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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06화 (106/203)

106화. 임무 완수 (2)

순간 숨이 텁 막혔다.

탁자로 가려져 장칠에게 보이지 않는 하량의 손이 예결의 손등을 감아왔다.

[지금이라도 일어나자꾸나. 뒤처리는 내가 하마.]

입도 벙긋하지 않은 사내의 다정한 위로에 예결은 기함했다.

‘아니, 대사형은 곤륜에서 파문당했으면서 어떻게 혜광심어까지 써요?’

소리를 안 내고 말을 전달하는 전음입밀은 내공만 받쳐준다면 무림인은 누구나 쓸 수 있다. 다만 전음입밀의 단점이라면 입 모양을 훔쳐보는 것으로 대화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보완한 것이 바로 혜광심어다.

전음과 달리 입을 움직이지 않고도 의사를 전달할 수 있지만 혜광심어가 널리 쓰이지 않는 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내공은 물론이고 일정한 경지 이상의 깨달음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말하자면 남들이 해킹 가능한 공용 와이파이 쓸 때 제하량 혼자 5G 데이터 펑펑 써가면서 음성파일을 전송하는 거다.

“귀여운 아이들이군요.”

예결은 하량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장칠을 향해 말을 걸었다.

손님맞이를 위해서인지 옷도 깔끔하게 입히고 손톱 밑도 깨끗했지만, 저들에게서 풍기는 불행의 냄새를 지울 수는 없었다.

“아이들에게 관심이 있으십니까?”

“어린 것들은 서투르기 마련인데, 잘도 부리시는 듯하여.”

무려 청해상단주가 관심을 보인다는 생각에 들떴는지 장칠은 잘도 입을 털었다.

“손끝이 여물진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가르치면 상단의 충실한 일꾼이 되지요.”

“……충실한 일꾼이라.”

예결은 화사하게 웃었다.

“그거 퍽 구미가 당기는군요.”

지금 예결은 겁에 질린 게 아니었다.

화가 난 거지.

“상단주님께서 저런 어설픈 것들을 데려다가 쓰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려를 숨기지 못하던 하량은 어느새 예결의 의중을 알아챘는지 충성스러운 총관 시늉을 냈다.

“오삼상단의 방식이 흥미롭지 않나. 나이도 어리고 덩치도 작으니 많이 먹지도 않겠어.”

아이들은 저들의 이야기가 거론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바닥만 쳐다봤다.

역시 비정상적이다.

“아이고. 청해상단주님께서 뭘 좀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게다가 먹을 걸 적당히 조여가면서 일을 가르치면 배우는 속도가 아주 빠르지요.”

“이 애들은 몸값은 어느 정도나 되지?”

예결이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척 물었다. 여기에서 몸값이 얼마라고 한마디만 하면 바로 포쾌한테 가서 불법 인신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증언할 작정이었다.

“몸값이라니요. 먹고살기 힘든 형편에 군입 하나라도 덜어내려고 다들 자진해서 아이들을 보내는 겁니다. 침식을 제공해주면서 일도 가르쳐주니 애가 여럿 딸린 집에서는 다들 저희 상단으로 자식을 보내지 못해 안달입니다.”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웃는 장칠의 얼굴은 참으로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 예결은 착취를 그럴듯하게 정당화하는 모습에서 오래전의 짝귀를 발견했다.

‘우리가 너희를 보호해주지 않으면 다 납치당해서 팔려 갈 거다. 운 좋아서 부잣집에 들어간다면 또 몰라, 보통은 배나 섬에 노예로 보내질 텐데. 거기에선 도망도 못 쳐. 알아?’

그 말에 덜덜 떨며 울고 있노라면 짝귀는 역겹게 입꼬리를 쓱 끌어 올리며 웃었다.

‘게다가 많이 먹거나 실수가 잦으면 물고기 밥으로 줘 버리지. 우리가 너희 같은 거지새끼들을 보호해주는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해. 알겠어?’

뺨을 툭툭 치는 칼끝이 언제 귀로 옮겨갈까 전전긍긍하며, 나의 오늘이 내일보다 운이 좋은 걸지도 모른다는 말에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러면 짝귀는 그제야 만족했다는 양 물러나며 침을 뱉고 일갈했다.

‘알아들었으면 빠릿빠릿하게 주머니를 채워오라고.’

어떤 건 변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만에 하나 짝귀가 장칠로 거듭나며 개과천선이라도 했다면 그를 바닥까지 처박을 때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줄어들었을 게 아닌가.

“그런가?”

