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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09화 (109/203)

109화. 임무 완수 (5)

“어떻게요?”

예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성주는 책임질 인간을 필요로 할 테고, 실종된 이가 있다면 전부 뒤집어씌울 테니까.”

하량이 예결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지붕에 올라와 성주의 반응을 지켜볼 때만 해도 차갑던 손이었으나 지금은 손가락의 마지막 마디까지 훈기가 돌았다.

이게 다 하량이 건네준 술 덕분이었다.

“저자가 밉지 않니?”

“미워요.”

밉다는 말 정도로 이 감정을 형용할 수 있을까.

너무 오래전에 두고 온 까닭에 닳지도 않은 증오가 예결의 가슴 깊숙한 곳에 새까만 색으로 남아 있었다. 구영익이 보여준 선예공방의 붉은 비단보다 선명한 분노도 함께였다.

예결의 시선이 장칠에게 닿지 제 운명을 직감한 이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총관이라는 이에게 상단주가 말을 높이는 것도, 더 나아가 예결이 자신을 증오한다고 말하는 것도 모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나 하나는 확실했다.

청해상단주는 처음부터 장칠을 짓밟기 위해 손을 내민 거였다.

“네 손으로 직접 해치울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으냐?”

대사형의 음성이 한층 낮아졌다. 그의 속삭임에 예결은 솔깃함을 느꼈다.

동시에, 옅은 이질감이 그를 찾아들었다.

“황 노야가 불과 얼마 전에 죽었다지. 만약 장칠이 아니었다면 네 은인이 여전히 살아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니?”

원래 협객이라는 건 조건 없는 선을 뜻하지 않는다. 도산검림에서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결국 힘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복수를 말하는 하량의 얼굴은 예결에게 낯설었다.

예전의 그가 알던 곤륜운룡 제하량은 증오를 담을 줄 모르는 그릇이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감정만 새어 나가는 그릇이 과연 멀쩡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이 떠나 있는 동안 하량이 변했다고 해서 새삼 충격을 받는 것도 이상하다.

이십 년이면 강산도 두 번이 바뀔 시간이다. 심지어 예결은 그사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기까지 했다.

예결이 무림인에서 21세기의 에스퍼로 거듭나는 동안 하량 역시도 변화를 겪었으리라.

‘곤륜에서 파문당한 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재회한 이래 예결을 죽 괴롭혀온 호기심이었다.

일단 흑귀가 된 것만 봐도 하량이 더는 양지의 인물이 아님은 확실했다. 장칠에게 직접 손을 쓸 것을 권유하는 걸 보면 사마외도로 길을 틀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거의 확실하다.

그간 지켜본 제하량은 곤륜에서 파문당했음에도 여전히 무림인이었다. 그것도 혜광심어까지 사용하는 고수이기까지 하다. 더는 곤륜의 무공을 쓸 수도 없을뿐더러 정파무림의 다른 문파에서 받아줄 리도 없는 사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익혀 지금의 경지에 올랐겠는가?

답은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사파냐 마교냐 그것이 문제일 뿐이지.’

예결을 하량이 살고자 한 선택을 비난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원수 중의 원수라 할 수 있는 마교에 들어가진 않았으리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그럼 선예공방으로 가도 될까요?”

하량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이미 말했듯이.”

손을 뻗은 하량은 장칠의 멱살을 쥐고 그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렴.”

달 밝은 밤, 묵으로 그린 듯한 고아한 미남은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장칠을 쥐지 않은 다른 쪽 손을 내미는 하량에게 예결은 자연스럽게 다가가 몸을 기댔다. 허리를 단단하게 감아오는 손길에서 깊은 안정감마저 느껴졌다.

하량이 발을 성큼 내딛자, 그들은 밤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항주의 숱하고 화려한 불빛이 발밑에 놓였다.

중원의 불야성이 아득하고 넓게 펼쳐져 있었다.

