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임무 완수 (8)
예기치 못한 행위에 지쳤는지 거의 기절하듯 잠든 사제의 뺨에서 가까스로 손을 거둔 하량은 장원을 나섰다.
그는 그림자가 끝도 없이 늘어져 길게 이어지는 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태양 아래 깊은 밤의 화려함을 잃고 잠들어버린 항주의 건물을 지나고 번화가 다리를 건너 뒷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선예공방으로 가는 길이 보였다.
황 노야를 찾아주겠노라 예결을 데리고 염색공방에 간 것은 일종의 확인 절차였다.
사제가 자신 외의 애착을 가지고 있는 대상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래야 마의의 제자가 한 헛소리를 여봐란듯이 부정할 게 아닌가.
무엇을 보게 될지도 모르는 채 하량은 사제의 등을 떠밀었다.
골목골목 거쳐 당도한 선예공방은 누군가의 습격으로 엉망이 된 상태였다. 하량은 본인이 미리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망가진 염색공방을 둘러보는 예결의 시선은 풍랑이 잦은 바다 위의 달그림자처럼 휘청였다.
다음 순간, 사제는 몸을 웅크린 채 속삭였다.
여기에서 나가야 한다고.
개암색 눈에 자리를 잡았던 건 분명 두려움이었다.
자신이 무얼 한들 몸을 맡기던 아이다. 흑귀의 험악한 생김마저 두렵지 않다고 대담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바로 그 사제가 처음으로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제 의사는 상관없이, 이미 이 공방은 끝난 거예요. 설령 황 노야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엮이지 않는 게 좋아요.”
그래서 하량은 예결을 붙잡았다. 붙잡아야만 했다.
“고작 향 한 번 올리고 말 일인걸요. 대단한 숙원도 아니고 대사형이 물어보지 않으셨다면 기억해 내지도 못했을 텐데, 무엇 하러 번거롭고 험한 일에 얽히지요?”
어쩌면 예결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얻는 거 하나 없는, 번거롭고 험한 일이다.
그러나 하량은 흔쾌히 여길 나서자고 말할 수 없었다.
하량은 사제가 무언가를 포기하는 걸 원치 않았다. 이 세상 무엇이든 그의 앞에 가져다주기로 맹세하지 않았던가.
‘차라리 황 노야라는 자가 살아 있으면…….’
부질없는 희망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바람을 품은 건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사제에게 약속한 바를 지키기 위해, 하량은 선예공방의 뒷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다가 의외의 인물이 낚싯대 끝에 걸려 나왔다.
바로 오삼상단의 장칠이라는 자였다. 사제는 그의 얼굴을 바로 알아봤다. 본디 적혈파 소속의 사파 무인으로, 예결과 다른 항주의 고아들을 착취하던 자였다.
사제는 별거 아니라는 듯 짝귀와 독사의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었다.
그저 듣기만 했음에도 하량의 속은 어지러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미 가야 할 길을 아는 이처럼, 하량의 걸음은 망설임 없이 뒷골목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 피고름 냄새와 독한 염색약 냄새 위에 하량이 뿌려 두었던 천리추종향이 머물러 있었다.
문 대신 누더기나 다름없는 천이 다 쓰러져가는 집 입구에 걸쳐져 있었다. 포렴에 묻어난 검붉은 얼룩을 확인한 하량은 검집으로 천을 열었다.
창조차 없어 어둑한 방구석에 웅크린 장칠이 보였다.
목표물을 발견한 하량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피어났다.
독사는 사파 간의 싸움에 휘말려 오래전에 죽었으나 짝귀라도 살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량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마의의 여덟 번째 제자, 진팔을 베어 넘길 때만 해도 복수의 기쁨 따위는 맛보지 못했다. 아주 오래된 임무를 완수한 듯, 깊은 피로감을 느꼈을 뿐이다.
이 세상에서 마의의 흔적을 지우는 건 이젠 그저 의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짝귀 장칠을 앞에 두고 느끼는 희열은 그와 판이했다. 여느 때보다도 생동감 있게 혈관을 타고 내달리는 감정에 심장이 뛰었다.
