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상유천당 하유소항 (15)
“아이고. 아이고. 노개 죽네. 노개 죽어.”
한 늙은 거지가 객잔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더니 예결의 앞에 걸터앉았다.
예결은 한참 아침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점소이는 식사를 방까지 가져다주겠노라 말했지만 예결은 거절했다.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던 때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주변에 대한 반응이 극도로 적어진 예결은 불청객의 등장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린 것 눈이 아주 말린 생선이 따로 없구나.”
늙은 거지가 혀를 끌끌 찼다.
“누구세요?”
“나는 개방의 육결제자, 적노개다. 무림명이랄 것은 없고 그냥 견식이 풍부한 늙은이지.”
예결은 노인의 허리에 매달린 매듭을 확인했다. 여섯 개였다.
육결제자면 분타주 급은 아니어도 그 바로 아래의 직급이라 들었기에 예결은 아연해졌다.
“저를 찾아오신 게 맞나요?”
“그럼. 개방도가 사람 잘못 찾는 것도 봤느냐?”
“개방과 저는 인연이 없는데…….”
“거지면 다 개방이지.”
예결이 눈을 가늘게 뜨자 적노개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농이다. 농. 젊은 것이 이리 성질이 급해서야 원.”
혀를 끌끌 찬 적노개가 입을 열었다.
“본개는 지금 개방에 들어온 의뢰를 수행하는 중이다. 의뢰인은 너를 여기에 맡기고 간 사람이고, 네가 평생 의탁할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줄 것을 요구했다.”
“하량…… 하량 도련님이 보낸 사람이에요?”
예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가 무릎을 식탁에 박았다. 눈물이 핑 돌아서 다시 털썩 주저앉는데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그거야 나는 모르지. 내가 얼굴 보고 받은 의뢰는 아니라서.”
어깨를 으쓱한 적노개가 예결 앞에 놓여 있던 오리구이에서 다리를 북 뜯더니 한 입 먹었다.
“이 객잔은 오리도 괜찮구먼.”
“혹시 도련님 성이 뭔지 알아요?”
이거라도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고 간절한 시선을 보냈으나 적노개는 심드렁했다.
“아 모른다니까 그러네. 만나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알어.”
예결은 어쩐지 맥이 탁 풀리는 걸 느꼈다.
소년의 심란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늙은 거지는 오리고기를 우물우물 삼킨 후 입을 열었다.
“아무튼, 네가 괜찮은 집에 입양 가고 싶다고 하면 아이를 간절히 가지고 싶어 하는 부부에게 데려다주마. 만약 가족을 원하는 게 아니라면 네가 클 때까지 키워줄 작은 문파 같은 곳에 데려다줄 수도 있단다. 문주도 건실하고 아랫사람들도 선량한 곳으로 골라주지.”
개방의 정보력만 믿으라며 눈을 찡긋하는 적노개는 퍽 익살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예결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알 수 있었다.
이 늙은 거지를 따라나서면 다시는 항주의 뒷골목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무려 육결제자라 했으니 짝귀나 독사 같은 삼류 낭인은 예결을 붙잡지도 못하리라.
“정 마음 가는 데가 없으면 개방에 들어와도 되고. 내가 마침 제자를 들일 때도 돼서 말이야.”
소년의 침묵이 길어지자 적노개가 슬며시 덧붙였다.
“자, 어쩔 테냐?”
예결은 오리 기름이 묻어 번들거리는 적노개의 수염을 빤히 쳐다봤다.
“……그럼, 여기도 갈 수 있어요?”
찻물을 엎은 예결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가 아는 유일한 글자를 적어 내렸다.
「崑崙」
잊지 않기 위해 밤을 지새워가며 외웠던 글자는 삐뚤빼뚤했으나 알아보는 게 불가능하진 않았다.
“예끼. 노개가 글도 못 읽을 줄 알고 지금 놀리는 게야?”
예결이 쓴 글을 보자 적노개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타박했다.
“제가 못 읽는데요.”
솔직하다 못해 맹랑한 답에 늙은 거지가 멈칫했다.
“여기가 어디인 줄은 알고 가겠다는 게야?”
“그냥.”
예결은 눈을 내리깔았다.
“찾는 사람이 있어서요.”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회복에 전념하며 하루하루를 보낼수록 예결은 하량을 떠올렸다.
어디에 가서 평생 뿌리를 박기 전에, 그 도련님이 무사한지 보고 싶었다.
“허어. 허. 참.”
적노개가 연신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여기가 어딘데요?”
“정말 모르는 모양이구나. 그 글자는 곤륜이라 읽는다.”
“……곤륜!”
“항주가 중원의 동쪽 끝이라면, 곤륜은 중원의 서쪽 끝에 있지.”
가는 데만 석 달이 넘게 걸린다며 적노개가 투덜거렸다.
“자, 네가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한지 알겠느냐?”
예결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정말 제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 데려다주기로 하신 거예요?”
“그럼. 그런 의뢰를 받았으니까.”
짭짤한 무기명 전표를 받았다며 적노개가 손바닥을 비볐다. 중원 서쪽 끝까지 가야 한다는 말에 소년이 마음을 꺾었다고 생각한 눈치였다.
“중원 어디든?”
“어디든.”
재차 확인하자 늙은 거지가 흔쾌히 답했다.
“그럼 여기로 갈래요.”
예결은 찻물로 적은 글자를 가리켰다.
“아니. 그러지 말고. 내가 저기 물 좋고 사람 좋은 무한 성에 괜찮은 문파를 봐 놨어요. 천하제일무공은 아니지만 한 백오십 년 전에 천하백대무공 안에 들었던 심법과 검법을 가지고 있다니까?”