지붕에서 지붕으로 넘어갈 때마다 흥겨운 목소리와 노랫소리, 악기의 연주가 어우러졌다. 등을 잔뜩 밝힌 거리에는 밤을 낮처럼 거니는 풍류객과 호객꾼이 가득했다.

이 높고 어두운 지붕 위를 거니는 그림자는 전혀 모르는 채, 천진한 쾌락에 젖어 있는 이들이 한가득하다.

예결은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너울너울한 불빛이 하량의 얼굴을 반쯤 밝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저 높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밤에 잠겨 있다는 것도.

화려한 저자를 내려다볼 법도 하건만 하량의 시선은 무심하게 저 먼 곳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예결은 빛일랑 찾아볼 수 없는 어둡고 먹먹한 눈을 훔쳐보며 밤바다를 떠올렸다.

달이 어두워 배조차 띄울 수 없는 멀고 깊은 바다를.

“여기인 것 같군.”

돛대도 없고 삿대도 없이 검은 밤을 가로질러, 마침내 그들은 선예공방에 도착했다.

하량의 품에서 내려온 예결은 무참히 방치된 건물의 한복판으로 나아갔다. 하량은 장칠을 질질 끌어다가 예결의 발치에 던져주었다.

멱살이 잡힌 채 끌려오는 동안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예결은 장칠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자신이 어릴 적 올려다보곤 했던 짝귀는 그 시절보다 풍채가 훨씬 좋아졌음에도 한 손으로 잡고 흔들 수 있었다.

놈이 가벼워진 게 아니다. 예결이 그만큼 성장한 거였다.

새삼스러운 감회를 느끼며, 예결은 장칠을 질질 끌어다가 움푹 파인 바닥에 처박았다. 본디 염료를 담기 위해 파 놓은 곳인데 방치되었던 동안 염료뿐이 아니라 빗물도 함께 고여 묘한 냄새가 났다.

비명을 못 지르게 아혈만 짚었을 뿐, 팔다리가 자유로운 장칠은 구속에서 풀려나기가 무섭게 허우적거리며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예결은 밖으로 나오려 하는 장칠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예결은 돌아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대사형, 괜찮으시다면 저 혼자 이 자를 처리해도 괜찮을까요?”

내숭을 부려야 한다는 마지막 자각 정도는 있었기에 양해를 구하는 거였다.

“혼자 괜찮겠니?”

하량의 걱정 섞인 목소리에 예결은 뱀뱀이가 들어 있는 왼팔을 들어 올렸다. 자욱한 구름 사이로 비치는 희끄무레한 달빛에 금색 비늘이 반짝였다.

사제가 일개 낭인 정도는 얼마든지 손볼 수 있음을 재확인한 하량은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언제든지 부르렴.”

“네. 금방 끝낼게요.”

장칠이 바닥을 짚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염료로 얼룩덜룩해진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왜? 하고 놈의 입술이 벙긋거렸다.

“내가 누군지 생각이 안 나나 보네.”

예결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내가 그동안 잘 먹고 잘 크긴 했어.”

그뿐이랴, 다시 태어나기까지 했다. 졸지에 회춘한 셈이니, 짝귀처럼 아둔한 이가 알아보지 못한대도 할 말은 없었다.

예결은 특별히 힌트를 주기로 했다.

“어딜 도망가든, 누구의 그늘에 숨든 무조건 찾아낸다며. 안 그랬나?”

장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서서히 그의 눈에 번지는 경악을 본 예결은 방긋 웃었다.

“오랜만이야. 짝귀.”

짝귀는 입을 뭐라 뭐라 벙긋거렸으나 소리는 단 한 자락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아마 조금 있으면 점혈은 풀릴 거야. 혼자 떠드는 것도 재미없는데, 다행이지.”

“흐…… 흐어…….”

때마침 구질구질한 흐느낌이 장칠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바닥을 기는 그의 어디에서도 대인의 풍모 따위는 엿볼 수 없었다.

