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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07화 (107/203)

107화. 임무 완수 (3)

대사형도 감탄한 기색이었다.

“영물이 이렇게 사람 말을 잘 듣는다는 건 본 적이 없는데……. 어느 정도 지능이 있다면 짐승이라도 사제의 인품을 알아보는 모양이야.”

“맞아요. 뱀뱀이가 원체 영특하다니까요.”

본인 칭찬인 줄도 모르고 반려영물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하량의 눈치를 살핀 예결이 슬쩍 덧붙였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삼랑이 훈련시켜 주기도 했고요.”

그러나 대사형은 예결이 뱀뱀이 공만 자랑해도 별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흥미진진한 일을 많이 한 모양이구나.”

하량은 장부를 들어 올려 펼치더니 말했다. 예결은 뱀뱀이를 소매 속에 안전하게 챙긴 뒤에 그의 어깨 너머로 내용을 확인했다.

“여기 적힌 건……. 물건이라기보단 이름인데.”

이름 옆에 적힌 것은 금액이 아니라 우물 정 자를 그리는 작대기였다. 그 표식이 무슨 뜻인지 알아본 예결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 저 이거 뭔지 알아요. 이자를 몇 달이나 밀렸는지 적어놓는 거예요.”

예결은 짝귀나 독사가 가지고 다니던 적혈파의 장부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사파 낭인도 까막눈인지라 돈이 얼만지, 또 몇 달이나 밀렸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주 간단한 기호를 사용하곤 했다.

“음…… 돈놀이에도 손을 대고 있는 모양이구나.”

“역시 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혀를 차는 사제에게 한 번 눈길을 준 제하량이 물었다.

“몇 개는 붉은색으로 가위표를 쳤는데, 무슨 뜻인지 아니?”

이맛살을 찌푸린 예결은 대사형에게 사실대로 털어놔도 되는지 고민했다.

협객 일 하면서 볼 꼴, 못 볼 꼴 다 봤으리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대사형에게 이런 암울한 이야기를 하는 건 꺼려졌다.

아무리 사철 꽃노래만 부를 수는 없다지만 좋은 이야기만 들려주고 좋은 것만 보여줘도 모자란데…….

“더는 빚을 안 갚아도 된다는 뜻이에요. 보통은…… 원금을 갚아서가 아니라 이자조차 낼 수 없는 처지로 전락했을 때 그렇게 적어요.”

“어쩌면, 저 아이들이 빚 대신에 끌려왔을지도 모르겠구나.”

예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없는 살림에 군입을 덜기 위해 상단으로 보내진 아이들이라고 장칠이 설명하긴 했으나 예결은 처음부터 그 말을 안 믿었다.

하필 사람 이름만 줄줄이 적힌 장부를 발견했으니 오죽하랴.

“이건 내가 맡아두도록 하마.”

하량은 품에 장부를 집어넣었다. 원체 체격이 좋고 가슴이 크다 보니 잘 갈무리한 장부는 티도 안 났다.

예결은 저도 모르게 물끄러미 하량의 가슴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에 힘주는 걸 자꾸 잊으니 큰일이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집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찾아보고 포쾌에게 찔러주면 될 거 같아요.”

본인이 눈으로 대사형을 어루만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열심히 생각해낸 말이 고작 이거라니.

협행 경험만 따지면 제하량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자신이 무림을 떠나 있는 동안에도 하량은 여기 있었으니 이런 일의 절차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리라.

“그래야지.”

하량의 음성은 낮게 가라앉았다.

“이만하면 오늘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은 것 같구나. 식사도 영 시원치 않으니 어서 돌아가는 게 좋겠다.”

예결은 떨떠름한 낯으로 하량을 바라봤다.

솔직히 대사형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예결의 안전일 게 자명했다. 그런 이가 적진의 한복판이라 할 수 있는 곳에 앉아서도 위험을 논하기보다는 음식의 부실함을 지적하고 있으니 정말 장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실감 났다.

애초에 장칠은 대단한 무공의 고수도 아니었다. 어쩌면 전생에도 곤륜의 제자로 수련을 쌓은 시절이라면 이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에스퍼로 각성한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예결은 자신의 공포가 얼마나 열심히 덩치를 불려왔는지 새삼 느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돌아온 장칠이 환하게 웃으며 여러 명주를 줄지어 늘어놓았다. 병만 봐도 값비싸 보이는 것이, 정말 이 거래 성사를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슬슬 다음 약속에 가봐야 할 것 같군.”

예결이 안타깝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니, 다음 약속이라니요?”

“청해에서 항주까지 오는 일이 원체 드무니 만남을 청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어서 말일세. 다시 돌아갈 때까지 하루에 식사만 다섯 번 할 판이야.”

예결의 다음 약속 상대가 잠정적 경쟁자임을 깨달은 장칠은 애써 가라앉힌 열이 다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입술이 부르트도록 아부를 늘어놓았으나 청해상단주는 별 반응이 없었다. 지나치게 어린놈이라 조금만 부추겨도 계약을 쉽게 따낼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이대로면 접대에 돈은 돈대로 쓰고 거래는 물 건너가게 생겼다.

장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젠 정말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예결의 등에 대고 장칠이 외쳤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일각만 기다려 주신다면 제가 모아온 장인들이 비단에 색을 입히는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거의 바짓가랑이를 잡을 기세였다. 그러나 하량이 앞을 막아선 까닭에 장칠의 손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염색이 뭐 그리 특출난 일이라고.”

