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01화 (101/203)

101화. 상유천당 하유소항 (13)

“음? 뭐 필요한 게 있니?”

빤히 쳐다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하량이 반색하고 물었다.

예결은 뭔가 원하는 게 있을 때만 하량을 찾았나 싶어서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냥, 봤어요.”

“아아.”

하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결은 괜히 속이 뒤집혔다. 실컷 도와준 인간이 은혜도 모르고 퉁명스럽게 구는데 무어가 그리 좋다고 산들바람처럼 웃는단 말인가?

하량은 예결이 무얼 하든 일거수일투족에 반응했고 항상 부족함이 없는지 살폈다. 잘해주고 싶어 안달 난 태가 났다.

처음 마주쳤을 때 경계심을 품었던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로 노골적인 호의였다.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이는 도련님을 보며 예결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도련님이 거지새끼 무서운 줄도 몰라…….”

홀라당 털어먹으면 어쩌려고.

면박을 주자 하량이 어깨를 움츠렸다. 예결은 혹 상처를 받았나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손을 뻗었다. 채 손이 닿기도 전에,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도련님과 눈이 마주쳤다.

“왜, 왜요?”

엉거주춤 얼어붙어 있는데 소년으로부터 은방울꽃처럼 자랑자랑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놀림감이 되었다는 생각에 예결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웃깁니까?”

“아니.”

하량이 벙싯 웃는 얼굴로 속삭였다.

“그래도 네가 내 걱정해주는 걸 보면 마음을 조금이라도 열어준 게로구나. 그렇지?”

“아…….”

어쩌면 그리 대단치도 않은 비밀이었다.

하나 이를 폭로당한 예결의 얼굴과 그의 목덜미는 새빨갛게 물들었다.

꼼꼼히 빗장을 질러놨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는 활짝 열린 마음으로 하량을 대하고 있었다.

낯간지러운 말을 차마 내뱉을 수 없어 예결은 시선을 쓱 피했다.

하량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예결은 불쑥 입을 열었다.

“잘사는 집 도련님의 유흥이라고 생각해요.”

말해놓고도 예결은 순간 혀를 깨물고 싶었다.

유흥은 무슨. 이건 심지어 그냥 그런 호의조차 아니다.

호의는 생각보다 빠르게 소진되는 감정이다.

어린아이가 혼자 구걸하러 다니는 게 안쓰럽다고 챙겨주던 아낙은 세 번 네 번 찾아가자 웃음을 잃었다. 그 후로 부러 피해 다녔으나 정말 우연찮게 마주쳤을 때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은 아직도 선명했다.

‘새끼 거지들이 그렇게 영악하다더니…….’

어떻게든 할당량을 채워보려다가 저도 모르게 다른 구역으로 넘어가서 구걸하다가 걸린 예결이 그쪽 패거리에 걸려서 도망칠 때 한 점소이가 남몰래 뒷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다음에 다시 만난 점소이는 눈에 시퍼런 멍을 달고 있었고, 소년을 본척만척 호객에 열중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던 매담자는 소년이 남몰래 훔쳐 듣다가 귀를 기울여도, 그에게 철전 한 푼 내지 못해도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다.

그는 다관의 뒷골목에서 손님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연습하는 척 항우와 우희의 사랑을, 장자와 나비의 꿈을 속삭였다. 매담자의 쉬어빠진 음성은 한때 천하를 놓고 다툰 장수의 호령이 되고 주름진 손은 우미인의 부드럽고 가녀린 섬섬옥수가 되었다. 그러다가 또 자유롭게 하늘을 노니는 나비의 날갯짓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예결이 어느 정도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을 때, 배라도 채우자며 소년을 불러낸 매담자가 뭐라고 했더라?

‘얘야. 내가 너처럼 똘똘한 사내아이를 원하는 부잣집을 안단다.’

그는 본 적도 없는 별천지의 비단옷과 삼시 세끼 나올 고기반찬을 속삭였다. 다정한 아비의 품과 상냥한 어미의 자장가를 속삭였다. 모든 것이 너무도 생생하고 아름다웠기에, 예결은 그 상상에서 벗어나기가 너무도 힘겨웠다.

하여 예결은 하량의 진심을 알아도 그것을 매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기왕이면 도련님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많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믿음이 무너지고 기대가 꺾이는 것이 두렵다. 이번에는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아서.

“고작 유흥이라도?”

“나 같은 애도 배불리 먹는다는 게 뭔지 알게 해주잖아요.”

예결은 하량을 빤히 바라봤다.

이것만은 숨길 필요 없는 진심이었다.

“그건…….”

도련님 치고는 반죽이 좋던 하량은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고 있었다.

예결은 저도 모르게 그 새붉은 홍조를 눈에 담았다. 염색 공방에서 붉은 물을 들일 때면 황 노야가 몇 번이나 이 색이 아니라고 혀를 차던 게 떠올랐다. 아마도 황 노야가 원하던 붉은색은 이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곱고 보드레한 색이다.

예쁘다.

무심코 손을 뻗을 뻔한 예결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도련님을 희롱하려 들다니, 하량이 너무 잘 대해줘서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소년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하, 항주에는 얼마나 머무르실 거예요?”

한 철의 봄이 지나가고 나면 닥칠 겨울을 대비해야 했다.