예결은 급속도로 흥미를 잃은 사람처럼 음식을 깨작거렸다.

“오늘따라 별로 드시질 못하는군요.”

“아이고, 그렇습니까? 제가 숙수를 혼쭐내고 오겠습니다.”

“저희 상단주님께서 입에 들어가는 것에 많이 까다로우신 편이라 그러니 애먼 숙수를 탓하지 마십시오.”

“귀빈의 입맛도 못 맞춰서야 무능한 놈 아니겠습니까?”

“글쎄요.”

하량은 눈을 내리깔더니 여 들으라는 듯 말했다.

“아랫사람은 그저 주인의 취향을 맞출 뿐이니…… 숙수의 탓은 아니지요.”

은근슬쩍 장칠을 구박하는 하량의 솜씨에 예결은 혀를 내둘렀다. 행여라도 못 알아들을까 싶어 적당히 눈치를 주는 타이밍까지 교묘했다.

장칠이 애먼 숙수에게 화풀이하기 전에 움직여야겠다고 마음먹은 예결은 입을 열었다.

“제 총관이 나를 까탈스러운 사람으로 만드는군. 외부에 나설 때는 청해에 있을 때처럼 지낼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않나.”

총관을 나무라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의 은근한 비난에 힘을 실어주는 발언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만……. 실례했습니다.”

실례했다며 하량이 고개를 숙이는 방향조차 예결을 향한 채였다.

그야말로 쿵짝이 잘 맞는 사형제의 공격에 장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잠시, 자리를 비우도록 하겠습니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건만, 계약 때문에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처지인지라 어떻게든 화를 가라앉히고 올 작정인 것처럼 보였다.

아이 하나를 붙들고 가려는 것을 예결이 젓가락을 까딱했다.

“아, 나가는 김에 애들에게 심부름 좀 시키지.”

“……말씀하십시오.”

치밀어오르는 울분을 삭이기 위해서인지 장칠은 다소 느릿하게 답했다.

“음식이 다 식었으니 전부 가져가서 하인들끼리 나누어 먹으라 이르고 숙수에게 새 요리를 내오라고 하게. 고기가 많을수록 좋겠어.”

“여부가 있겠습니까.”

장칠은 이를 악물었다. 청해상단주가 음식을 추가로 가져다 달라고 하였으니 아이에게 손찌검할 수 없게 되었다.

한 명 정도 따로 불러내는 거야 어렵진 않겠지만 그랬다간 대우가 부실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아주 그린 듯한 진상이군.’

설마 애들 몸값을 물어본 게 본인이 사서 데려가고 싶어서인가, 따위의 저열한 생각을 떠올리며 장칠은 성큼성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차 몇 잔에 거래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 물 건너갔으니 술이라도 잔뜩 먹이고 그 김에 저도 좀 취해볼 작정이었다.

술이란 녀석은 원수의 낯짝도 경국지색으로 바꿔주기 마련이니.

장칠과 시중들던 아이들이 방을 나서자 새침하게 앉아 있던 예결은 옷소매를 펼쳤다. 나와도 되냐고 묻는 듯 뱀뱀이의 콧등이 슬쩍 비어져 나왔다. 상 위를 톡톡 두드리자 금빛 뱀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고는 예결이 손가락으로 짚은 자리에 똬리를 틀었다.

예결은 아까처럼 문에 달라붙는 대신 하량에게 물었다.

“다들 갔어요?”

“이 정도면 적당히 멀어진 것 같구나.”

“장칠의 집무실이 이쪽이라고 했지요?”

대사형은 여기 오기 전에 오삼상단 장원의 설계도를 예결에게 보여줬다. 예결은 이런 걸 어디에서 구했느냐고 묻는 대신 그 구조를 머릿속에 꼼꼼하게 새겨놨다.

“그래.”

장원에 들어오면서부터 칸을 하나씩 세던 예결은 그들이 두 번째로 큰 방에 안내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두 칸 옆이 장칠이 일하는 공간이었다.

“설마 직접 갈 생각이라면 별로 권하고 싶지 않구나. 아직 해가 너무 밝지 않니.”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괜찮아요.”

몸을 숙여 뱀뱀이와 시선을 마주친 예결이 속삭였다.

“그럼 이번에도 잘 부탁해.”

예결의 굳건한 신뢰를 업고, 뱀뱀이 요원이 출동했다.

***

장칠의 집무실로 쓰이는 방의 창가에 금빛의 뱀이 나타났다.