이런 감각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게 진정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마의가 던져 준 마공을 강제로 익히게 된 후, 하량은 점점 더 잔혹해지고 날카로워지는 성격을 숨기기 위해 최대한 감정을 절제했다.
무의식중에 피를 갈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살리는 일보다 죽이는 일이 더 달가워졌을 때, 하량은 스스로를 억압하는 것 외에는 그 충동에서 헤어 나올 방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여 그때 이후로 무뎌진 감정은 무얼 해도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살아 돌아온 예결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천천히 걸음을 옮긴 하량은 기다렸다.
아직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덜 된 것처럼 보이는 장칠에게 그 정도의 아량을 베풀 용의는 있었다.
사위가 지나치게 고요해지자, 장칠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이마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너절한 붕대가 감겨 있었고, 그 아래로는 충혈된 붉은 두 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공포에 질려 잠을 제대로 청하지조차 못했던 장칠은 하량을 발견했음에도 한 발짝 늦게 반응했다.
“제, 제 총관……!”
이것이 악몽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걸 깨달은 장칠은 비명을 내질렀다. 거의 동시에, 장칠은 몸을 일으켜 문을 향해 내달렸다. 살고자 하는 본능에 몸을 맡긴 장칠은 태어나서 가장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장칠의 상황판단력은 대체로 좋은 편이었고 덕분에 그는 독사가 죽을 때도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의 운명이 장칠의 행운을 압도했다.
찢어진 누더기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을 향해 손을 뻗기가 무섭게 무언가가 목덜미를 잡고 뒤로 확 끌어당겼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장칠은 데굴데굴 구르다가 벽에 부딪혔다. 대체 무엇이 자신을 잡아챘는지 알 수 없어 장칠은 두리번거렸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하량은 처음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렇다면 제 몸을 뒤로 끌어당긴 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귀, 귀신……?’
무림인이었다지만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사파 나부랭이인 장칠은 곧바로 허공섭물을 떠올리지 못했다. 장칠이 살면서 만난 가장 강한 고수는 적혈파에 파견되었던 사마련의 부대주가 전부였다.
하량의 서늘한 시선은 그의 발치에 넝마처럼 나뒹구는 사내에게로 향했다.
“제발, 제 총관……. 한 번만 눈감아 주게.”
지난 하루 동안 장칠은 가까스로 선예공방을 벗어나 오래전 몸담았던 항주의 뒷골목에 숨어들었다. 언제 적혈파의 추적이 시작될진 모르지만 원래 등잔 밑이 가장 어두운 법이었다.
무엇보다도 여기에서 멀리 달아날 여력이 없었다. 돈도 없을뿐더러 범죄자가 되었으니 낙양에 대 놓은 연줄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발만 동동 구르며 오도 가도 못 하고 있던 중, 청해상단의 제 총관에게 발각당하고 만 것이다.
‘아니, 정말 총관이기는 한가?’
처음 본 순간부터 비범하다고 여긴 사내는 상단주를 앞세운 채 한 발짝 물러나 있을 뿐, 제대로 된 기세를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제 총관은 붓이 아니라 검을 든 채 장칠을 마주하고 있었다.
사파 낭인 생활을 하면서 온갖 인간을 다 만나봤다. 개중에는 사람 백을 죽였다는 살인귀도 있었고 해적을 상대해본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경험도 지금 장칠이 느끼는 살기에 견줄 수 없었다.
아직 제하량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음에도, 장칠은 제 목이 졸리는 환각을 봤다.
아니,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장칠을 뒤로 잡아당겨 내던졌던 것처럼, 무형의 힘이 장칠의 멱살을 쥐고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비로소 장칠은 무엇이 자신을 움직이고 있는 건지 알아챘다.
“허, 허공섭물?”
무림인 사이에서도 전설로나 거론되는 경지에 올라야 행사할 수 있는 힘이다.
장칠은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저 정도의 고수가 어째서 일개 총관 노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차라리 귀신이 부린 조화라고 믿고 싶었다.
