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상유천당 하유소항 (9)
항주에서도 이름난 요릿집에 자리 잡은 장칠은 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려다가 내려놨다.
자꾸만 손에 땀이 차는 바람에 잔이 미끄러지려 했기 때문이다.
심호흡한 장칠은 손바닥을 무릎에 닦아냈다. 특별히 준비하라 이른 비싼 차의 향을 맡으며 침착해지려 애썼지만 영 쉽지 않았다.
‘이 장칠이, 항주 밑바닥에서도 남의 뒤나 닦아주던 내가 중원의 서부를 아우르는 거대 상단의 주인과 만나게 되다니!’
구질구질한 인생은 날개라도 단 듯 하늘 높이 오르고 있었다.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았음에도 고양감이 뇌리를 적셨다.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장칠은 적혈파의 무인으로 지내던 시절 알게 된 하오문도를 만났다. 항상 뭐라도 얻어먹을 게 있을까 하고 장칠의 주위를 맴돌던 사내가 그를 본체만체하고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뭔가 수상하다.
낭인 시절부터 자신을 먹여 살린 감이 반응하고 있었다.
장칠은 하오문도를 집요하게 따라갔다. 술도 먹이고 돈도 한 움큼 찔러준 후에야 하오문도는 입을 열었다.
“거…… 청해상단의 주인이 항주에 와 있다더군.”
규모는 관계없이 내실이 튼튼하고 항주를 주지역으로 활동하며 비단을 취급하는 상단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에 장칠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공방을 손에 넣을 때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머잖아 낙양의 대인께 금전도 바쳐야 할 텐데…….’
지금 장칠은 돈 들어올 구석이 절실했다.
비단을 독점하는 건 그의 자본만으론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살짝 시선을 돌린 장칠은 염색 공방을 발견했다. 어떤 색이 얼마나 선명하게 뽑히느냐에 따라 같은 비단이라도 가격은 천정부지로 달라졌다.
사파를 동원해 염색 공방을 하나둘씩 집어삼키다 보니 호주머니가 홀쭉해졌다. 기대 수익이 적잖기에 망정이지, 이걸 다 소화하기 전까진 쪼들릴 예정이었다.
‘그래도 낭인 시절보다는 낫지.’
길 가다가 칼을 맞을 일도 적고, 들이는 수고에 비해 돈도 많이 번다. 예전처럼 원한을 몰고 다니긴 해도 든든한 호위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대인 소리를 들으며 떵떵거리고 산다. 장칠은 결코 짝귀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귓불의 복점을 만지작거리며 장칠은 누군가를 떠올렸다.
‘독사, 그놈이 뒈져서 아쉽군.’
만일 그가 아직 적혈파에 있었다면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일꾼들을 내쫓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구 할 이상의 사파 낭인이 으레 그러하듯, 독사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 꼴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지 않았다면 짝귀의 인생도 퍽 달라졌으리라.
그러나 장칠이 새 감상에 사로잡히기도 전에,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퍼뜩 고개를 든 장칠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서쪽에서 온 귀인을 맞이했다.
“제가 바로 오삼상단을 이끄는 장칠입니다. 이렇게 청해상단의 대인을 만나 뵙게 되어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장칠은 빠르게 청해상단주와 그 동행을 살폈다.
한 명은 비단이 무색할 정도로 매끄럽고 긴 흑발을 단정하게 묶은 사내였고 다른 한 명은 눈에 띄게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한 청년이었다.
흑발의 사내는 빙기옥골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의 미남자였다. 그러나 냉담하기 짝이 없는 낯에서 풍겨오는 은근한 위압감은 이를 감히 즐기거나 거론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상인이 된 후에는 수련을 게을리했다지만 본디 칼밥을 먹던 장칠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태양혈이 불거지진 않았으니 무림인은 아니다. 그럼 순전히 기세만으로 산전수전 다 겪어본 나를 놀라게 하다니, 역시 청해상단주 정도 되는 인물은 비범하군.’
반면 갈색 머리카락의 반반한 청년은 어딘지 모르게 앳된 분위기를 풍겼다. 어지간한 무림인도 하지 않는 짧은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으나 그뿐이다.
이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모르는지 조금 들뜬 채, 옆에 선 사내가 두렵지도 않은지 스스럼없이 몸을 붙인다. 사내답지 않게 호리호리한 몸도 그렇고, 영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 같았다.
“청해상단의 주인이 젊은 나이라 듣긴 했으나 헌앙하신 분일 줄은 몰랐습니다.”
장칠은 호탕하게 웃으며 흑발의 사내에게 인사를 건넸다.
“뭔가 착각한 모양이군요.”
제하량은 냉랭한 투로 답했다.
“저는 총관일 뿐, 청해상단의 주인은 이분이십니다.”
장칠의 눈이 커졌다. 저 솜털도 안 가신 보송보송한 애송이가 청해상단의 주인이라고?
“인사가 늦는군.”
노골적으로 혀를 차는 어린놈의 태도에 장칠은 땀을 뻘뻘 흘리며 손바닥을 비볐다.
“허어……. 이런, 제가 큰 실례를 했군요. 송구합니다.”
“됐네.”
그야말로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 장칠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가 애써 환한 얼굴로 답했다.
“이렇게 큰 실수를 했는데도 넘어가 주시다니, 참으로 너그러우십니다.”
청해상단주가 스무 살 난 애송이가 아니라 다섯 살 먹은 코흘리개라도 띄워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장칠은 몰랐다.
