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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13화 (113/203)

113화. 드라마보다 더한 건 (1)

말갛게 밝아온 아침, 일어나 앉은 예결은 졸린 눈을 몇 번 끔뻑끔뻑하다가 하품했다.

뭔가 개운하고 후련한 기분이었다.

‘하루를 꼬박 잔 모양인데?’

이건 육체적 피로와는 무관한 정신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었다. 전생의 은원을 툭툭 털어내고 나니 마음이 가벼웠다.

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일이라 여겼는데,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어차피 복수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어제…… 잠시 깨어났다가 하량의 손에 이끌려 수음까지 해치웠다.

제 몸을 뒤에서 끌어안던 하량의 체온을 떠올린 예결의 입가에 배부른 고양이 같은 미소가 걸렸다.

몸이 보송보송한 데다가 입고 있는 침의와 덮고 있는 야금 모두 새것이다. 대사형이 자신이 잠든 사이 이 모든 걸 바꿔놓았을 걸 생각하면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흑귀가 아닌 대사형과 만리장성의 반의반의 반의반 정도를 쌓았다!

이건 예결이 항주에 오면서 전혀 기대하지 못한 쾌거였다.

“조반 들이겠습니다.”

깨어난 예결이 기척을 내기가 무섭게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세숫물을 내오더니 바로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 비록 깨작거리긴 했으나 예결은 하인이 내온 음식을 전부 해치웠다.

후환이 두려워서만은 절대 아니었다. 어제 온종일 잔 데다가 잠시 손장난을 배웠다고 기운이 쭉쭉 빨렸던 것이다.

“대사형은 어디 계시지?”

빈 그릇을 걷어가기 위해 들어온 하인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답했다.

“주인님께서는 어제 내내 공자님을 돌보시다가 오늘 이른 새벽에 출타하셨습니다.”

“아.”

예결은 역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제하량의 행동력은 대단한 편이었다. 하기야 생각한 것을 바로바로 행동에 옮기는 인간이 아니었다면 당대의 천하제일 후기지수 소리 같은 건 듣지 못했으리라.

하루씩이나 기다린 게 외려 의외로 느껴질 지경이다.

‘어쩌면 내가 어제 중간에 깨어나 있었던 일만 아니었다면 바로 움직이셨을지도.’

달아오르는 뺨을 숨기며 예결은 명령을 내렸다.

“대사형이 자리를 비우신 동안 갈 곳이 있으니 채비를 부탁하지.”

“일 다경 내로 호위와 마차를 대기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하량이 없어도 장원의 하인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마차에 오른 예결은 마부에게 미리 알아둔 장소를 언질해 주었다.

마차가 출발했다. 예결은 턱을 괸 채 창밖의 풍경을 내다봤다.

지금 그는 황 노야에게 향을 올리러 가는 길이었다.

항주의 작은 도관에 들어선 예결은 도사의 안내를 받아 황 노야의 위패를 찾아냈다. 도사가 시키는 대로 향에 불을 붙인 예결은 어정쩡하게 두리번거리느니 그냥 눈을 감았다.

전생에 딱히 누군가의 장례에 초대될 만큼의 친분을 쌓은 적이 없고 곤륜에 들어간 후에 만난 이들 중 가장 먼저 죽었던 예결은 이 모든 게 낯설고 어색했다.

‘천천히 먹어라.’

황 노야가 어떤 말을 해줬는지는 대체로 희미했다. 그가 들려주는 충고보다는 손에 들린 음식이 더 기꺼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가슴이 꽉 조여들었다가 천천히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황 노야가 좋아하던 선예공방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 같소.”

예결은 목구멍을 간질이던 말을 툭 내뱉었다.

“거지가 참으로 비싼 밥을 먹어버렸어. 안 그럽니까?”

제 목구멍으로 넘어온 밥알까지 다 헤아려도 선예공방을 돕겠다고 저지른 일은 손해였다. 대사형까지 동원해서 이게 다 뭐란 말인가.

하지만, 조금 머쓱하긴 해도 기분이 마냥 나쁘지 않았다.

‘왜 자꾸 거지한테 먹을 걸 낭비해요? 나는 갚지도 못할 텐데.’

‘그냥 먹으라고 준 거지, 뭘. 이런 거라도 기대할 게 있어야 내일이 살만하지 않겠냐.’

그때 황 노야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추더니 한참 있다가 툭 내뱉었다.

‘살다 보면 여유가 생기고, 또 여유가 생기면 돕고 싶은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지. 그때 그 사람 돕는 걸로 은혜 갚는 셈 쳐라.’

“……그래도 잘 먹었소.”

예결은 돌아서려다가 문가에 서 있는 구영익을 발견했다. 손에 무얼 잔뜩 들고 있던 남자의 눈이 소의 눈망울처럼 그렁그렁했다.

워낙 오가는 사람이 많다 보니 기척을 무시하던 중이라 구영익의 등장을 알아채지 못했다. 등 뒤에 버티고 선 호위가 이를 알리지 않았다고 탓하기도 난처했다.

구영익이 원체 무해해 보이니 예결이 향을 올리는 걸 굳이 방해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으리라.

“구 장인이로군.”

예결의 말에 눈가를 훔친 사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장인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런 호칭은 저기 황 노야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지요.”

단순한 겸양이 아니라 황 노야를 진심으로 흠모하는 티가 났다.

“자네도 향을 피우러 왔나 보군. 나는 이만 갈 생각이니 편히 일 보게.”

“아이고, 잠시만요.”

구영익이 손을 뻗었다. 그러나 호위 둘이 팔을 뻗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검집에서 뽑지 않았다곤 하나 진검일 게 분명한 검이 교차한 걸 본 구영익은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이었다.

