낮은 웃음소리가 예결의 귓가를 스쳤다.

“이 우형은 네가 무얼 원하든 능히 이루어줄 재간이 있으니…….”

예결은 숨죽여 하량의 등을 끌어안았다.

“어디 한번 믿고 맡겨주지 않으련?”

대사형의 어깨에 턱을 괸 예결은 때마침 저 아래, 비단 옷자락을 적신 탁한 색의 얼룩을 발견했다.

그가 저를 안고 지나온 자리를 따라 회색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시선으로 하량의 자취를 더듬어 올라간 예결은 염색약이 쏟아져 생긴 웅덩이를 발견했다.

‘대사형이 저걸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고…….’

자신이 공방에서 나서려고 걸음을 옮길 때 발을 디딜 뻔한 자리가 아니었을까.

롤러코스터를 탄 양 머리가 혼란스럽고 속이 메슥거렸다. 동시에 심장이 요란하게도 뛰었다.

하량은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책상 위에 예결을 앉혀주더니 한 발짝 물러나 그를 바라봤다.

재촉도, 설득도 더는 없었다. 벗어남도 물러섬도 허락하지 않는, 참으로 난폭한 다정이 예결을 옭아맬 뿐이다.

아무리 그라도 지금만큼은 대사형의 시선을 마주 보는 게 힘겨웠다.

‘안대는 이럴 때 필요한 거 아닌가.’

흑귀에게 품은 야속함을 괜히 곱씹으며 예결은 눈을 아래로 내렸다. 하량이 새로 장만해준 비단옷이 보였다.

조금 구겨진 것 외에는 반드르르하고 고운 색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황 노야는 그렇게 상냥한 사람도 아니었어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반드시 향을 올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는 길에 떠오른 것뿐이지.”

입술을 꾹 깨문 예결은 이쯤 하량이 그럼 그만두고 돌아가자는 말을 하지 않을까, 하고 애절하게 대사형을 바라봤다.

그러나 하량은 모호한 미소만 지을 뿐, 그가 바라는 말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대사형이 그래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한번 찾아봐도 나쁘진 않을 거 같아요.”

“잘했다.”

하량의 손길이 예결의 머리를 헤집어놨다.

괜히 쑥스러운 기분에 헝클어진 머리를 부산스레 정돈한 예결은 그답지 않게 새침한 투로 물었다.

“무엇이요?”

“사제가 나를 믿어주기로 하지 않았나.”

하량은 무척 기뻐 보였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설득을 해치운 사내의 표정이라기엔 순박하기 짝이 없었다.

“저에겐 대사형 외에는, 아무도.”

예결은 그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아무도 없어요.”

흑귀의 존재를 빤히 알고 있을 대사형이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하든 상관없었다.

‘정을 주는 게 아니라도 몸을 내주는 사내가 있으면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시려나? 아니면……. 흑귀가 그저 몸뿐인 관계라는 사실에 화를 내시려나.’

온전한 거짓도, 진실도 될 수 없을 고백에 하량은 낮아진 음성으로 답했다.

“내 어찌 모르겠어.”

무엇인지 규명할 수 없는 시커먼 불길이 하량의 속을 지져놓았다. 그러나 아직은 사제가 이 관계의 반대편 끝을 놓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사실에 만족할 수 있었다.

“내게도 너뿐인 것을.”

아직은.

***

하량과 나란히 걸어 장원으로 돌아온 예결의 뺨은 기분 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런데 공방을 뒤집어놓은 사파부터 찾아내야 할 텐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먼저, 씻고 식사를 한 뒤에 설명해주마.”

가이드의 말을 잘 듣는 새 나라의 에스퍼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에 조금 몸이 달긴 했으나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머리도 꼼꼼히 말리고 식사까지 마친 후에야 하량은 차를 내오라 이른 뒤 주변을 물렸다.

예결은 입술을 축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대사형을 바라봤다. 하량은 평소처럼 고아하게 다향을 즐기다가 예결에게 시선을 건넸다.

너무 숨넘어갈 것처럼 굴었나 싶어 민망함에 헤헤 웃자 하량이 찻잔을 내려놓더니 넌지시 말했다.

“읽어보렴.”

접시 아래에 교묘하게 숨겨진 종이가 보였다. 예결은 침음했다.

‘하여간 대사형이 근처에 있으면 자꾸 시야가 좁아진다니까.’

그 좋은 오감으로 가이드 탐구생활을 하고 있으니 자꾸만 빈틈이 생긴다.

예결은 그 낯선 방심마저도 기꺼웠다. 제하량이 아니었다면 방심할 여유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기실, 그로 말미암은 모든 것이 예결에게는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그새 염색 공방 조사를 시키셨네요.”

하량의 수완에 나직하게 감탄한 예결은 쪽지의 내용을 읽어내렸다.

예상외로 선예공방의 몰락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것은 한 상인이었다. 낙양의 높으신 분과 연줄이 있다는 그 상인은 항주에서도 유명한 선예공방의 염색 비법을 알아내려 했다. 그 방편으로 공방을 사들이려 했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사파를 고용해 난장을 부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상인이 고용한 적혈파라는 낯익은 이름에 예결은 쓰게 웃고는 종이를 뒤로 넘겼다. 이 일을 벌인 주체인 상인의 용모파기가 그려져 있었다.

“어라……?”

이거, 아는 얼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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