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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05화 (105/203)

105화. 임무 완수 (1)

아까처럼 그냥 알려주면 안 되냐는 염치없는 질문이 나오려다가 목구멍 속으로 쏙 돌아갔다.

날로 먹고 싶었던 예결은 울상을 지었다.

뭐, 언제는 제하량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인 적이 있던가.

동거부터 시작하는구나 하고 좋아하는데 곤륜에 처박고, 백수가 돼서 옆에 딱 달라붙을 궁리를 하니까 대뜸 상단을 안겨주고, 본신으로는 욕망이 뭔지도 모르는 순결한 대사형처럼 굴면서 정작 흑귀의 모습으로는 손가락 하나로 사람을 녹여버리고!

‘아니 잠깐만. 마지막은 찬성이긴 해.’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살짝 들었으나 예결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는 강하게 큰 에스퍼였다. 가이드가 내리는 시련 정도는 당연히 해내야 하는 것이다.

하늘의 별을 따오라고 해도, 바다로 사라진 도시 아틀란티스를 찾아오라고 해도.

“대사형이 말해주시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누구나 본인의 못난 모습은 숨기고 싶어 하는 법이 아니겠니.”

‘이 사기꾼……!’

예결은 하마터면 제하량에게 눈을 흘길 뻔했다.

하량은 제 어깨에 머리를 박고 작은 주먹으로 식탁만 콩콩 두드리는 사제의 행태에 눈을 깜빡이다가 웃어버렸다.

약이 올라 어쩔 줄 모르는 태가 나는데 그걸 또 참겠다고 끙끙거리는 예결이 귀여웠다.

“묘하구나.”

“뭐가요?”

고개를 든 예결의 질문에 하량이 느슨해진 입매로 중얼거렸다.

“평생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거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

너무도 오래전의 이야기다. 이젠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득히 먼.

까닭에 하량은 그때의 일들이 완전히 무게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기억하는 것 자체가 낭비가 되었으니 언젠가는 전부 잊었으리라.

“왜요?”

“이미 아는 사람에게는 내 속내를 털어놓을 이유가 없고,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한데 예결의 등장에 그 시절의 일을 하나둘씩 꺼내놓고 나니 생각보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등바등 버티는 하루하루가 참으로 괴롭고 구차하다고 여겼는데, 지금 보니 꽤 열심이었던 것 같기도 하구나.”

“맞아요.”

예결은 하량을 꼭 끌어안았다.

“자기 혼자 건사하기도 힘든데 저까지 챙겨주고. 그 개방 방도를 보낸 것도 대사형이었겠죠?”

“네가 어디서든, 원하는 곳에서 뿌리내리고 살아갈 수 있기를 원했을 뿐이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거든.”

“개방의 육결제자씩이나 되는 이가 움직이려면 보통 많은 돈이 든 게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말하면 어떡해요.”

예결이 생각하기엔 가이드에게도 나름의 지침서가 필요했다.

이를테면 〈당연하지 않은 일을 하면 생색내는 법〉이라든가, 〈배은망덕한 에스퍼를 분리수거하는 법〉 같은 거.

주입식 교육이라도 해야지 이대로면-

“당시의 내게 재물은 별 의미가 없었으니까.”

‘봐봐, 또 이런다고.’

머리를 쥐어뜯으려는 손을 애써 내린 예결은 하량을 끌어안고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대사형은 사제의 행동이 영 의아한 듯했으나 그를 품에서 밀어내진 않았다.

“자, 제 말을 따라 해 봐요.”

하량은 말해보라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많이 들었지만 너를 위해 쓴 거니까 괜찮았다.”

“‘돈이 많이 들었지만 너를 위해 쓴 거니까 괜찮았다.’……?”

시키는 대로 따라 하면서도 하량은 이러는 게 맞나, 싶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잘했어요.”

예결은 착잡한 표정을 애써 갈무리하며 하량의 손을 꼭 붙잡았다.

“이미 쓴 돈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상대방한테 부담감이라도 주란 말이에요. 알았죠? 생색을 내야 해요. 생색을.”

주입식 교육 노하우가 너무도 간절했다. 예결은 일타강사 족집게 특강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학은 에스퍼 특수전형으로 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태함이 이렇게 후회가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정말로 돈이 아까운 건 아니었는데.”

“마음이 아깝잖아요. 마음이.”

하량은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예결의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눈물만 흘리지 않았다 뿐이지, 실로 먹먹하고 깊은 눈이었다.

“나한테 그 큰돈을 쓰고도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대사형의 마음을 몰랐다는 게 아까워서 미치겠다고요. 대사형은 나를 그렇게 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긴 세월 동안 대사형은 나한테 관심이 하나도 없었구나 하고 혼자 애태웠단 말이에요.”

예결은 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대사형은 하나도 안 아까울지 모르겠는데 내가, 내가 아깝다고요.”

“그런…….”

하량이 눈을 내리깔았다.

선이 날카로운 얼굴에서 유독 풍성하고 섬세한 속눈썹이 음영을 만들어냈다. 그 탓일까,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도 한 폭의 수묵화처럼 그윽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할 말 없다고 미인계 쓰는 건 상도덕에 어긋나는 거 아닐까.’

예결은 착잡한 심경을 갈무리했다. 어차피 본인은 자각도 없을 거다. 대사형을 탓해봤자 숨겨왔던 마음을 고백하는 꼴밖에 더 되겠는가.

하량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춰왔다.

술렁이는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검은 눈은 재회한 이래 가장 생동감이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 오랫동안,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할지 그렇게나 궁금해했는데 이렇게 듣게 되니 좋구나.”