“어째서, 왜 나를 찾아온 것이오?”
무언가 의도가 있겠지, 하고 애써 의연하려 했으나 장칠은 차마 하량을 마주 보지도 못했다.
“청해상단주가, 그가 기어이 내 목을 따 오라고 하였소?”
아무리 발악해도 어차피 죽을 거라면 마지막으로 저주라도 퍼붓고 싶었다.
“그 아이는 너 같은 자라도 살아 있기를 원했으니 본좌가 네 목숨을 취하진 않을 것이다.”
하량이 잠든 사제를 두고 나선 것은 그의 뜻에 반하는 짓을 저지르기 위함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네가 가지기엔 과분한 흔적이구나.”
장칠의 이마에 검을 겨눈 하량이 나직한 투로 속삭였다.
그저 검 끝이 스쳤을 뿐인데, 장칠이 애써 감아놓은 붕대가 투둑, 하고 끊어졌다. 이마 정중앙에는 예결이 번갯불로 지져 놓은 자리가 검게 타들어 간 채로 진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마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운 거리에 검 끝이 놓였다. 장칠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긴장을 해소하려 애썼다.
저를 총관이라 소개한 자의 손끝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두려움에 덜덜 떨리는 몸이 실수로 저 검에 닿을 것이 두려웠다.
“단숨에 도려내는 편이 좋겠느냐? 아니면 살가죽을 한 겹 한 겹 벗겨줄까?”
하량이 노래하듯 물었다.
“어, 어느 쪽이든 죽는 게 아닙니까?”
장칠은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하량은 무표정한 낯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럴 리가. 본좌의 사제, 아니지. 상단주님께서 너를 살려 놓겠다고 하지 않았나?”
어차피 진짜 총관도 아닐 텐데 앞서서 아이 운운했던 사내가 상단주에 대한 호칭을 정정하는 태도는 지독히 기만적으로 다가왔다.
“그 아이가 원했으니, 네 놈은 살아 있어야지.”
하량의 말에 장칠은 허탈해졌다.
납치당해 항주의 밤을 가로지르고, 기이한 힘을 지닌 청해상단주에게 산 채로 벼락을 맞아 지독한 고통에 휩싸였다. 선예공방 것들이 돌아오기 전에 그 자리를 벗어나고자 흙바닥을 기어 뒷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오래전, 거지새끼들이 사용하던 은신처에 몸을 숨긴 채 발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포쾌인가 하고 가슴을 졸였다.
그런데.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남았더니, 저 괴물 같은 자가 저를 살려준 이유가 고작 그런 이유에서였다니.
왜 말년에 이런 재앙에 휘말렸는지 알 도리가 없어 장칠은 눈물만 질금질금 흘렸다. 쌓아놓은 원한은 많았지만 전부 딛고 일어섰다고 여겼기에, 작금의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청해상단주는, 그는 대체 과거의 누구였을까?
장칠은 숱한 얼굴을 헤아려 보았다. 만약 누군지 떠올릴 수라도 있다면 빌어보기라도 할 게 아닌가.
그러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량은 현실에서 달아나려는 이를 무심히 굽어보며 입을 열었다.
“단숨에 도려내면 고통이 강렬할지언정 찰나에 끝날 거다. 하지만 네놈이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스스로 머리를 박고 죽을지도 모르지.”
몇 번 겪어본 결과,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
“살가죽을 조금씩 벗겨내면 죽을 위험은 덜할 거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오래 걸릴 테고 고통도 이어질 테니…….”
하량은 검을 든 손을 아래로 내렸다. 장칠은 그가 다시 패검하기를 기대하며 간절한 시선으로 그 끝을 쫓았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자, 선택하거라.”
가능하다면 저자의 발을 붙들고 애걸하고 싶었다. 그러나 애원이 통할 인간이었다면 진작에 물러났을 것이다.
“처, 첫 번째로……. 부탁드립니다.”
옷소매를 찢어 입에 문 장칠은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의 그림자만 노려봤다.
아주 느릿하게, 길고 날카로운 그림자가 다가왔다. 장칠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꽉 틀어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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