“……오래 머무를 수 없을 것 같구나.”

그 말에 순간 예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달고 부드러운 날들이 언젠가는 끝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오늘이 아닐 거라고, 내일은 아닐 거라고 여겼다.

“왜요?”

“여기에 오는 대신 한 약속이 있거든.”

항주에 놀러 오는 게 뭐 대수라고 약속씩이나 해야 했단 말인가?

예결은 혼란스러운 마음에 그를 바라봤다.

“항주에 또 올 건가요?”

“아니.”

뜻밖에도 하량의 답은 단호했다.

“어디, 어디로 가요?”

약간 복잡한 낯을 한 하량은 손가락 끝에 찻물을 찍어 다탁에 글자를 적어 내렸다.

「崑崙」

까막눈인 예결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어 눈을 끔벅였다.

‘글을 모른다고…… 말해야 하나?’

하지만 예결은 내내 저를 배려해줬던 하량을 민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필사적으로 글자를 외웠다.

다행스럽게도 예결의 머리는 좋은 편이었다.

“도련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오게.”

밖에서 들리는 유모의 음성에 답한 하량은 찻잔을 엎었다. 찻물로 적은 글자는 자취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다.

어차피 무슨 글자인지 읽을 수도 없으면서 예결은 탄식을 내뱉을 뻔했다.

“이런, 여기 실수로 잔을 놓쳤는데 좀 닦아주어.”

“어휴. 도련님도 참.”

마른 천을 가져와 다탁을 닦아낸 유모는 예결에게 눈을 흘겼다. 칠칠치 못한 거지 소년이 실수한 것을 마음 약한 하량이 덮어줬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예결은 하량을 바라보느라 그녀에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왜……. 유모에게 숨기려는 거지?’

시선이 마주친 하량은 검지를 입술로 가져갔다. 쉿, 하는 손짓에 예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하량에게는 받기만 했는데, 그가 유모에게서 숨기고자 하는 비밀을 지켜주는 거야 어렵지도 않았다.

그보다도.

‘비밀이다.’

하량과 저, 단둘이 나누어 가진 비밀.

무어라 적혔는지 읽을 수도 없었으니 어쩌면 정말 별것 아닌 내용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결은 하량을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달가웠다.

하여 예결은 단둘이 된 후에도 하량에게 찻물로 적은 글자가 무얼 뜻하는지 물어볼 수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어야 비밀이 될 테니까.

오늘이 아니면 영영 물어볼 기회가 없으리라는 걸 알지도 못한 채 예결은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헤어짐이 언제나 그러하듯, 이별은 만남보다 갑작스러웠다.

늦은 밤이었다.

깊이 잠들어 있던 예결은 두 눈을 번쩍 떴다. 무언가가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빈틈없이 코와 입을 억누르는 손길에 공기가 부족했다.

이대로면 질식해서 죽는다!

팔다리를 필사적으로 버둥거렸지만 그를 짓누르는 무게는 너무도 육중했다. 점점 반항이 잦아드는 예결의 눈에 물기가 어른어른 맺혔다.

언젠가는 비참한 꼴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억울한 걸까.

“잠깐.”

누군가의 제지에 예결의 숨통을 조이는 손길이 느슨해졌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예결의 턱을 들어 올렸다. 눈물방울이 그의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예결은 필사적으로 눈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날붙이에 무얼 발랐는지 빛이 전혀 반사되지 않는다. 방에는 불청객이 둘이나 자리 잡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자였고 다른 한 명은 옆에 서서 예결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렇게 비쩍 마른 게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의구심이 묻어나는 목소리.

저들은 지금 하량을 찾고 있었다!

“그 여자가 도련님이 여기 있다고 고백하지 않았나?”

그 여자?

예결은 저들이 말하는 그 여자가 하량의 유모임을 직감했다.

그녀가 과연 살아 있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다가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서 애써 머리를 비웠다.

이건 질 나쁜 장난도 아니고 악몽 같은 것도 아니다.

전부 현실이었다.

“자아. 꼬마야…….”

그의 입을 틀어막은 사내가 구슬리기라도 하려는 양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잘 들었지?”

예결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무공을 익힌 것 같은 살수 둘이 수신호나 전음이 아니라 육성을 사용한 이유는 전부 그를 압박하기 위함이었던 거다.

저들이 정말 사람을 죽여서 돈을 버는 이들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우리의 목표는 네가 아닌 것 같구나. 만약 진짜 도련님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준다면 네 목숨만은 살려주마.”

턱 끝에 닿아 있는 날붙이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살이 갈라지고 피가 났지만 고통이 느껴지진 않는다.

손을 떼기 전, 예결의 숨통을 조이던 살수가 짤막하게 경고했다.

“소리 지르면 죽는다.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려 해도 죽고, 거짓말을 해도 죽는다.”

예결은 눈만 깜빡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손이 치워지고 예결의 입은 자유를 찾았다. 그러나 턱 끝에는 여전히 비수가 겨눠진 채였다.

“자. 너는 누구지?”

상대의 음성에서 우위를 점한 자 특유의 여유가 느껴졌다.

짝귀나 독사에게서 질릴 정도로 보아왔던 바로 그 태도.

“내, 내 이름은 하량이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