“상상하셨던 거랑 많이 다른가요?”

예결은 아차, 싶었다. 대사형의 과거를 듣고 욱하는 바람에 제 성질머리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무척 다르지.”

“어떤 면에서요?”

득달같이 질문을 던진 예결은 눈을 빛냈다.

제하량이 하는 말을 머릿속에 잘 메모해 두고 이상적인 사제로 거듭날 의향이 차고도 넘쳤다.

“막연히 상상했던 너는, 항상 나를 원망하고 있었거든.”

“아…….”

예결은 우뚝 멈췄다.

“스스로를 탓할 핑계가 필요해서 너를 자꾸만 불행한 아이로 만들어왔던 모양이야. 그게 못내 미안하고, 또 부끄럽구나.”

“제가 이런 사형을 어떻게 원망해요.”

하량의 얼굴을 붙들고 그의 두 눈을 들여다본 예결은 또박또박 말했다.

“항상 경애하고 있어요.”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나름의 계산을 끝마쳤음에도 예결의 가슴은 어느새 긴장으로 콩닥콩닥 뛰었다.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을 애정을 보여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심장을 꺼내 손에 쥐여준다 한들 실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의 감정이었다.

손끝으로 번개를 부린다 한들 고작 인간에 지내지 않는 예결은 이렇게 말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언어로는 그가 느끼는 모든 것을 형용할 수 없기에 왜곡이나 오해가 생길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말해야 한다.

아니면 상대는 영영 모를 테니까.

하량은 하염없이 예결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다가 사제를 품에 가뒀다. 자력으로 헤어 나올 길 없는 포옹은 다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너를…….”

어찌해야 할까.

깊고 오래된 탄식이 하량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늪처럼 진득하고 족쇄처럼 무거운 대사형의 두 팔 안에 갇힌 포로는 기쁘게 웃었다.

예결이 벗어날 수 없는 만큼, 그의 간수 역시 수인(囚人)의 곁을 떠나지 못할 것을 알기에.

***

“뱀뱀아. 뭐가 좀 보이니?”

예결이 소곤소곤 묻자 금빛 뱀이 꼬리로 옆방을 가리켰다.

지금 그들은 적진의 한복판에 와 있었다.

요 며칠 항주의 여러 상단을 방문한 예결은 장칠의 초대받게 되었다. 놈은 예결이 오삼상단의 장원에 오기만 하면 후하게 대접하겠다는 은근한 암시를 내비쳤다.

장칠이 염색장인을 불러 모으기만 기다리며 그를 부추기기 위해 여기저기 발품을 팔았던 예결은 하량의 묵인하에 초대를 냉큼 수락했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건 예결의 적성도 아니었다.

“슬쩍 옆방을 확인해 보고 오라고 보냈는데 금방 돌아온 걸 보면 저기 누가 있는 모양이에요.”

나란히 앉아 있는 하량에게 들으라는 듯 말한 예결은 거의 벽에 달라붙을 것처럼 가까이 다가가 귀 기울이는 시늉했다.

뱀뱀이를 정찰 보낸 것도, 이 이렇게 벽에 귀를 대는 것도 하량 보라고 하는 퍼포먼스였다. 이 정도 거리에서는 사람 몸속에 흐르는 전기 신호를 느낄 수 있거니와 에스퍼의 청력으로 벽 너머에서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앙큼하기 짝이 없는 사제를 단정한 자세로 앉아 지켜보던 하량이 말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이 여럿 대기하고 있구나.”

차의 향을 확인한 하량은 잔을 바닥에 부어버리고 덧붙였다.

“총 다섯 명이군.”

“그래요?”

하량 덕분에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사람처럼 돌아온 예결은 대사형이 자신의 잔까지 바닥에 부어버린 걸 확인했다.

“차를 어찌 보관했는지, 마셔봤자 입맛만 버리겠더구나.”

“고상한 이들 하는 거 따라 한다고 비싼 차를 사들여 놓고 정작 마시지 않아서 엉망인 모양이네요. 그래도 내오는 술은 괜찮을 거예요.”

예결은 짝귀가 속물이라고 흉보면서 하량의 곁에 찰싹 붙어 앉았다.

‘그래도 내가 더 편하게 느껴지시나 보네.’

멋대로 찻잔을 비워버린 하량에게 불쾌감을 느끼기는커녕, 여기가 적진의 한복판이라는 것조차 잊고 헤벌쭉해지니 큰일이었다.

“네가 원해서 오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다면 얼마든지 말하렴.”

하량이 예결을 슬쩍 충동질했다. 과거 이야기를 들은 후, 대사형은 예결이 장칠과 마주치는 상황 자체를 불쾌하게 여겼다.

과보호가 급물살을 탈 전조였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예결은 태연자약했다.

‘현대로 돌아가서 염장 지르기 대회라도 열면 튀르키예 간 선배 정도는 내가 이긴다.’

우승해서 상금 타면 대사형 한우라도 사드릴 텐데, 여기가 중원이라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문이 열리더니 장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기척을 알아챘다지만 노크 같은 기본 매너도 지키지 않는 사내는 불쾌했다.

신기한 건, 더는 짝귀가 두렵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대사형이랑 한 공간에 있어서인가.’

“숙수가 귀한 분을 대접한다고 어찌나 공을 들이던지…… 얘들아, 가져와라.”

박수를 짝짝 치자 방 안으로 음식이 날라졌다.

고소하거나 맵고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어지럽혔으나 예결의 이목을 잡아챈 건 쟁반 위의 음식이 아니라, 이를 들고 나르는 이들의 면면이었다.

‘어린애들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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