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상유천당 하유소항 (14)
예결이 바들바들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예결도 알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 여겼던 장소에서 죽을 뻔했다는 공포로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공포를 이기는 감정이 있었다.
‘놈들은 그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을 찾고 있어.’
살수가 이 밤중에 사람을 찾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저들은 진짜 하량을 만나면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예결에게 그랬던 것처럼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협박할 게 아니라 바로 목표를 달성할 테니까.
‘그건 싫어.’
죽는 건 무섭다. 그러나 하량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그건 어쩐지 슬플 것 같았다.
머릿속에 차가운 불이 타오르고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하량? 너 따위가 우리의 목표물이라고?”
살수에게서 기분 나쁜 웃음이 흘러나왔다. 예결은 의연하게 어깨를 펴고 상대를 바라봤다. 곧은 자세도 상대를 똑바로 직시하는 시선도 모두 그간 보아온 하량을 흉내 낸 것이었다.
두건 사이로 드러난 살수의 눈이 냉혹하게 예결을 훑었다.
어느새 비굴함과 공포 모두가 씻은 듯 사라진 비렁뱅이 소년을.
순간 ‘진짜’가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럴듯해 보였다.
“그렇다면 네 성이 뭐지?”
성?
예기치 못한 질문이었다. 뒷골목의 아이들은 누군가의 자식으로 불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살수가 예결의 얼굴을 후려쳤다.
“맹랑한 새끼.”
반항할 기력조차 없이 고개가 돌아갔다. 입 안에서 피 맛이 났다.
좀 더 영리하게 거짓말을 하지 못한 게 후회될 뿐이다.
“그 도련님이 여기저기 질질 흘리고 다닌다더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야. 하여간 저보다 불쌍한 새끼들 수집하는 취미라도 있는 건지 뭔지.”
그 말에 예결은 눈을 부릅뜨고 살수를 노려봤다.
“눈으로 살인이라도 하겠어. 네 잘난 도련님을 욕되게 한 것이 퍽 화가 나는 모양이구나?”
살수가 은근히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혹시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니? 그 도련님이라는 자가 자신을 대신해서 죽을 희생양을 만들려고 거지새끼에게 잘 대해준 걸지도?”
놈의 음성에서 저열한 흥미가 느껴졌다. 어차피 죽여버릴 거면서 예결이 조금이라도 더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어 하는 투였다.
살수는 위험한 일을 하는 만큼 무척 무시무시한 존재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보면 짝귀나 독사와 그리 다른 인간 같지도 않았다.
“난…….”
예결이 끊어질 듯 작은 소리로 입술을 달싹이자 살수가 그의 말을 들으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래. 너는?”
퉤.
예결은 기대감이 서린 눈에 침을 뱉었다. 놈이 눈을 붙들고 물러나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새끼가!”
허우적거리며 뻗어지는 손을 피하는 건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예결은 몸을 거의 내던지다시피 하여 바닥을 굴렀다. 바로 옆에 서 있던 놈이 기다렸다는 듯 예결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그러나 소년은 웃고 있었다.
어차피 달아나려 한 것도 아니었다. 입이 다시 틀어막히기 직전에 예결은 있는 힘을 다해서 외쳤다.
“불! 불이야!”
사람 살려달라고 하면 다들 천적을 만난 거북이처럼 껍질 속으로 숨어버릴 거다. 하지만 객잔에 불이 난다면 입을 손해를 걱정해서라도 다들 움직이겠지.
“뭐, 불?”
“불이라고! 불!”
멀리에서부터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달려 나오며 어둑한 장지문 저 너머 밝은 노란색이 보인다.
예결은 씩 웃었다.
“너…… 이……!”
“그만. 처리하고 바로 이동한다.”
목에 칼이 닿는다. 예결은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스걱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카락이 베여 나갔다. 이제 다음은 정말 죽음이구나, 하는 순간 문짝이 쾅! 하고 넘어지며 도를 찬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뒤에는 귀신처럼 창백한 낯을 한 하량이 서 있었다. 팔에 피가 묻은 붕대를 감은 도련님의 시선은 집요하리만치 예결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도객의 출수에 예결을 쥐고 있던 살수의 팔이 베여 나갔다. 주변이 피로 물들고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로 어지러운데, 예결은 저를 보는 하량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왜…… 어디에서 다친 거지? 이 살수들은 도련님을 만난 적이 없어 보였는데?’
목이 베이면서 피가 너무 많이 흘렀는지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생각이 잘되지 않는다.
살아남은 살수가 던진 비도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예결은 시야가 까무룩하게 어두워지는 걸 느끼며 천천히 바닥을 향해 무너져내렸다.
***
깨어난 예결은 아담한 방에 누워 있었다. 낯선 환경에 퍼뜩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사지는 염색하느라 물을 먹인 천처럼 무거워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어? 일어났네.”
점소이로 보이는 사내가 뜨거운 물이 담긴 대야를 가지고 방에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죠?”
어디든 하량과 머무르던 곳은 아니다.
“여긴 송월객잔이다.”
예결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저는 객잔에서 먹고 잘 돈이 없어요.”
어서 쫓겨나고 싶다. 어서 쫓겨나서 항주 구석구석을 뒤져서라도 하량을 찾아야 한다.
‘아파 보였는데.’