“차, 차, 차, 차 한 잔이라도 대접하게 해 주십시오! 여기 근처에 좋은 다관이 있습니다!”

덜덜 떨면서도 구영익은 할 말은 다 했다.

저렇게까지 겁을 집어먹었으면서도 용케 도망 안 간다고 생각한 예결은 구영익의 용건이 궁금해졌다.

‘대사형 일은 언제 끝나시려나?’

저번에 옷 가게로 찾아왔던 것처럼 장칠의 일을 마무리하면 자신을 찾아올 거라 판단한 예결은 구영익에게 턱짓했다.

“안내하게.”

구영익이 안내한 곳은 규모가 아담하긴 해도 고즈넉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다관이었다.

‘대사형은 차를 좋아하시니 항주를 떠나기 전에 여기 한번 들를까?’

예결은 우아하게 잔을 들어 올렸다. 맨날 하량을 힐끔힐끔 훔쳐봐서 그런지 다례(茶禮)가 몸에 익었다.

전생에는 하량이 하는 걸 흉내 내도 어설프기만 했는데, 다시 태어난 후 몸으로 하는 일은 정말 빨리 익히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에스퍼의 학습 능력은 사기였다.

“은인께서는 상단주라고 들었습니다.”

큼큼 목청을 가다듬은 구영익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아.”

하량이 앉혀준 자리지만 일단은 청해에서 제일가는 상단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긴 했다.

“오삼상단주가 퍽 요란을 떨어서 알게 된 모양이군. 그래, 나는 상단 하나를 거느리고 있지.”

“저희는 오삼상단에서 풀려나자마자 다시 선예공방을 재건하고 있습니다. 성주님께서 장 상단주가 부당하게 앗아간 돈을 돌려주셨거든요.”

“그거참 다행이로군.”

성주가 오삼상단을 쏙 빼먹을 법도 한데, 황제에게 고발하겠다고 적어놨더니 이건 삼키면 탈이 날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이건 또 의도하지 않은 순기능이었다.

“제 말은.”

예결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사무적으로 반응하자 다급해진 구영익이 말을 하다가 삑사리를 냈다.

찻잔을 들어 입을 가리자 민망스러움을 숨기지 못한 구영익은 목을 큼큼 가다듬더니 예결을 바라봤다.

“서, 선예공방이 다시 염색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면 그때부터 은인의 상단에 천을 납품하고 싶습니다.”

소위 말하자면, 은혜 갚은 까치가 되고 싶다는 소리였다.

“제가 말을 꺼내긴 했지만 다들 동의했습니다. 모두 상단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구영익은 열성적으로 선예공방의 상황을 설명했다.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항상 보상이 뒤따르는 건 아니지만, 이번엔 운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예결은 눈을 내리깔았다.

“음…….”

뜸을 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송아지 눈망울처럼 맑은 구영익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뭔가 눈빛 공격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예결은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르고 입을 열었다.

“오삼상단에서 자네들이 염색한 천을 봤네.”

“예…… 제가 직접 선보였지요.”

그 냉정한 말에 구영익이 바짝 굳어서 답했다. 분위기가 경직되어 주변 온도가 약 삼 도 정도는 내려간 듯했다.

“솔직하게 말하지.”

애써 구영익의 시선을 외면하며 예결은 말을 이어갔다.

“황 노야가 봤다면 뒷간에나 가져다 놓으라고 했을 비단을 왜 내가 유통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물론 예결은 그 비단에 얼룩이 생긴 이유가 선예공방의 기술력 미달 탓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현대에서 배워온 고급 진상 기술에 당한 장칠이 어떻게든 결과물을 기한 내로 선보이려고 구영익을 비롯한 장인을 닦달했기 때문에 생긴 하자다.

하지만.

“나는 청해상단의 주인이네. 주로 서역의 귀한 물건과 사천의 촉금을 취급하지. 자네는 선예공방에서 내게 공급할 수 있는 비단이 그 정도의 품질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나?”

구영익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사천의 비단은 여타의 비단과 다르다. 촉금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불릴 정도로 중원에서 손꼽는 품질을 가지고 있었다.

서역 물건을 중원에 팔아서 벌어들이는 돈만큼은 아니어도, 촉금을 외국에 유통해서 상단이 얻는 이문은 평범한 수준이 아니었다.

“아무리 명망 높은 상단이라도 하급품을 취급하면 이름값이 떨어지기 마련이지. 그러니 내 그대의 청을 거절할 수밖에.”

“그렇……습니까.”

소 같은 눈망울이 축 처졌다.

아무리 예결이 에스퍼라지만 아무 이유 없이 인성질을 한 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선예공방의 장인들은 예결이 장칠의 상황에 개입했음을 알 수밖에 없다. 예결이 다녀가자마자 오삼상단이 뒤집히고 저들은 자유의 몸이 됐을 테니까. 증거는 없지만 심증은 충분한 상황이다.

지금이야 다들 고마운 마음이 크니 선예공방은 없는 살림으로라도 어떻게든 돕고 싶을 것이다. 생산할 수 있는 물량을 전부 예결에게 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지.

하지만 예결이 생각하기에, 이건 공방의 존속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선예공방은 지금 뿌리가 반쯤 뽑힌 상황이다. 저들이 오래가려면 다시 항주의 사회에 녹아들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쪽 끝에서 활동하는 상단이 아니라, 여기 항주에서 저들이 오래 손을 잡고 일했던 거래처와 다시 연을 맺어야 한다.

‘순박하기는. 오삼상단 일로 거래처를 한두 군데로 좁히면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을 텐데…….’

“하면.”

오래 침묵하던 구영익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희가. 선예공방이 청해상단에 누가 되지 않을 정도의 제품을 다시 생산할 수 있게 되면, 그때 다시 청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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