예결은 심드렁한 투로 말했으나 내심 쾌재를 불렀다. 뱀뱀이 덕에 장부도 손에 넣었는데 선예공방 일까지 해결된다면 돌 하나로 꿩 두 마리를 잡는 셈이다.

‘애초 목적은 오히려 염색 장인 쪽이긴 하지.’

부수입을 잘 챙긴 하량의 가슴팍에 시선을 준 예결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눈을 돌렸다.

“실제로 보시면 놀라실 겁니다. 저희 오삼상단이 확보한 염색 장인들은 중원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색을 만들어내니까요.”

예결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오삼상단주의 얼굴을 봐서 마지막으로 한번 믿어보지. 안내하게.”

큰 마음 먹었다는 듯 허락하자 짝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사람을 안내했다.

“여기로 오시면 됩니다.”

짝귀의 인도를 따라 당도한 장원의 뒤쪽에는 조금 을씨년스러운 별채가 있었다. 문손잡이에 사슬 모양으로 홈이 팬 걸 발견한 예결은 모르는 척 정면만 바라봤다.

문이 열리자 염료 냄새가 진동했다. 예결은 코끝을 찌르는 독한 향에서 불쾌감이 아닌 친숙함을 느꼈다.

선예공방의 일꾼으로 보이는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들은 마당에 천을 바삐 부려놓고 있었다. 비단은 예결의 기억보다 선명한 색을 자랑했다. 다만 제대로 말리지 않아서인지 군데군데 얼룩이 진 게 보였다. 공방을 그렇게 부숴놓고 남에게 내보일 결과물을 급조하려 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보시다시피, 아주 선명하게 색을 입힐 수 있습니다. 여기 장인들만 아는 후처리를 거치면 천을 몇 번이고 빨아도 색이 빠지지 않지요.”

“이렇게 선명하고 화사한 색은 처음 보는군.”

예결의 감탄은 반쯤 진심이었다. 그가 항주를 떠나고 수십 년이 흐르긴 했다지만 선예공방은 꾸준히 염료를 개발해온 눈치다.

천을 꼼꼼히 확인하는 척 일꾼 사이로 걸음을 옮긴 예결은 장칠이 방심할 때까지 염색하는 데 드는 염료의 밑 재료가 어느 정도의 가격인지, 비단 한 필을 완전히 염색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등을 집요하게 물었다.

무슨 협박을 당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선예공방의 일꾼으로 보이는 이들은 예결의 질문에 충실하게 답했다.

“제 총관. 오삼상단주와 조건을 논의해 보게.”

다시 말해 장칠을 붙들어달라는 부탁이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저와 대화 좀 하시지요.”

장칠은 입이 귀에 걸려서 제하량을 쫓았다. 젊다 못해 어려 보이는 예결보다 총관이 실무를 꽉 잡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예결을 몇 번 힐끔거린 뒤에는 아예 돌아보지도 않았다.

마침내 장칠과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졌을 때, 비단을 펼쳐 귀퉁이의 얼룩을 짚은 예결이 여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황 노야가 이런 얼룩을 봤으면 뒤집어졌겠군.”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중년 남성에게서 유의미한 동요가 전해졌다. 망설이던 그가 장칠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더니 예결에게 다른 비단을 보여주려는 척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화, 황 노야를 아십니까?”

“음? 자네는?”

혼잣말에 반응한 남자가 짝귀의 눈치를 한 번 더 본 후에야 자신이 누군지 소개했다.

“선예공방의 구영익이라 합니다.”

“선예공방? 선예공방이라고? 이거 믿기지 않는군.”

예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내에게 일갈했다.

“내가 선예공방의 황 노야와 먼 친척 관계라는 걸 아는 이는 별로 없는데, 오삼상단주가 자네에게 알려준 건가?”

장칠이 예결을 보지 못하게끔 달달 볶고 있던 하량의 입가가 허물어질 뻔했다. 먼저 황 노야의 행방을 물어볼 거라 생각했던 사제가 대뜸 호통을 치는데 그 태도가 여간 천연덕스러운 게 아니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저희는 오삼상단주와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닙니다.”

“아니, 최근 상단에서 개발한 염색 기법을 보여준다고 하여 내 별채까지 왔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대사형의 동요를 알아챘음에도 예결은 뻔뻔하게 연기를 이어 나갔다.

“저희 모두 오삼상단에 빚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빌릴 때와 갚을 때 마음이 다르다지만, 고작 그 때문에 장 상단주를 음해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구영익은 울먹였다.

예결은 그 표정에서 자신이 공방을 드나들던 시절, 아직 젊은 나이였던 일꾼을 한 명 떠올렸다. 실수가 잦았는데 매번 소처럼 그렁그렁한 눈을 해서 크게 혼난 적은 없다.

당시엔 구씨 청년이라고만 불렸는데 이름이 영익이었던 모양이다.

“놈이 저희에게, 선예공방에 의도적으로 빚을 씌웠습니다.”

구영익의 울먹임에 예결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장칠이 아무리 번듯한 상단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한들 이건 불가항력이다.

샛길이 있다는 걸 아는 자들은 절대 대로로 다니지 않는다. 이렇게나 쉽고 편한 길을 두고 법도를 지키는 인간들이 오히려 머저리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닌 거 같군.”

예결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네, 그 이야기 좀 더 자세하게 말해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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