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99화 (99/203)

99화. 상유천당 하유소항 (11)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행인이 없으니 구걸도 하지 못해 할당량을 맞추지 못했다.

그날따라 짝귀의 기분은 더러웠다. 비 오는 날이면 정파의 협객 나부랭이가 썰어버린 귀가 아프다던가.

먼지가 나도록 두들겨 맞은 예결은 독사가 짝귀를 말리는 틈에 도망쳤다. 고작 사파 놈팡이의 화풀이로 죽고 싶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은 돈을 상납했어도 팰 거면서.’

놈들은 기분이 더러우면 본보기 삼아야 한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게 무섭고 싫어도 벗어날 수 없다. 적혈파의 영역에서 벗어나봤자 또 다른 사파가 예결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저들에게 돈을 상납해야 하니 금전을 모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예결은 언제나 굶주렸다. 어떻게든 비상금이라도 만들어 뭘 사 먹으려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구걸해서 얻은 돈이 아니라 소매치기해서 훔친 돈이 아니냐는 눈총을 받으니까.

때로는 사파의 무인보다 잔인한 것이 보통의 양민이었다. 사파 놈들은 예결 같은 어린아이를 이용해야 하니 상대해 주지만 평범한 이들은 예결 같은 거지를 피해 다닌다. 혹시 들러붙기라도 할까 봐 귀찮아한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나이를 먹으면 동냥으로 밥 먹고 사는 것도 끝이다. 예결이 어린 나이에도 눈치가 빠르고 잽싼 편이라 독사는 그를 데려다가 소매치기로 만들려고 벼르고 있었다. 도망쳐봤자 항주의 사파는 알음알음 이어져 있으니 다시 잡혀 올 테고 놈들은 먹여주고 재워준 값을 빚으로 달아 예결에게 평생치 목줄을 채울 것이다.

그렇게 저런 쓰레기들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다가, 스무 살이 넘기 전에 뒷골목 다툼에 휘말려 죽겠지.

그게 이 소년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빗소리가 이명처럼 귓전을 두드렸다. 고통은 이미 멀었다.

아픔보다 선명한 것은 고단함이었다. 지독하게 고단했다.

구걸해서 받은 철전의 찌그러진 귀퉁이를 어루만지며 오늘은 맞지 않을 수 있을까 셈하는 것이 고단했으며 모르는 이들에게 부모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듣는 것이 고단했다. 남은 음식을 건네주며 지금이라도 하오문에 들어오는 게 어떠냐고 묻는 점소이의 제안이 고단했고 어떻게든 배를 채워도 다시 찾아오는 굶주림이 고단했다.

이렇게 지쳤는데 기어코 내일이 올 거라는 생각이 고단했다.

그때 통, 하고 빗방울이 튕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변에 물끄러미 고개를 들어 올리니 웬 도련님이 보였다. 그는 값비싼 비단옷이 다 젖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예결에게 지우산을 기울여 주었다.

“비가 내리는데, 예서 무엇 하고 있니?”

어린 나이에도 반듯하기 짝이 없는 자태며 고상한 이목구비가 장차 미남이 될 것 같았다.

“비 피합니다.”

“처마가 좁아서 다 젖었는데?”

“신경 쓰지 말고 갈 길 가세요.”

“얼굴이 붉다. 열이 나는 거 아니니? 잠시면 되니 나와 함께 의원을 만나러 가자꾸나.”

“됐……다니까.”

예결은 일부러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독사는 종종 사라지는 어린아이들이 인신매매하는 치들에게 붙들려 팔려 간 거라고 했다. 평생 노예 신세가 되거나 아니면 끔찍한 기호를 가진 대부호의 식탁에 올라가게 될지도 모른다며 아이들을 겁박했다.

그가 하는 말 전부를 믿진 않는다. 그러나 사라진 아이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만은 사실이었기에, 예결은 낯선 타인을 경계했다.

‘그런데 정말 열이 나긴 하는 거 같은데.’

폭우가 내리는데 빗소리가 멀게 들렸던 게 단순한 이명이 아니라 고열의 전조였던 걸까.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어서 예결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웅크렸다.

비가 덜 내리는 곳, 마르고 따뜻한 곳을 찾아 움직여야 한다는 건 알지만 이미 다른 아이들이 좋은 자리를 선점했을 거다.

무엇보다도, 도저히 몸을 움직일 기력이 생기지 않는다.

“안 되겠다.”

도련님이 예결을 번쩍 안아 들었다.

“미, 미친 거 아니야! 이거 놔! 놔요!”

목소리만 컸지, 힘없는 발버둥이었다. 손톱 끝에 무언가가 스치는 감각과 함께 도련님의 뺨에 생채기가 났다. 저도 모르게 놀란 예결은 반항을 멈췄고, 도련님은 고통이나 불쾌함도 못 느끼는지 예결을 한층 단단히 고쳐 안았다.

“우산까진…… 못 들 거 같구나. 빨리 갈 테니까 조금만 참으렴.”

그리고 예결이 최대한 비를 맞지 않게끔 그의 위로 몸을 숙인 채 빗길을 내달렸다.

도련님은 빨랐다. 뒷골목에서 가장 빠른 새앙쥐보다도 더 빠른 것 같았다. 애초에 저 가는 팔로 자신을 들어 올린 것만 봐도 무공을 익힌 게 분명했다.

‘아니. 어쩌다가 이런 인간이 뒷골목에?’

예결은 고단함도 잊고 치밀어오르는 의문에 도련님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오로지 앞만 보며 내달리는 이의 표정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평소 예결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큰 규모의 객잔에 들어섰다. 점소이가 튀어나와 소년을 황급히 별채로 안내했다.

