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상유천당 하유소항 (16)
“너는 왜…….”
하량의 음성에 파문이 번졌다.
“왜 그런 걸 궁금해하는 거지? 이미 결과를 알고 있지 않느냐?”
하량이 옳다. 예결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가 협객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그때 묻지 못했는걸요.”
하지만 그때는, 어릴 적의 예결은 곤륜에 와서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 모른다. 어린 나이에 다치면 그대로 팔이 틀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배웠기 때문이다.
장차 검수가 될 하량의 팔이 그때 일로 망가졌다면 어쩌지, 하고 애면글면하던 어린 소년은 알고 싶었을 것이다.
“많이 아프지 않았냐고, 지금은 괜찮으냐고. 그게 궁금해서 중원을 가로질러 가놓고.”
예결은 쓰게 웃었다.
“좀 멍청하죠?”
“그럴 리가…….”
하량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그의 안에서 풍랑이 일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니.”
옷을 걷어 팔을 보여주었다.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두 팔은 도무지 무림인의 것 같지 않았다.
“보이지? 멀쩡하단다.”
예결의 두 손이 그 위를 어루만졌다.
“……정말 그러네요.”
사심이 전연 없다고 했다가는 거짓말이리라. 그러나 이미 수십 년이 지나 완전히 아물었을 상처를 확인하는 무의미한 짓을 저지르면서도 가슴이 기이하게 울렁였다.
“그때 아무 말 없이 너를 떠난 건 살수 때문이었다.”
하량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는 나를 귀한 집 도련님이라 여겼을 테지만, 사실 내 출생은 그리 번듯하지 않단다.”
예결은 그가 순순히 과거를 털어놓기 시작하자 입을 꾹 다물었다.
곤륜운룡 제하량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결조차 항주에서의 만남으로 어렴풋이 짐작만 할 따름이었다.
“대단한 가문에 시집갈 예정이셨던 어머니는 이미 정인이 있으셨고, 혼례 전에 함께 도망가려 했으나 잡히고 말았지. 어머니의 가문에서는 이 사실을 숨기고 예정대로 혼례를 진행했으나 그땐 이미 내가 생긴 뒤였다.”
치부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도 하량의 얼굴은 덤덤했다.
정말 모든 게 지나간 일이라는 것처럼.
“다행스럽게도 어머니를 부인으로 맞이한 사내는 좋은 사람이었다. 아내에게 원래 정인이 있었고, 도망치려다가 잡혀 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어머니가 나를 낳는 걸 지지해 주셨지. 태어난 후에도 재물을 아끼지 않고 양육을 돕고 교육도 받게끔 그렇게…….”
하량이 어색하게 웃었다.
“머리가 조금 굵어질 때까지는 가주님이 내 아버지라고 믿고 자랐다. 하지만 머잖아 누이가 태어났고, 그 아이는 가주님의 성을 따르는데, 정작 나는 이름으로만 불린다는 걸 알게 되었지. 나중에 알고 보니 본인의 아들로 호적에 올리려고 시도하셨으나 원로들이 강력하게 반발했다더구나. 하지만 가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지.”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까닭에 어릴 적부터 살수의 방문을 받았다. 어머니의 가문에서는 치부를 없애고 싶어 했고, 내가 나고 자란 가문에서는 가주님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으니 혈족의 피 한 방울 잇지 않은 아이를 호적에 올리지 않으려 들었지. 후계권이 없다고 해도 그 이름을 짊어진 것만으로도 가문의 막대한 재산과 권세를 나누어 가질 수 있게 되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어린애한테 살수를?
예결은 머리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대사형이 무슨 욕심이 있다고 그런…….”
“나를 둘러싼 상황에 진력이 낫고 모든 걸 포기하기로 결심했지. 마지막으로 항주에 다녀오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하량은 눈을 내리깔았다.
“내 욕심에 네가 휘말렸다.”
“욕심이요? 전 대사형에게 도움을 받은 기억밖에 없는데.”
예결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만약 하량이 아니었다면 한여름에 얼어 죽었을 거다.
“……살수를 만나지 않았니.”
“그래서 항주를 떠난 거였군요.”
“너는 정말 죽을 뻔했다.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그렇게 되었겠지. 유모가 돌아오지 않아 그녀를 찾으러 갔는데, 이미 시신이 되었더구나. 순간 네게 가장 좋은 방을 주고 싶다는 이유로 고집을 부렸던 게 떠올랐지.”
잠시 뜸을 들인 하량이 속삭였다.
“놈들이 너를 찾아갔겠구나.”
가슴이 선득하게 조여들었던 그 순간의 감각이 여전히 선명했다. 그 치 떨리게 무력한 소년은 저들의 발톱이 자신만 할퀴고 말 거라 여겼던 스스로를 저주했다.
“유모는 놈들이 너를 나로 오해하게끔 말하고도 남을 사람이었지. 그래서 바로 가주님이 호위를 위해 붙여준 무인들에게 달려갔단다.”
“그럼 대사형은 살수를 마주치지 않았던 거네요.”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예결은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멈칫했다.
“잠깐, 그럼 그때 팔은 어디에서 다친 거예요……?”
“스스로 그었다.”
하량은 차마 예결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지 시선을 피했다.
“나는 그 호위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입장이었거든. 그래서 살수에게 다쳤고 데리고 있던 아이가 시간을 버는 동안 도망친 거라고 거짓말을 했지.”