예결은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살수들은 유모만 만난 것 같았는데, 하량은 그 팔을 어디에서 왜 다친 걸까?
“한 도련님이 석 달 치 숙박비와 식비를 전부 내고 가셨으니 염려하지 말고 지내렴.”
서글서글해 보이는 점소이는 잠시 나가더니 먹을 것을 가지고 돌아왔다. 식사 후에는 번듯한 차까지 마련되었다.
하량과 나누어 마시던 상품의 차는 아니었지만, 소년은 여전히 차를 잘 몰랐다. 까닭에 금빛으로 영글어가는 수색을 보는 것만으로도 하량과 함께 보내던 시간이 떠올랐다.
“뒷골목 부랑아가 무슨 차를 일일이 챙겨 마신다고.”
몇 마디 투덜거렸으나 돌아오는 머쓱한 미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다시 혼자가 된 것이다.
분명 마시라고 내줬을 찻잔에 손가락을 담갔다가 뺀 예결은 하량이 적었던 글자를 흉내 내 적어보았다.
「崑崙」
고작 두 글자가 그를 심란케 했다.
이게 무슨 뜻이었을까.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 맞을까.
고작 설익은 독점욕 때문에 그 단어가 무슨 뜻인지 묻지 않은 걸 후회한다.
기실, 자신이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게 맞는지조차 확신이 들지 않는다. 하량을 붙들고 물어보려 해도 그 도련님은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가버리지 않았나.
“이러면…… 안 되는데.”
예결은 부연 시야를 지워내기 위해 거듭 손을 움직였지만 소용없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던 것처럼 은혜가 뭔지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고아 새끼라 그런지 하량이 원망스럽다.
그는 그저 눈에 밟히는 거지 소년을 거둬 먹이고 가야 할 때 떠났을 뿐인데.
‘춥다.’
소년은 몸을 웅크렸다. 하량이 떠나고 남은 자리를 짜고 습한 바닷바람이 매섭게 파고들었다.
예결이 깨어난 다음 날, 하량과 지낼 때 그를 봐주던 의원이 찾아왔다.
“도련님이 보내셨어요?”
“미리 돈을 주고 가셨지.”
설마 하는 마음에 반색하며 의원을 맞이한 예결은 실망하고 말았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심드렁한 얼굴을 한 의원은 환자의 몸 상태를 살폈다.
“창상이 깊은 편이었지만 이대로면 금방 낫겠구나. 어려서 회복력이 좋아 다행인 줄 알아라.”
목에 정성껏 붕대를 감는 손길을 참아낸 예결은 의원이 가져온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바삐 물었다.
“도련님이 어디 갔는지 아세요?”
“너도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니?”
의원이 처음으로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영리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마음이라도 준 게냐?”
추궁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의원의 말에 저절로 고개가 꺾였다.
“어차피 그런 귀한 집 도련님은 동정 좀 베풀고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거 알면서.”
“알아요.”
예결은 웅얼웅얼 답하고는 진맥을 위해 걷어 올렸던 옷소매를 다시 내렸다.
“그래도 아직 어린 도련님이라 순진해서 다행인 줄 알아라. 너 같은 애들이 마음도 주고 몸도 줬다가 만신창이가 되는 꼴을 한두 번 봤어야지.”
항주는 유흥의 도시였다. 중원 여기저기에서 온갖 인간이 다 모여들었다. 한 철의 유희를 즐기러 온 부유한 이들은 항주에서 술과 진미, 풍광, 그리고 찰나의 인연마저 즐긴 뒤 떠나갔다.
여름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비를 모르는 아이가 생기거나 버려졌다.
“……그런 분 아니었어요.”
의원의 말에 예결은 힘없이 대꾸했다. 결국 홀로 남겨졌으니 공허한 말이라는 걸 아는데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예결을 흘깃 본 의원은 위로 한마디 없이 방을 나섰다.
결국 혼자 견뎌내게 될 것이다.
이 여름을 거쳐 간 모든 이들이 그러했듯이.
의원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점소이가 약을 달여서 가져왔다. 퉁퉁 부은 눈으로 침상에 처박혀 있던 예결은 점소이가 탕약 대접 옆에 놓여 있는 간식 그릇을 발견했다.
설탕물에 졸인 과일이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 이건 왜요?”
“도련님이 이게 없으면 손님이 약을 안 먹는다고 하시던데요?”
거짓말쟁이.
“……감사합니다.”
울 듯 말 듯 일그러진 얼굴로 예결은 약을 삼키고, 반짝반짝 빛을 내는 붉은 열매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보석 같다.
이게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간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여기에 하량은 없고, 이건 그가 직접 챙겨준 과일꼬치도 아닌데. 여기에서 묻어나는 그 지독한 다정의 자취가 예결을 헤매게 한다.
하량이 자신을 위해 마련해준 유예가 다 흐르고 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 도련님이 객잔에 낸 돈을 다 쓰는 날에는?
‘……뒷골목으로 돌아가야지.’
느릿하게 떠올린 생각은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었다. 언제나 막막하고 구질구질했던 현실로 돌아가는 것일 뿐인데 왜 이다지도 힘겹게 느껴지는 건지 모를 노릇이다.
다시 혼자가 된 밤, 소년은 침상 위에 웅크린 채 숨죽여 불면의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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