아직 그는 진정한 진상을 만나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게 최선이라니.”
장칠이 준비한 물건을 이리저리 떠들러 보다가 내려놓은 예결이 혀를 찼다. 회초리라도 맞은 양 장칠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고풍스러우면서도 유행에 뒤처지지 않고, 매미 날개처럼 가벼우면서도 걸치면 적당한 무게감이 있으며, 주름이 잘 생겨도 구겨지지 않아야 하네. 색은 선명해야 하지만 너무 촌스럽지 않게, 햇빛 아래서든 별빛 아래서든 빛이 나야 하지만 너무 눈부시지 않은 그런 비단을 내오란 말일세.”
‘그런 비단이 있으면 인간이 아니라 선녀의 옷을 만드는 데 쓰이겠지!’ 같은 문장이 장칠의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서너 번은 되돌아갔다.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게 이런 감각이구나 싶을 지경이었다. 아니, 다른 건 몰라도 귀에서 피가 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청해상단주가 애송이라고 얕봤는데 까탈스럽기가 저 낙양의 황족 못지않았다. 어쩌면 이런 안목 때문에 상단을 성공시킨 것일지도 모르지만 장칠은 잠깐 사이 황천을 몇 번이나 들락거려야 했다.
“제 총관이 보기엔 어떤가?”
“큰 기대를 하고 오셨는데 참으로 변변치 않군요. 역시 제가 앞서서 확인해볼 것을, 수하가 게을러 상단주님을 번거롭게 만들었으니 부디 벌을 주십시오.”
절도가 있는 몸짓으로 눈을 내리깐 총관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더니 괜찮다고 말하는 상단주의 음성은 이 방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온기를 품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찰나 간에 지나버렸다. 장칠에게 돌아선 상단주가 물었다.
“들었나?”
비단 쪽으로 턱짓하는 모습이 여간 고압적인 게 아니었다.
“내 수하가 보기에도 엉망이라니. 항주까지 큰 기대를 하고 왔는데 참으로 변변치 않아.”
청해상단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린놈이 목이 어찌나 뻣뻣한지! 장칠은 순간 표정을 무너뜨릴 뻔했다.
하지만 그는 애써 미소 지으며 물었다.
“아이고. 상단주님. 급하게 자리를 만드느라 제가 취급하는 비단 중 가장 좋은 건 아직 가져오지도 못했습니다.”
장칠은 사람 좋은 척 웃었다. 입꼬리가 경련을 일으키고 있긴 했지만 아쉬운 건 그였다.
“혹 가장 아쉬운 점 하나만 꼽으라면 무엇인지 말해 주시겠습니까?”
“여태 입이 아프게 말했는데 소용이 없었나 보군.”
예결은 애석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다시 한번 말해주지. 내 품질 좋은 비단이라면 많이 봐 왔네. 사천에서 나는 촉금이 얼마나 유명한지는 자네도 알 걸세.”
장칠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의 촉금은 값비싼 사치품임에도 없어서 못 판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 청해상단에서는 촉금도 취급하는데 그 거래 규모는 장칠이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라고 들었다.
“하나 항주에 빼어난 염색 공방이 많고 다양하면서도 과감한 색채의 비단을 판다는 말을 들어 내 여기까지 왔네. 한데 이염이 된 흔적이며 무늬가 제대로 새겨지지도 않고 뭉개진 비단만 보여주니 참으로 실망스럽군.”
청해상단주의 입에서 실망이라는 단어가 나오기가 무섭게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제 총관이라는 흑발의 미남이 서늘한 시선으로 장칠을 압박해왔다.
저 사내는 처음 방에 들어올 때 진짜 청해상단주가 누군지 언급한 후에는 장칠을 철저히 공기 취급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상단주보다도 더 고압적으로 느껴지는 사내였다.
처음엔 정말 일개 총관이 맞나, 하고 의심도 들었다. 그러나 제 총관이라는 자는 상단주가 조금만 몸을 움직이거나 눈썹을 움직여도 그가 원하는 것을 귀신같이 대령하는 재주가 있었다.
여태 장칠이 보아온 그 어떤 시비나 시동, 심지어 노예조차 저토록 헌신하지 않는다.
‘그럼 청해상단주는 저토록 비범한 이를 고작 총관으로 부린단 말인가?’
장칠은 아직 수족이라 칭할 만한 수하가 없었다. 역시 자신이 성공하지 못한 건 밑엣것들이 제대로 받쳐주지 못해서라는 생각에 괜스레 부아가 치밀었다.
상념에 잠긴 그의 귀에 청해상단주의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정말 자네의 상단이 취급하는 비단 중 이보다 상품이 있는 게 확실한가? 또 내 시간만 낭비하게 만들 요량이라면 이쯤 거래 이야기를 접고 싶군.”
장칠은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다, 당연하지요. 수하에게 일러 특별한 보관 창고에서 가져오라고 했으니 당장 내일이라도 제대로 된 걸 보여드릴 수 있을 겁니다.”
상단주가 여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기회는 주어야겠지.”
생긴 것만 보고 쉽게 구워삶을 수 있으리라 여겼던 장칠은 과거의 자신을 저주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 장 모가 반드시 청해상단주님의 눈에 들 물건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그 결연한 말에 청해상단주는 장칠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묵직하기 짝이 없는 침묵이 어깨에 툭, 떨어지는 듯했다.
“내 자네와 오삼상단의 능력을 믿어보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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