“곤륜이요.”
“아니면 낙양! 낙양 어떠냐! 어. 천자께서 머무르시는 땅이다. 내가 거기에 자식이 없는 거 빼고 정말 화목한 부부를 알아요. 그 집 재산이 아주 알짜배기야. 백 년쯤 전 황제 폐하에게 총애받은 환관이 들인 양아들의 가문이거든.”
“곤륜이 더 좋아요.”
“아니, 곤륜이 무슨 옆집인 줄 아느냐? 어린 몸으로 긴 여행길을 버티는 것도 문제거니와 중원이 얼마나 험한 곳인데! 산을 넘다가 녹림도나 맹수를 만나 죽을 수도 있어.”
아무리 솔깃한 소리를 늘어놓아도, 가다가 죽을 수 있다고 위협해도 예결은 우직하게 자신의 요구를 되풀이했다.
“곤륜.”
“너는 이 거지가 호호백발의 나이에 중원을 가로질러야 성에 차겠느냐?”
심지어 동정심에도 호소했으나 예결은 강적이었다.
“개방의 육결제자는 무림인이 아니에요?”
여기에서 아니라고 했다간 십만 개방도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거였다.
다른 문파에 비해 무공이 약한 편이라는 게 약점인 개방도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문제였다.
예결은 내내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곤륜으로 갈 거예요.”
그야말로 맑은 눈의 광기였다. 결국 적노개는 백기를 들었다.
“방주 사형도 두 손 놓은 내 고집을 꺾다니, 아주 걸물이 되겠구나.”
혀를 끌끌 찬 거지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가자. 가 보자.”
적노개는 수지맞은 장사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쪽박 차게 생겼다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청해로 가는 길 내내 적노개는 예결을 최선을 다해 보호했다.
반쯤은 운이 도왔기에 예결은 그해 겨울이 오기 전, 청해의 곤륜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편히 잠든 밤보다도 몸살이며 근육통에 끙끙거리다가 지새운 밤이 더 많을 정도로 지난한 여정이었으나 어쩐지 가슴은 날 듯이 가벼웠다.
흰 눈을 소담스레 덮어쓴 웅장한 산의 발치에 선 예결은 다짐했다.
‘도련님이 잘 있는지만 보는 거야.’
그렇게 산에 오른 소년은 마지막 숨을 내뱉을 때까지 곤륜을 떠나지 못했다.
***
항주에서의 첫 만남과 곤륜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덤덤한 표정으로 내뱉은 예결은 하량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의 표정은 모호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기 어려웠다.
“하지만 곤륜에서 다시 만났을 때, 대사형은 저를 완전히 잊어버리신 듯했지요.”
적노개는 천연덕스럽게도 예결을 곤륜에 입문시켰다. 평생 지낼 곳을 찾아주는 게 계약이었다면서 말이다. 지금은 그게 적노개의 배려였음을 알지만 당시엔 도련님과 아무도 없는 산에 단둘이 남겨진 기분이었다.
그래도 설렜다.
입문 시험을 치르고 백양진인의 제자가 되어 다시 만난 도련님은 제하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성이 제씨였다는 걸 알게 된 기꺼움도 잠시, 하량은 예결을 모르는 듯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래서 네가 곤륜에 온 것이었구나.”
하량이 눈을 내리깐 채 중얼거렸다.
“동문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게 행운이라기엔 지나친 운명의 농간 같다고 여겼을 뿐, 이때가 되도록 내내 몰랐어.”
어딘지 모르게 힘이 탁 풀린 음성이었다.
“내가 글을 모른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적어 주셨구나.”
예결이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오래된 야속함을 내뱉었다.
“……듣는 귀가 많았고, 또 네게 어디로 가는지 밝힐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럼 그렇게 적어주셨던 건 왜죠?”
어차피 읽을 줄 모르는 거 알면서.
“그렇게나마 네가 알아주었으면 했었던 것…… 같구나. 아마도 그랬겠지. 나는 그길로 영영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으니까 누구든 좋으니 나를 기억해 주었으면 했다.”
어린 시절의 서투름을 되짚는 하량의 음성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영영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신세라니, 살수가 따라다닐 때부터 알아봤지만 정말 사연 많은 도련님이었구나 싶어 예결은 내심 혀를 찼다.
다시 고개를 들어 예결을 바라보는 하량의 시선에는 생경한 존재를 보는 듯한 이채가 서려 있었다.
“왜 내게 한 번도 따져 묻지 않았니? 왜…… 내가 원망스럽지도 않았느냐?”
하량의 음성에는 아연함이 묻어났다.
“반쯤은 오기였죠.”
고생고생해서 곤륜에 왔더니 저를 새까맣게 잊은 도련님이 원망스럽고 야속한 마음도 분명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점차 희미해져 버렸다.
“나머지 반쯤은…… 저 한 명쯤은 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대사형은 그때도 여러 사람을 돕던 분이셨으니까요.”
예결은 쓰게 웃었다.
다시 만난 도련님이 저를 알아보지 못했을 적에는 좀 우울했지만 생각해보면 보름 정도 함께 시간을 보낸 게 전부인 거지 소년을 반년 가까이 기억하고 있는 것부터가 이상하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중원 반을 가로지르며 예결은 항주 시절보다 키가 좀 크고 살이 붙었으며 볕을 피하지 못해 까무잡잡해졌다.
“이제 그때 궁금했던 거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무엇을?”
하량은 예결의 추궁에 답할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사제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해줄 작정이었다. 어린 시절의 제하량이 지고 있던 멍에는 이미 벗어던진 후였으니까.
“팔, 다 나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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