“세상에, 도련님. 어디에서 이렇게 쫄딱 젖어 오셨어요?”

중년의 여인이 달려 나와 본인의 옷으로 소년의 얼굴을 마구 닦았다.

“마님께서 마련하신 우장도 두고 지우산 하나만 들고 훌쩍 나가시더니……!”

“유모. 어서 침상에 자리를 만들고 방을 데워 줘. 그리고 의원을 불러오도록 해.”

“아니, 도련님. 어디에서 이렇게 냄-”

“유모.”

도련님이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아이를 만나 데려오신 겁니까?”

아마도 냄새가 난다고 말하려 했을 것이다. 예결은 별 상처를 받지 않았다. 저런 소리를 듣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던가.

하지만 난생처음 보는 도련님이 제 역성을 들고 화를 내는 건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서 의원부터.”

“다녀오겠습니다. 아이고 마님이 아시면…….”

무어라 계속 중얼중얼하던 여인은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침상에 덜렁 앉혀진 예결은 주변을 둘러봤다.

온 세상이 별천지였다. 이게 열 때문에 보는 헛것인지, 아니면 정말 겪어본 적 없는 값비싸고 화려한 물건에 둘러싸여 있어서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어질어질함에 저도 모르게 풀썩 드러눕자 도련님이 어디선가 가져온 뜨거운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는 게 느껴졌다. 서툴기 짝이 없는 손놀림이었다. 그러나 내내 비를 맞아서인지 벌벌 떨리기 시작한 몸은 그 일말의 온기를 환영했다.

겨우 얼굴을 닦아준 도련님이 물었다.

“이름이 뭐지?”

“알아서 뭐 하게요?”

삐딱한 말투가 튀어 나갔다. 어딘지도 모를 도련님의 거처까지 와놓고 날을 세워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았으나 이는 예결에게 너무도 중요한 일이었다.

동정은 따뜻하고 온화하니 그에 취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동정에도 무게가 존재한다면, 그 무게는 깃털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쉽게 주어진 만큼 금방 거두어질 감정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기대서는 안 된다.

살아가는 것은 그 거리에 홀로 남겨질 예결만의 몫이므로.

상대는 곱게 자란 도련님이다. 그러니 생전 처음 보는 거지새끼를 보고 깜짝 놀라 데려왔을지언정 이를 오래 책임지지 않으리라.

“너를 어찌 불러야 할지 알고 싶어서 그런다.”

애새끼 달래듯 하는 말에 심술이 치밀어올랐다.

“거지새끼. 비렁뱅이. 소걸개. 검은 머리 짐승. 모지리. 쓰레기 도둑놈.”

예결이 줄줄 늘어놓는 단어가 늘어날수록 상대의 낯이 굳어가는 게 보였다.

“아무거나 편한 대로 부르세요.”

이제 좀 조용해지겠지. 하고 비죽이 웃었다. 그러나 상대는 예결의 생각보다 강적이었다.

소년은 예결의 손을 끌어가 가만히 붙잡았다. 여기저기 긁힌 상처로 가득하고 손톱 밑도 검은데 전혀 망설이지 않는 태도였다.

부드럽다.

“내 이름은 하량이라고 한단다.”

하량?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반듯해 보이는 도련님과 퍽 잘 어울렸다.

“나는 좋은 이름이 뭔지 모르니, 당분간 너를 아소(兒小)라 불러도 괜찮을까? 작은 아이라는 뜻이다.”

작긴 누가 작다고?

예결은 잘 먹고 잘 쉬지 못해 또래에 비해 작은 편이라는 사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독사는 몸이 작아야 날렵하게 움직인다고 일부러 아이들을 굶기곤 했다.

“문예결이요.”

충동적으로 툭 내뱉은 말은 주워 담기에 이미 늦은 뒤였다. 괜히 삐뚤게 답해놓고 이제 와 이름을 고백한 게 기분이 나쁘지도 않은지 하량은 환하게 웃었다.

“문예결, 예결이라고 하는구나.”

‘정말 이상한 도련님이야.’

성큼 가까워진 하량에게서는 좋은 향이 났다.

‘이게 무슨 냄새지?’

항주 뒷골목에서 나는 악취나 기루에서 흘러나오는 사향 내, 혹은 짝귀나 독사에게서 느껴지는 술 냄새나 피 냄새와도 결이 다르다.

안온하고 다정한, 어쩌면 햇볕의 향기가 이렇지 않을까. 조금은 서늘하고 어딘지 모르게 반짝반짝했다.

예결은 간지러운 생각을 숨기기 위해 눈을 내리깐 채 입을 다물었다.

“무척 좋은 이름이야. 누가 지어 주었는지는 기억하느냐?”

부모님이 지어줬냐고 물어보지 않은 것도, 누가 지어 주었는지 기억하고 있느냐고 물어본 것도 마음에 들어 예결은 고분고분 말했다.

“어떤 노인이.”

굴다리 밑에서 만난 한 노인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본인이 천기를 읽을 줄 안다며 주절주절 떠들던 이는 거지 소년을 문예결이라 불렀다.

‘제 이름인가요?’

‘그래. 그런 셈이지.’

이런 건 짝귀나 독사도 뺏어갈 수 없는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소년은 그 이름을 제 것으로 삼았다.

이를 다른 이에게 알려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에게 말해봐야 성을 줄 부모도 없는 고아 새끼가 이름 석 자 당당하게 대고 다닌다며 욕이나 먹지 않겠는가.

하지만 눈앞의 하량이라는 도련님은 그런 식으로 굴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고마운 분이구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예결은 쓱 시선을 피했다.

때마침 의원을 찾아 나간 유모라는 여자가 돌아왔다.

“도련님. 의원을 데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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