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임무 완수 (4)
“오삼상단주가 처음 나타난 건 일 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구영익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낙양에 항주의 천을 좋아하는 부호에게 팔아야 한다며 비단을 대량으로 주문했지요. 처음에는 다들 좋아했습니다. 큰 거래가 들어왔으니 자식들 새 신발도 사주고, 별로 특별한 날이 아닌데도 고기를 사다 요리해 먹고 말입니다.”
그때의 기분을 떠올렸는지 구영익은 눈시울을 붉혔다.
“처음 몇 번은 거래가 성공적이었습니다. 대금도 제때 들어오는 데다가 값도 워낙 후하게 쳐줬지요.”
“음…….”
“오삼상단주는 저희에게 맡기는 물량을 점점 늘려갔지요. 기존 거래처를 끊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입니다. 낮과 밤을 지새워가며 일했지만 감당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사람 몸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예결이 신중하게 들어주자 구영익은 장칠이 있는 방향을 한 번 더 확인하고는 속삭였다.
“황 노야는 반대했습니다만, 상대적으로 젊은 일꾼들은 돈을 벌고 싶은 마음에 기존 거래처와 손을 끊고 오삼상단과 미래를 도모해 보는 쪽으로 의견을 밀어붙였습니다.”
남자의 얼굴에는 지독한 후회가 묻어났다.
“오삼상단과 독점 거래를 따내고 첫 납기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물건을 넘기려고 쌓아놓은 창고에 불이 났지 뭡니까? 다들 황망해서 어쩔 줄 몰랐지요.”
구영익의 한숨이 깊어만 갔다.
“오삼상단주는 인심 쓰는 척 기한을 늘려주었습니다. 황 노야께서 발품까지 팔아가며 새 비단을 가져와 물들이기 시작했지요. 완전히 손해였습니다. 그래도 다음 거래도 성사되었으니 당분간 허리띠를 바짝 조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요.”
“……내 맞혀보지.”
예결이 코끝을 찡그렸다.
“두 번째 거래 때도 물건을 납품하지 못했군.”
“예. 선예공방은 그때부터 주변에 빚을 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조금씩……. 정말 조금씩 말입니다.”
이미 그 결말이 정해진 내리막길이다. 그럼에도 저들이 어떻게든 선예공방을 살려보고자 노력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돌연 항주 바닥에 선예공방이 돈을 갚을 능력이 없다는 소문이 짜하게 퍼졌습니다. 적혈파라는 사파에서 저희 채무를 헐값에 인수했고 그때부터 공방에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 행패를 부리는 낭인들이 생겼습니다.”
예결은 적혈파가 치고 들어오는 타이밍에 혀를 내둘렀다. 번듯한 상단주 노릇을 하면서도 어째 적혈파와 여전히 손을 잡고 있더라니…….
멀쩡한 사업체를 집어삼키는 데 쓰려고 계속 선을 대 놓은 모양이다.
“그, 그러다가…… 여기저기 돈을 빌리러 다니시던 황 노야가 쓰러지시고, 작년에 그만…….”
남자는 눈물을 훔쳤다. 여전히 소 같은 울음소리다.
황 노야가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다는 사실에 예결의 기분이 복잡해졌다.
“적혈파에서 몸으로라도 갚으라며 저희를 끌고 갔습니다. 염색 기술을 알려주지 않으면 손목을 잘라 버리겠다고 협박했지만 그것마저 털어놓으면 정말 다들 뿔뿔이 흩어져 팔려나갈 듯해 아득바득 버티고 있었습니다.”
“허어.”
예결은 혀를 찼다.
“그러니까…… 사파까지 이 일에 끼어들었다는 거군.”
“예. 이 빚에서 평생 못 벗어나겠구나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며칠 전, 저희를 오삼상단으로 데려오더군요.”
구영익의 목소리에 비장함이 깃들었다.
“이미 짐작하긴 했으나 이 모든 일의 배후가 장칠 상단주였던 겁니다.”
“미쳤군.”
예결은 일부러 장칠 쪽을 돌아봤다.
“쉬, 쉬. 저쪽을 보면 안 됩니다.”
구영익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예결의 이목을 끌었다.
“그렇게 저희를 모아놓은 오삼상단주가 새 고객이 왔고, 선예공방을 빚더미에서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며 전적으로 협력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비단을 새로 염색하라며 말이지요.”
“그래서……. 다들 협조한 건가?”
“다들 항주에 기반을 두고 있으니 어찌 놈의 협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공방의 빚을 빌미로 자식까지 데려다가 노예로 부리겠다고 하여…….”
구영익이 울음소리를 애써 삭혔다. 그는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장원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희 말고도 아이들! 아이들도 잡혀 있습니다. 이 미친 자가 인신매매에도 손을 대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이해했네.”
예결은 마지막 확인 차원에서 물었다.
“지금 적혈파의 문주는 누구지?”
“부독서생 공야도입니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내심 독사가 살아 있었으면 했던 예결은 아쉬움을 삼켰다.
“원래 하남칠서 중 맏이였지만 협객의 손에 동생들이 다 죽은 후 여기로 왔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추적하는 괴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동생 여섯 모두를 미끼로 던졌다고 했습니다.”
“괴호라.”
뜻밖의 장소에서 듣게 된 아는 이름에 예결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고 보니 삼랑이 지나가듯 마을을 사들이고 녹림채 녀석들을 시켜 가꾸는 중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생각에 잠긴 예결은 장칠이 이 방향으로 몸을 돌린 걸 확인했다. 하량은 예결의 대화가 끝났다는 걸 듣고 있었기에 장칠을 붙잡지 않았다.
