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상유천당 하유소항 (10)
“저, 잘했나요?”
장칠이 물러가자 예결은 하량에게 찰싹 달라붙어 물었다. 상대의 기척이 멀어졌다는 뜻으로 사제의 어깨를 가볍게 잡아줬던 하량은 이번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답했다.
“더할 나위 없이.”
하량의 칭찬에 예결은 방긋 웃었다. 대사형의 칭찬은 몇 번을 들어도 처음 듣는 마냥 짜릿하고 새로웠다.
“이제 저자가 염색 기법을 알아내기 위해 공방의 장인들을 모으겠구나.”
“저희는 그때를 노려서 장칠이 빼돌린 이들을 찾아내고 말이죠.”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양새가 그야말로 사형제 공갈사기단이 따로 없었다.
곤륜의 개파조사가 이를 알았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지만 어쩌겠는가.
둘 중 한 명은 파문당했고 다른 한 명은 자진해서 납치당한 것을.
“그중 선예공방에 적을 둔 이한테 황 노야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면 끝나는군요.”
“그렇지.”
하량은 모호하게 웃었다. 그의 계획은 고작 장칠이 억류하고 있을 일꾼을 찾아내는 데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지만, 예결이 이를 알 필요가 없었다.
“잘 될 거 같아요.”
장칠이 황급히 내뺀 것도 그렇고 이토록 고압적으로 구는데도 계속 비위를 맞춰주려 노력한 것도 그렇고. 이변이 일어날 것 같진 않았다.
이 계획에서 예결이 불만족스러워하는 요소는 딱 하나였다.
“그래도 대사형이 고작 총관이라니. 지금이라도 뒤집으면 안 될까요?”
짝귀를 만나러 오기 전, 하량은 예결에게 청해상단주로서 그를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예결은 반대였다. 청해상단의 진정한 주인인 제하량이 있는데 자신이 무엇 하러 나선단 말인가?
또, 그는 장칠이 자신을 알아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차원이동을 한 탓에 예결의 얼굴은 소년 시절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제 와 짝귀가 두려운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 때문에 하량의 계획이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었을 뿐이다.
“제가 상단주면 대사형은 무엇을 하시려고요?”
“총관이라고 하렴.”
예결은 이 자리에 나서기 전까지 마음을 바꿔달라고 부탁했으나 하량은 그의 뜻을 꺾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이상했다. 세상에 제하량 같은 총관을 둔 상단주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짝귀는 대사형을 향해 상단주님이라고 불렀다.
예결은 마침 잘 됐다 싶어 잠자코 있으려고 했으나 대사형이 불쾌함을 드러내며 그를 앞세우는 바람에 뜻을 성취하지 못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안 된다.”
하량은 단호했다.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이 시간인 만큼, 예결은 대사형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대사형에게 존대를 듣는 건……. 기분이 이상해요.”
사실 ‘기분이 이상해요’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귀여운 느낌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사형에게 흑귀가 생각난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탁하고 거친 흑귀의 음성도 좋았지만, 대사형 본인의 매끄러운 음성으로 듣는 존댓말은 자꾸 음험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눈을 가린 채로 보낸 밤들에 대사형을 끼워 넣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열로 달아오른 얼굴이라든지 거친 숨소리 따위를 자꾸만 떠올린다는 게 지독한 불경처럼 느껴졌다.
흑귀를 상대했기에 언제나 우러러보던 존재를 범한다는 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미처 깨닫지 못한 게 패착이었다.
심지어 제하량은 예결의 은인이기까지 했다.
정말 상종 못 할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본인이 쓰레기인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이걸 잘 포장해서 가이드 앞에 내밀 생각을 하니 아무래도 아찔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작 대사형 본인이야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기사멸조를 범해놓고 이토록 태연자약한 얼굴로 나를 대하시는데…….’
하량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낮은 웃음소리가 예결을 상념으로부터 끌어냈다.
“애석하지만 그건 사제가 견뎌야겠구나.”
안타깝다는 듯 말하면서도 눈에는 잔잔한 웃음기가 묻어났다.
흑귀가 웃을 때면 몸을 타고 전해지던 그 생생한 진동과 열감이, 머릿속을 아득하게 휘저어 놓던 진득한 체향이 퍼뜩 떠오르는 바람에 예결은 소스라쳤다.
‘나처럼 순진한 에스퍼가 사기꾼 노릇을 하는 건 역시 무리였나.’
가이드를 만난 뭇 에스퍼가 으레 그러하듯, 자기객관화가 엉망이 되어버린 예결은 절절한 후회를 삼켰다. 그러나 이렇게 넋을 빼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칫 이성의 끈을 놓고 대사형을 어떻게 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예결은 황급히 화제를 바꿨다.
“짝귀가 저를 알아보지 못하더군요.”
예결의 머릿속 짝귀는 언제나 거대한 존재였다.
아직 무력하던 시절, 짝귀와 독사는 아이들을 을러대며 돈을 뜯어 가던 거대한 존재였다.
다시 태어나 에스퍼로 각성했다고 한들 과거의 기억을 덮어씌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예결은 무심코 짝귀를 두려워했다.
만약 도망친다면 중원 어디든 쫓아와 다리를, 팔을, 코를, 귀를 잘라버릴 거라고 말했다. 거렁뱅이 주제에 가족이라도 만든다면 그들 역시 적혈파에 소유가 될 거라고 말했다.
