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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96화 (96/203)

96화. 상유천당 하유소항 (8)

“짝귀?”

예결은 제 눈을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예결이 기억하던 그 비쩍 마른 사파의 낭인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유롭고 투실투실해 보였다. 이만하면 어디 가서 대인 소리를 듣고 살 것 같은 풍모가 낯설기만 했다.

이목구비만으로 알아본 건 아니었다. 중원의 용모파기는 사진이 아니라 그리 섬세한 디테일까지 챙기진 않는다. 다만 몽타주를 그릴 때처럼 주요한 특징을 잡아냈는데, 이 상인은 오른쪽 귀가 없었고 그나마 남아 있는 왼쪽 귀의 귓불에는 큼지막한 복점이 하나 찍혀 있었다.

“내가 운이 좋은 건 다 이 귀 덕분이라니까. 복점이 없는 귀가 잘리고 복점이 있는 귀가 남은 건 내게 천운이 있다는 증거지.”

으스대는 사내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예결이 이를 기억하고 있는 건 구걸에 실패하고 돌아온 날이면 으레 듣게 되는 협박 때문이다.

“너도 귀 한 짝 잘라줄까? 그럼 불쌍해서라도 지나가는 연놈들이 돈을 줄 거 아니야. 어쩌면 나처럼 운이 좋아질 수도 있고.”

칼날로 귓가를 툭툭 두드리며 히죽히죽 웃던 짝귀의 협박에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더러는 날에 베이는 아이도 있었는데, 그렇게 생긴 상처에서 난 열에 시달리다가 죽기도 했다.

일이 그렇게 되어도 짝귀나 독사는 슬퍼하거나 후회하지 않았다. 그저 앵벌이 시킬 녀석이 하나 줄었다고 혀를 차며 나머지 아이들을 닦달할 뿐이었다.

‘천운인지 뭔지, 개소리라고 여겼는데 비슷한 게 있긴 했나 보네.’

생존율도 더럽게 낮은 중원에서 사파의 말단이 살아남아 상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게 의아하다 못해 놀랍기까지 했다.

돈 세는 거 하나는 끝내주게 잘했지만 어디 상인이 돈 세는 재주만으로 이만큼 성공할 수 있던가.

“결아?”

하량은 예결의 시선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모습을 가만 지켜보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가까스로 용모파기에서 눈을 뗀 예결이 하량에게 말했다.

“이 상인, 제가 아는 사람 같아요.”

예결은 확신을 담아 재차 말했다.

“아니, 아는 사람이에요.”

하량은 사제의 시선에서 모종의 감정을 읽어냈다. 황 노야라는 일꾼 이야기할 때보다 더 열기가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용모파기에서도 두드러지는 특징에 예결의 입에서 흘러나온 호칭이 더해지니 이 사내가 사제의 무엇인지 파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짝귀라.’

오래도록 그를 따라다닌 환시와 환청 속에서 예결이 언급하던 악당의 등장에 하량의 입매가 매끄러운 호선을 그려냈다.

이른 때에 진영이 말했듯, 눈앞의 사제가 진짜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었다. 그러나 하량은 진실의 증명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십수 년을 건너뛰어 마교의 비전으로 완성된 괴물이든, 마도육가나 정파에서 하량의 내밀한 사정을 캐어 만들어낸 첩자든, 심지어는 천지신명이 하량을 가엾게 여겨 돌려준 스무 해 전의 그 사제라 한들 다 무슨 상관이겠는가.

오로지 그만이, 눈앞의 예결만이 제 광증의 현현(顯現)일진대.

“그에게도 향을 바치길 원하니?”

예결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중원 정서에서 벗어난 채 스무 해를 살아서 그런지 얼마나 솔직해져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보다는, 위패에 침을 뱉어주고 싶네요.”

‘이 정도면 괜찮겠지?’

직접 죽여 버리겠다는 말은 생략하고 ‘불미스러운’ 사고로 죽여버리고 싶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은원이 얽히면 사람 목숨 두서넛은 가볍게 날아가는 중원인 만큼, 이 정도로 소극적인 분노는 괜찮으리라.

“분명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거란다.”

하량의 손이 다정하게 예결의 뺨을 감쌌다.

예결은 그 온기에 눈을 감고 가만히 얼굴을 기대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설득 성공?’

아니었다.

대충 뭉개고 청해로 돌아가 후일을 기약할 작정이었던 예결과 달리, 하량은 쇠뿔도 단김에 빼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하량은 예결의 청대로 그날은 순순히 장원에 돌아갔다. 일찍 자러 가라며 예결의 등을 떠민 대사형은 관리인을 붙잡고 대화를 나누더니, 다음 날 아침 식사 때 예결에게 선언했다.

“오늘 시간이 괜찮으니?”

“예? 당연하죠.”

전생의 고향 비슷한 것에 돌아왔다곤 하나 만날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대사형이 시간이 되냐고 물어보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장칠이란 자가 내일 만날 수 있다고 하는구나. 때마침 항주에 와 있다니 잘 되었지.”

“내일이요?”

장칠은 짝귀의 이름이었다. 예결도 그가 이름이 있는 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무림명을 얻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도 아니라 늘상 짝귀라는 별명으로만 불리던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니 근데, 약속은 내일이라 하셨으면서 왜 오늘 시간이 괜찮은지를 물어보신담?’

예결은 의아함을 느꼈으나 괜히 제하량의 실수를 지적하고 싶지 않아 다른 화제를 입에 담았다.

“아무리 어제 청을 넣었다지만 이렇게 빨리 만날 수 있다니 놀랍네요.”