‘역시 우리는 손발이 잘 맞는다니까.’
그야말로 꿈의 페어다.
“이야기는 이만하면 됐네.”
예결은 구영익을 자연스럽게 외면했다. 구씨 청년, 아니 이제 구씨 중년이라 불러야 할 사내는 소처럼 울멍울멍한 눈을 숨기기 위해 일꾼들 사이로 섞여들어 갔다.
“이렇게 저희 상단을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다 장 상단주의 안목이 빼어나 좋은 물건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아이고, 이거 부끄럽습니다.”
여태 늘여 빼던 게 거짓말이었다는 양 사근사근해진 예결의 태도에 장칠이 헤벌쭉 웃었다.
“좋은 날이니 술이나 마시고 싶군.”
장부도 빼돌렸겠다, 증언도 확보했으니 장칠이 이를 확인하고 대비할 틈 자체를 없애버릴 작정이었다.
“바로 술을 가져오겠습니다.”
예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제 총관, 항주에서 가장 이름난 기루가 어디지? 기왕이면 성주님처럼 높은 분이 다니는 곳으로 말이야.”
말의 행간에서 예결의 암시를 읽어낸 하량이 답했다.
“음……. 아마 총월루가 가장 유명하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렴요. 성주님뿐이 아니라 항주에서 돈 좀 쓴다는 치들은 다 그쪽으로 갑니다.”
예결은 우아하게 턱짓했다.
“안내하게.”
***
그날 밤, 총월루에서 수하들과 함께 달과 풍류를 즐기던 성주는 불현듯 잠에서 깨어났다. 분명 술을 잔뜩 마셨던 것까진 생각이 나는데 대체 언제 잠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배 위에 무언가 묵직한 게 놓여 있었다. 버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성주는 배 위에 놓여 있는 것이 모종의 장부임을 깨달았다.
대체 뭔가, 하고 펼쳐서 내용을 확인한 성주의 낯이 무섭게 굳었다.
「황삼. 다섯 달 이자가 밀려 해적선으로 팔려 감.」
「진진. 여섯 달 이자가 밀려 수채로 팔려 감.」
「정휘종. 석 달째 이자가 밀리는 중. 아이들을 확보했음.」
「…」
「…」
「…」
가장 마지막 장에는 거친 붓글씨가 휘갈겨져 있었다.
「항주에서 횡행하는 인신매매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낙양의 관리를 발견했습니다. 일이 황상께 알려지기 전에 결단을 내리소서.」
자신의 코 밑에서 황제가 금한 인신매매가 벌어지고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놀고먹는 삶은 끝이다. 다시는 총월루의 계월이 연주하는 비파에 시름을 달래기는커녕 황궁 수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가진! 가진!”
성주는 거의 발작하듯 비명을 질러 수하를 불렀다.
“성주님. 부르셨습니까?”
그는 장부의 가장 앞에 적힌 이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당장! 오삼상단주와 적혈파의 문주를 잡아들이게!”
“존명.”
***
총월루의 지붕에 앉은 예결은 차가운 밤바람에 코를 훌쩍였다. 그러기가 무섭게 어깨에 묵직한 것이 내려앉았다.
하량의 체취가 묻어나는 겉옷을 꼭 끌어안으며 예결은 그야말로 야단법석이 난 아래층에 귀를 기울이다가 하하, 하고 짓궂게 웃었다.
“성주가 제대로 확인했네요. 이제 적혈파랑 오삼상단도 끝이다.”
한창때의 소년 같은 사제의 얼굴을 지켜보던 하량이 술병을 건넸다.
분명 차가운 술이었던 것 같은데, 은은한 훈기가 맴돌았다.
‘내공을 사용해서 데워주신 건가?’
홀짝홀짝 내용물을 마신 예결은 따뜻한 술에서 나는 향기에 감탄했다.
“이 정도로 만족하느냐?”
하량의 질문에 예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번듯한 신분으로 백주대로를 걷지 못하게 되었잖아요.”
삼류 낭인이 손을 털고 평범한 이처럼 사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사파의 내로라하는 거두도 금분세수에 실패하고 과거의 악연을 만나 살해당하기 마련이다. 장칠은 이를 악물고 상단을 가꿨을 거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온갖 편법을 동원했을지언정 제 나이의 반토막도 안 되는 젊은이에게 굽신거릴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예결은 장칠이 얼마나 허망할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아쉽구나. 여기에 퍽 잘 어울리는 장식 같은데.”
하량이 턱짓한 쪽으로 고개를 돌린 예결은 지붕에 거꾸로 매달린 채 버둥거리는 장칠을 눈에 담았다.
피가 쏠린 얼굴은 터질 듯 붉었다. 하량이 아혈을 짚어 점혈한 까닭에 낑낑대는 신음조차 낼 수 없으면서 예결을 저주하고 있었다.
“감옥에 넣어놓으면 안 되나요?”
예결의 질문에 하량이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보통 저러면 못생겨 보일 법도 한데 그저 수심이 깊어 보일 뿐이었다.
‘서시가 인상을 써도 예쁘다는 고사가 영 거짓말은 아닌 거지.‘
대사형은 미간을 좁혀도 잘생겼다.
“그래봐야 탐관오리들 호주머니나 불려주고 풀려날 테지. 그런 게 관행이니까.”
장칠이 전 재산이라도 바쳐서 어떻게든 빠져나올 거라는 암시에 예결은 혀를 찼다.
“하지만 만약 도주한 인간인 것처럼 처리하면…….”
하량이 은근슬쩍 뜸을 들였다.
“분명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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