창틀을 타고 기어간 뱀뱀이는 기둥에 몸을 감아 들보까지 올라갔다. 그 위를 스멀스멀 기어가던 뱀뱀이는 우뚝 멈추어 섰다.

저 지붕 아래쪽에 따끈따끈해 보이는 쥐가 지나가고 있었다. 혓바닥을 몇 번 날름거린 뱀뱀이는 결연하게 고개를 돌리고 앞으로 전진했다. 그는 보통의 뱀이 아니라 영물이었다. 식탐 같은 본능보다도 목적을 우선시할 줄 알았다.

예결이 일러준 냄새를 따라 이동하던 금빛 뱀이 멈춘 것은 밖에서 느껴지는 열 덩어리의 접근 때문이었다.

뱀뱀이는 잠시 망설였다. 보통 사람은 위를 잘 올려다보지 않는 법이지만 만약을 위해서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천년뇌각망은 들보를 감싸고 있던 꼬리에 힘을 풀었다. 풀썩, 하고 들보 아래쪽에 쌓여 있던 천에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거의 동시에 스르륵 문이 열리더니 한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잠깐 안을 살핀 아이는 별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방에 놓여 있던 서랍에서 무명을 꺼내 밖으로 나갔다.

열 덩어리가 멀어지자 가득 쌓여 있던 비단의 한가운데에서 뱀뱀이의 자그마한 머리가 쏙 하고 올라왔다.

참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고 생각하며 뱀뱀이는 고개를 죽 빼고 주변을 둘러봤다.

소리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천 더미 위에 떨어지긴 했으나 여긴 또 나름의 험지다. 아무리 그처럼 유능한 영물이라도 미끌미끌한 천 위에서 전진하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몇 번 배밀이를 시도해 보았으나 아무리 열심히 움직여도 결국 제자리 기어가기일 뿐이었다.

결국 뱀뱀이는 최후의 비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새끼 고양이의 이빨처럼 앙증맞은 뿔 끝에 전류가 모이기 시작했다. 동글동글한 눈이 세모가 될 정도로 힘을 준 뱀뱀이는 그의 전진을 가로막는 천 위로 초소형 번개를 쏟아냈다.

금빛의 전류가 한순간 바닥을 가로질렀다. 천은 깔끔하게 타들어 가 본래의 형상을 잃었다. 해냈다는 생각에 뿌듯해진 뱀뱀이는 꼬리를 쭉 뻗었다.

보통 이렇게 한 번 힘을 쏟아내고 나면 비실비실해져서 한여름에도 겨울잠을 자게 되는데,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유능한 은인은 뱀뱀이에게 아침저녁으로 뇌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아하기엔 아직 일렀다.

비단이 올려져 있던 나무 책상 위에 검고 길게 탄 자국이 생겼기 때문이다. 당초 목적은 딱 천만 지져버리는 거였던 뱀뱀이는 그 탄 자국을 애써 외면했다.

은인을 따라다니는 인간이 진정한 잠입은 흔적을 남겨선 안 된다고 했으나 때론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다.

목적하던 책상 위까지 기어간 뱀뱀이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책장 사이에서 틈을 발견했다. 서책으로 가려진 곳에 자그마한 홈이 파여 있었는데, 거기에 저번에 예결에게 가져간 것과 비슷한 물건이 보였다.

야무지게 장부를 물어서 밖으로 빼낸 뱀뱀이는 위풍당당하게 작은 가슴을 펴고 예결이 기다리는 방으로 향했다.

오늘도 임무 완수였다.

“아니, 어디에서 이렇게 검댕을 묻혀 왔어?”

예결이 혀를 끌끌 차며 뱀뱀이의 몸을 쓱쓱 닦아냈다.

뱀뱀이의 혓바닥이 날름날름 움직였다. 얼마나 험난한 시간을 거쳤는지 알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뱀뱀이는 자신이 겪은 여정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진정한 천년뇌각망은 본인의 공을 자랑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대신, 꼿꼿하게 몸을 세운 뱀뱀이는 예결을 올려다보더니 꼬리를 들어 올려 척하고 본인의 눈가에 가져다 댔다. 흡사 백전노장처럼 느껴지는 결연함이 흘렀다.

순간 이게 뭔가, 하고 봤던 예결은 그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경례하는 거야? 그게 뭔진 알고?”

생각해 보니 저번에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한 뱀뱀이에게 장난처럼 경례를 붙인 적이 있긴 했다.

작고 차가운 생명체를 꼭 안아준 예결은 뱀뱀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하량에게 자랑했다.

“정말 너무 똑똑하고 귀엽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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