삼 대가 대대손손 빌어먹고 살게 해 주겠다며 킬킬 웃던 목소리가 선명했다.
개방의 거지를 따라 항주를 떠나던 날, 예결은 독사나 짝귀가 쫓아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신 뒤를 돌아봤다.
늙은 개방도는 그에게 미련이 남았느냐 물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거냐고.
고개를 내저은 예결은 자신을 부리던 사파 무인이 쫓아올까 두렵다고 말했다. 노인은 어린아이를 다정하게 달래 주었지만, 예결은 곤륜에 도착할 때까지 하루도 편히 쉬지 못했다.
눈 덮인 산을 올라, 제하량을 다시 만날 때까지 두려움은 언제나 예결의 꽁무니에 매달려 있었다.
다시 태어난 후에는 짝귀가 없는 세상이라는 기쁨보다도 제하량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사실에 아득히 절망했기에 그 두려움을 벗어던질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지금, 예결은 어린 시절의 공포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긴장이 무색하게도 다시 만난 짝귀는, 장칠은 그의 기억만큼 거대한 존재가 아니었다.
빼빼 말라서 강퍅하고 날카로웠던 모습일랑 찾아볼 수 없는 풍채 좋은 사내가 예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청해상단주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굽신거리며 아첨을 일삼았으며 손바닥을 싹싹 비벼댔다.
‘파리 같다.’
예결은 그 무심한 감상에 자신의 공포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더불어, 그는 자신이 선예공방의 참상을 봤을 때부터 죽 긴장해 있었다는 걸 새삼 알아챘다. 그 장면을 본 순간부터 예결은 달아나고 싶어 어쩔 줄 몰랐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욕구였다. 지금의 그는 가이드를 가진 S급 에스퍼였고 손을 대지 않고도 짝귀 따위는 번갯불에 튀겨버릴 수도 있다.
뒤처리가 어려울 테지만 뱀뱀이도 있으니까.
그런데 두려워서. 제하량이 자신의 불행에 휘말릴까 무서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도망쳐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거다.
‘대사형은 이걸 알고 있었을까?’
예결의 시선이 하량에게로 가 멎었다.
그의 눈은 고요하고 담담했다. 예결의 안에서 일어난 그 감상과 변화를 전부 다 꿰뚫어 본 이처럼 초연했다.
“인간은 참 쉽게 속는단다. 언제나 내려다보던 존재를 올려다봐야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알아보지 못하지.”
“역시 대사형의 심계가 깊군요. 이 사제는 어떻게 따라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예결은 막간을 놓치지 않고 아부를 구겨 넣으며 눈을 빛냈다.
“심계라.”
하량은 나직한 웃음을 뱉었다.
“사실 그런 건 고려하지도 않았다.”
“예?”
순간의 당혹감에 예결이 하량을 바라봤다.
“이 우형은 졸렬한 인간인지라 사제가 그런 버러지에게 고개를 숙이는 걸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란다.”
알아보지 못하면 좋고, 알아보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겠지.
하량의 다정한 속삭임에 예결은 아찔해지고 말았다.
“들켰더라도, 그래도 괜찮았다고요?”
“사제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 이루어 주겠노라 내 약속하지 않았느냐. 네가 누군지 들켜선 안 된다는 이유로 놈에게 숙일 필요는 없다. 그 어떤 이유로도.”
이제야 하량의 뜻 모를 행동의 원인을 알아차린 예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량은 예결이 한때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부당함에 분노하고 있었다. 예결이 그 부당함에 무던해졌다는 사실마저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예결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고작 그런 이유로, 일이 틀어질 걸 감수하셨다고…….’
자신이 짝귀에게 숙이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기에, 새삼 그게 수치가 되지도 않고 분노가 되지도 않는다.
한데 제하량은 그마저도 신경 쓰고 있었다.
“나…… 아, 저는.”
예결의 말이 뚝뚝 끊어졌다.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가슴을 치받고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는 제하량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가 풀어내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미쳤나! 에스퍼 힘으로 가이드를 쥐면 어떡해!’
그러나 하량의 낯에는 한 점의 고통이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온화한 표정이, 예결을 볼 때면 언제나 부드럽고 온유하기 짝이 없는 제하량의 시선이 뺨에 와 닿았다.
애정의 형태가 눈에 보인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 어쩐지 지금만은 그게 대사형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저는 대사형이 왜 이렇게 잘해 주시는지 모르겠어요.”
솔직한 진심이 예결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하량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네가 내 목숨을 살리지 않았니.”
고작 그것만으로 설명될 수 있을 리가 없음을 하량은 잘 알았다.
단지, 하량이 예결에게 할 수 있는 변명은 그게 다였다. 그 외의 동기와 감정은 전부 검고 탁하게 물들어, 감히 사제의 앞에 내어놓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대사형은 이미 제 인생을 구해 주셨는걸요. 기억하세요?”
예결은 아주 머나먼 옛날이야기를 떠올렸다.
***
옛말에 상유천당 하유소항이라 하였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다면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 정도로 항주는 중원에서 손꼽히는 별천지였다.
그러나 그 화려한 처마 아래에서도 굶주려 죽어가는 이는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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