대사형의 팔을 붙든 예결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까, 그 상처가 스스로 그었던 거라고? 호위를 움직이려고?
“그러지 않았으면 그들은 제때 움직이지 않았을 테고…… 실랑이를 벌이기엔 너무도 촉박한 상황이었으니까.”
예결은 험악하게 구겨지는 표정을 도무지 막을 수 없었다.
하량이 상해야만 움직이는 무림인들이라니? 그건 마치 인간이 아니라 귀중한 물건을 보호하는 것 같지 않나?
“그러니…… 네가 애초에 걱정할 이유도 없었다는 이야기란다. 나는 너의 인생을 구한 것도 아니야. 오히려, 내 불행에 타인을 휘말리게 한 인간일 뿐이지.”
모든 이야기를 끝마친 하량은 마치 심판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두 눈을 내리깐 채였다.
예결은 하량의 이야기에서 그가 생부와 생모의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생략했음을 눈치챘다.
“대사형의 생부는요?”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맞아 죽었다고 들었다.”
“그럼 자당께서는…….”
“아직 살아 계시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예결은 대사형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누웠다. 끙끙 앓는 사제를 내려다보는 하량은 남의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처럼 무감해 보였다.
“곤륜에서 저를 모르는 척한 것 역시?”
“당시 나는 감시당하는 중이었다. 행여 다시 가문으로 돌아오면 어쩌나 하고 지켜보는 이들이 있어서. 만약 내가 네게 애착을 느끼는 게 알려진다면 이번엔 약점으로 쓰일 거라고 생각했지.”
‘아니, 대체 무슨 가문이길래.’
예결은 따져 물으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곤륜이 구파일방 중에는 영향력이 작은 편이라지만 그래도 정파의 기둥 중 하나였다. 그런 곳에 감시의 눈을 심을 정도면 못해도 오대세가 정도는 되지 않겠는가.
어린 예결이 보기에 하량은 잘사는 집 도련님이었고 대단한 존재였으나 정작 그는 호위조차 마음대로 부릴 수 없는 처지였다.
허울뿐인 권리조차 모두 포기하고 혈혈단신으로 곤륜에 입문한 하량이 저 혼자뿐이 아니라 예결까지 지켜보려 아등바등했을 걸 생각하면 심히 괴로웠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입맛이 지독하게 썼다.
“곤륜에 제가 나타났을 때 무척 난감했겠네요.”
“그보다는.”
하량이 난처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기뻤단다. 다시 볼 수 있게 될 줄 몰랐거든.”
보일 듯 말 듯 어렴풋한 미소가 하량의 입매에 머물렀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예결은 그만 자신이 베고 누운 대사형의 허벅지를 꽉 움켜잡을 뻔했다.
“네가 또 나한테 휘말리면 어쩌나 싶어서 거리를 두었으면서, 참 이기적이지 않니.”
“뭐 어때요.”
대사형의 자조에 예결은 그의 말을 싹둑 잘라냈다.
“비록 이십 년도 넘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듣게 된 말이지만, 그래도 대사형의 진심을 알 수 있게 되어서 좋은걸요.”
머리를 사락사락 쓸어 넘기는 손길에 기분 좋게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그럼……. 서로가 서로를 한 번씩 구한 거니까. 퉁 쳐도 되겠네요.”
이걸로 하량이 자신에게 느끼는 목숨 빚을 상쇄하고 관계 진전의 초석으로 삼을 작정이었다.
흑귀와는 만리장성을 쌓았으니 이제 제하량과의 관계도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곤란하구나.”
눈을 동그랗게 뜨자 하량이 코끝을 살짝 찡그린 게 보였다.
“왜요?”
대사형이 난처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러면 셈이 맞지 않거든.”
셈이 안 맞는다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사형이 항주 길바닥에서 굴러다니던 거지 소년을 살려준 걸 너무 가볍게 취급하시는 거 아니에요?”
심지어 지금은 일방적으로 생존을 하량에게 의지하고 있는 에스퍼 신세다.
“아니. 사실 우리는 그보다 더 전에 만난 적이 있단다.”
“예?”
예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량은 친절하게 설명했다.
“네가 나를 구한 게, 한 번이 아니라는 이야기지.”
“저는 평생 항주를 떠난 적이 없는데요?”
“항주에서 만나긴 했지.”
모호하기 짝이 없는 답이었다.
벌떡 일어나 앉은 예결은 어떻게든 과거의 기억을 뒤져보다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기억이 안 나는데요?”
안 그래도 대사형을 만나기 전의 불행한 유년기는 기억이 희미한데, 죽고 다시 태어나 이십 년을 살았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생각이 안 나는 게 정상이었다.
“내게는 강렬한 일이었지만, 네게는 아니었을 수도 있으니까.”
하량은 침착하게 사제의 손목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머리카락을 좀 괴롭혔을 뿐인데 그마저도 용납하지 않는 대사형에게 순순히 손을 내준 예결은 중언부언 덧붙였다.
“아니. 대사형이 정말 몰라서 그래요. 잊어버릴 게 따로 있지 어떻게 대사형을 잊어버려요?”
적당히 속내를 숨기던 평소답지 않게 상당히 노골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예결은 그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잘 생각해보렴.”
사제를 무릎에 앉힌 하량은 그를 등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네가 스스로 그날을 떠올려 준다면 내게 무척 큰 선물이 될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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