“돌아가는 상황은 다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해. 항주성의 성주에게 그쪽의 비리가 담긴 장부가 들어갔어. 오삼상단은 국가에 몰수당하게 될 거야. 너는 현상수배범이 되겠지. 적혈파에 파견된 관군은 네 과거를 알아 올 거고…….”

“허억.”

장칠이 헛숨을 들이켰다. 예결은 적당히 그가 이 상황을 소화할 시간을 줬다.

원래 뜨거운 물만 붓는 것보다는 냉탕 온탕을 오가야 더 충격이 큰 법이다.

“모두 알게 되겠지. 오삼상단의 장칠 대인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예결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너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짝귀일 뿐이었어.”

장칠의 입에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아니야. 말도 안 돼. 나는, 나는……! 으아아!”

괴로운 척 머리를 쥐어뜯던 남자가 바닥을 박차고 예결에게 달려들었다. 원래 바닥을 구르던 낭인이었기에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 짝귀는 염료를 냅다 예결의 얼굴에 뿌렸다.

그러나 일류무인은커녕 이류무인조차 되지 못한 짝귀의 움직임은 에스퍼인 예결에겐 손쉽게 읽혔다.

“머리 쓰기는.”

몸을 슬쩍 옆으로 비틀어 짝귀의 공격을 피한 예결은 그의 몸을 걷어차서 쓰러뜨렸다. 다시 염료통에 처박힌 짝귀는 등을 짓눌러오는 발에 고개가 몇 번이나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접싯물에 코 박고 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이는 두려움이나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사, 살려…….”

“한 번만 봐달라고 싹싹 빌던 애들한테는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다는 삶의 진리를 알려준다더니, 정작 본인 일에는 또 적용을 못 하네.”

“내,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습니다. 배운 게 없어서 그랬어요. 응? 정말이다.”

짝귀는 눈물인지 염료인지 모를 액체가 뒤범벅이 된 얼굴로 애걸했다. 횡설수설하며 존대와 반말을 오가는 말은 그가 공포로 반쯤 돌아버렸다는 걸 보여주었다.

“만약 나를 살려준다면 오삼상단의 비자금이 어디 보관되어 있는지 말해주겠다. 응? 제발. 아이고 대인 부탁드립니다…….”

“음.”

예결의 눈이 금빛으로 빛났다.

“그게 나한테 별로 매력적인 제안은 아니라서 말이지.”

그의 손끝에서 휘몰아치는 전류가 주변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사위를 밝혔다.

옷소매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던 금빛 뱀이 고개를 내밀었다.

‘비현실적이다.’

짝귀가 처음 느낀 건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빛이었다. 조금 적응되기가 무섭게 들어온 광경은 한순간이나마 공포를 뒤로하게 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밤하늘을 뒤로한 채, 홀로 태양처럼 빛나는 소년은 신화의 한 토막을 오려다가 붙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팔목을 휘감은 뱀조차 어떤 상징처럼 느껴졌다.

“어차피 반성도 안 하는 거, 빌지도 말라고. 계속 그따위로 살아왔으니까 앞으로도 그렇게 살았을 테고. 언제 죽으나 결국 지옥에 갈 텐데.”

아니지. 다시 태어나려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린 예결이 웃었다.

“뭐, 상관없어. 이제 당신이 별로 무섭지 않다는 걸 알았거든.”

얼마든지 치워버릴 수 있다.

마무리를 하기 전, 예결은 마지막으로 뱀뱀이의 머리를 토닥였다.

“뱀뱀이는 아직 어리니까 이런 거 보지 말자.”

힘을 끌어올리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비죽 내밀었던 금빛 뱀은 예결의 손길에 다시 소매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처음엔 꾸물꾸물 움직이던 서늘한 뱀뱀이의 몸통이 다시 팔을 안정적으로 휘감았다. 예결은 짝귀가 들어간 물속에 손을 담그기 전, 상냥하게 경고했다.

“환자분, 셋 세면 살짝 따끔합니다.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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