“청해상단은 아무래도 중원 서부에 치우쳐져 있지 않니? 동부의 물건을 살 때 중개 역할을 해줄 상단을 찾는다니까 당장 오늘이라도 만날 수 있다고 하여 그러자고 했단다.”

고작 그 정도 언질에 짝귀가 달려온다고?

청해상단의 이름값이 크다고 생각하면서도, 예결은 하량이 대뜸 일을 벌이는 스케일에 놀라고 말았다.

‘아무래도 직진은 협객의 조건이긴 하지…….’

불의를 마주치면 물러서지 않고 들이박던 곤륜운룡은 스무 해가 지나서도 여전히 그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알겠어요.”

예결은 두 손 놓고 대사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운전면허를 따기도 전에 중원으로 넘어온 마당에 브레이크 없이 액셀만 남은 차를 운전할 자신이 없었다.

사실, 그는 퍽 즐거워 보였다.

가이드가 저렇게 즐거워하니 예결도 기분이 좋았다. 뭐라도 도울 게 없나 싶어 그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나요?”

“물론.”

하량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네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란다. 하지만…… 정녕 괜찮겠느냐?”

어쩐지 뭉클해진 예결은 가슴까지 두드리며 호언장담했다.

“맡겨주세요.”

하량은 그 말에 감동하였는지 예결의 손을 붙들었다. 맞닿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예결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실로 든든하구나.”

그리고……. 순진한 에스퍼는 사기당했다.

“하…….”

마른세수한 예결의 등 뒤로 하량의 목소리가 들렸다.

“결아?”

그가 걱정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역시 힘든 모양이구나. 이 우형이 너무 부담을 주었어…….”

“아니, 아니에요!”

예결은 두 손을 내젓다가 스륵 흘러내리는 옷감을 붙잡았다. 내일 장칠을 만날 때 번듯한 상단주로 보여야 한다는 이유로 하량은 새 옷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란다.’

‘정녕 괜찮겠느냐?’

거기에 심각한 표정까지 더해진 바람에 홀라당 넘어간 예결은 발을 뺄 수 없었다. 에스퍼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가이드에게 약속해놓고 채 오 분이 지나기도 전에 말을 뒤집는단 말인가?

예결이 결정을 내리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도착한 상인들이 옷감을 부려 놓았다. 이를 꼼꼼히 살핀 제하량은 이염이 된 비단을 한 필이라도 발견하면 그 상인을 바로 돌려보냈다.

그는 천부터 직접 골라서 재단을 맡길 작정이었다.

‘왠지 예전에 한 번 이랬던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예결의 앞에는 한국에서 쓰던 거울보다는 부옇기 그지없어도 이 시대에는 보기 드문 크기의 면경이 놓여 있었다.

중원 서쪽 끝에서 활동하는 대사형이 자주 오지도 않는 항주에 이만한 물건이 마련되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어깨는 거의 색동저고리처럼 색색의 천으로 뒤덮여 있었고 다른 쪽에는 장인이 매달려 치수를 재고 있었다.

시키는 대로 몸을 맡기던 예결은 하량이 돌아서자 황급히 울상을 지워냈다.

“머리카락 색이 옅어서 그런지 역시 화사한 천이 잘 어울리는구나.”

하량은 새 천을 들어 올리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사내 옷을 만드는 천은 어두운 편이라 아쉬웠는데. 이제 좀 성에 차.”

“어제 산 옷도 많은데 왜 또 맞춰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개중에는 하량이 원하는 화사한 옷도 있었기에 예결은 억울해졌다.

“중원 서부에서 내로라하는 상단의 주인이 이미 만들어진 옷을 사 입으면 수상하지 않겠니?”

수상한가?

예결이 아는 자는 장칠이 아니라 짝귀였고, 까닭에 그의 미감이나 눈썰미에는 심각한 의혹을 품고 있었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의 그가 항주의 염색 공방을 노리는 걸 보면 분명 어떤 천이 어떤 옷에 사용되는지 정도는 알겠지. 고관대작이 사 가는 비단과 양민이 끊어 쓰는 천이 다른 걸 알아야 누구에게 무엇을 팔지 결정할 수 있으니까.”

그리 말하면서도 성큼 다가온 제하량이 예결의 몸에 선홍색 비단을 가져다 댔다. 바투 다가온 호흡에서조차 겨울의 향을 느낀다.

저를 신중히 살피는 시선에 예결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대사형이 지척에 있는 일은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매번 처음처럼 긴장하고 만다. 저 사내와 몸까지 섞었음에도 그랬다. 아니, 오히려 제하량이 자신을 얼마나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이토록 의식하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가이딩은 충분한데…….’

흑귀와 몸도 섞은 데다가 항주에 와서는 내내 하량과 함께였다. 뱀뱀이 먹이 주듯 힘을 불어넣은 것 외엔 정전기 한 번 일으킨 적 없으니 가이딩은 차고도 넘쳤다.

그러나 가이드가 달랠 수 있는 건 육신의 열기가 고작이라서일까? 머리에 지펴진 불길은 도무지 잦아들지 않는다.

“함정에는 공을 들여야 하지 않겠니?”

꼼꼼히 살핀 뒤에야 손을 물린 하량이 웃었다.

“그래야 마지막 순간에 속아 넘어간 게 억울하지 않겠지.”

웃음과 함께 흘려보낸 말에는 서늘한 여운이 남았다.

“그러네요.”

어쩐지 긴장이 탁 풀린 예결이 중얼거렸다.

“정말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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