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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14화 (114/203)

114화. 드라마보다 더한 건 (2)

예결을 바라보는 구영익의 시선에는 자부심이 넘쳤다.

선예공방이 반드시 예결의 드높은 기준을 맞출 수 있을 거라는 확신 가득한 얼굴에 예결은 구영익이 낯설게 느껴졌다.

“무려 촉금에 준할 정도의 물건을 만들어 오겠다고?”

예결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저희는 비단을 염색하는 공방이지 비단을 짜는 공방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촉금도 저희 공방에서 염색하면 얼마나 곱겠습니까?”

옛 기억과 오삼상단에서의 재회가 맞물려 퍽 소심하다고 여겼던 사내는 의외로 변죽이 좋았다.

“서왕모의 비단옷 같을 겁니다.”

예결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삼켰다. 구영익이 하는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짝귀가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 편이다. 그런 재능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사파의 삼류 낭인이 제법 성공한 상인이 되어 상단까지 차렸겠는가?

예결은 침묵했다.

“그렇다면 선예공방에도 청해상단과 거래할 자격이 있겠지요?”

보은이 아니라 거래라.

예결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눈물도 많고 곰 같은 사내처럼 보였는데 눈치가 엄청 빠르다.

빈 찻잔을 앞으로 밀어낸 예결은 구영익에게 툭 질문을 던졌다.

“포기한 줄 알았는데. 거래를 청할 줄이야. 의외로군.”

“아.”

구영익이 눈가를 조물조물 만지작거리더니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제가 생각에 잠기면 좀 불쌍한 얼굴이 되는 편입니다.”

협상할 때 은근히 쓸만하다고 너스레를 떠는 사내는 장칠이 드리웠던 그림자일랑 훌훌 털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공방을 복구하고 제대로 된 샘플, 아니. 견본을 만들면 내게 가져오게.”

“그렇다면……!”

구영익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감사합니다! 상단주님!”

우렁찬 목소리에 다관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에 집중되었다. 예결은 한숨을 삼키고는 쌀쌀맞은 투로 덧붙였다.

“너무 좋아하지 말게. 당분간은 항주에서 지낼 예정이긴 하지만 견본이 늦어지면 청해로 돌아가버릴 거니까.”

반쯤은 협박에 가까웠지만 어쨌거나 구영익의 청은 받아들여진 셈이다. 남자는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싱글벙글 웃었다.

“아무렴요. 선예공방의 진짜 저력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나가는 길 내내 구영익은 굽신거렸다. 그게 너무 비굴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재주라면 재주였다.

‘만면에 미소가 가득해서 그런가.’

도망치듯 걸음을 옮긴 예결은 호위의 안내를 따라 마차를 세워 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당연한 말이지만 무림에 발렛파킹 같은 건 없는 데다가 마차가 다니는 도로와 사람이 다니는 인도가 뒤섞여 있는 까닭에 자가 마차가 있어도 어느 정도 불편은 감수해야 했다.

번화가를 가로지르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예결을 불러세웠다.

“문 공자!”

부름에 고개를 돌린 예결은 뜻밖의 인물을 마주치고 눈을 크게 떴다.

“당 소가주……?”

당세기였다.

“문 공자를 여기에서 만나게 될 줄 몰랐습니다. 어쩐 일로 청해에서 중원의 동쪽 끝까지 오셨습니까?”

“저야 청해상단의 거래처 일로 여기까지 왔지요.”

예결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주워섬겼다. 대사형이 무림인만큼이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직업을 엄선해 줘서 다행이었다.

“그러는 당 공자야말로 사천에서 항주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그게 실은…….”

당세기가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사천당가에서 가장 자주 만났던 인간이 당서악이었던 예결에게 저 풋풋한 반응은 여간 신선한 게 아니었다.

“제가 연모하는 분이 항주의 천을 좋아한다고 들어서……. 선물을 사러 왔습니다.”

‘오……. TMI 좀 있는 타입이구나.’

만약 현대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다면 부모님도 보고 담임선생님도 보는 일기에 짝사랑 이야기를 줄줄이 쓸 것 같은 유형의 인간이었다.

“운이 좋았는지 황보 소저께서도 때마침 항주에 계신다더군요.”

그냥 선물 사러 왔다가 짝사랑하는 소저를 만나게 되어서인지 눈에 기쁨이 뚝뚝 흘러넘쳤다.

당서악과 같은 집안사람이면서 이 정도로 다르니 어색할 지경이었다.

과연 남궁운이 소개해줄 만큼 순하디순한 성격이었다.

‘사천당가…… 앞으로 괜찮은가.’

“혹시 괜찮으시다면……. 문 공자께서 제가 선물을 고르는 걸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당 공자께서 연모하는 소저가 누구신지도 모르는데, 어찌 취향을 알고 선물을 골라드릴 수 있겠습니까?”

당세기가 하하, 하고 경쾌하게 웃었다.

“그냥 같이 가주시기만 해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제가 운이 나쁜지 어릴 적부터 사기꾼을 자주 만나 아버님께서 심려가 크셨거든요.”

예결은 말문이 막혔다.

운이 나빠 사기꾼을 자주 만나는 게 아니라 상인이라면 한번 속여보고 싶을 정도로 순박해 보여서 사기꾼으로 돌변했던 게 아닐까.

중원이든 현대든 누울 자리 보면서 발 뻗는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정말 사천당가…… 앞으로 괜찮은가.’

술자리에서 어렴풋이 남궁운보다 연상이라고 들었는데 다람쥐처럼 말랑말랑해 보이는 얼굴은 천생 연하 같다.

“음.”

예결은 주변을 휙 둘러봤다. 아직 대사형이 나타날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이대로 장원에 돌아가기보다는 번화가에서 우연을! 가장한 마주침을 노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야 데이트 비슷한 거라도 시도해보지 않겠는가.

“좋습니다.”

예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운이 소개해준 만큼, 당세기의 마음을 잘 사로잡아 놓으면 사천에서 청해상단이 활동하는 것도 훨씬 편해지리라.

그렇게 기묘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당세기는 의외로 낯가리는 성격이 아닌지 나란히 걸음을 옮기며 짝사랑하는 여인의 이야기를 줄줄 털어놓았다.

“황보 소저는 정말 또래 중에서도 성취가 특출난 분이지요. 남궁 공자께서 용봉회주 자리를 내려놓으시면 다음은 황보 소저의 차지가 될 거라는 말도 있습니다.”

장담하는데, 무림 후기지수의 절반은 당세기의 짝사랑을 알고 있을 거다.

어쩌면 저 황보 소저도…….

예결은 속으로 조용히 당세기의 짝사랑을 애도했다.

사천당가의 소가주가 호감이 있다는 소문이 온 강호에 짜한데 상대 소저가 별 반응이 없다는 건 결국 차였다는 뜻 아니겠는가.

“황보 소저라 함은 한둘이 아닐 텐데, 어느 소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자신이 아직 상대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당세기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 그게. 금호봉 황보율희 소저입니다.”

그나저나 황보 소저라.

“……설마?”

예결은 대사형의 구 썸녀를 떠올렸다. 황보세가 출신이었고 당시의 무림사봉 중에서도 채봉이라 불렸던…….

“예. 황보세가의 가주이신 황보약린의 유일한 딸이고 황보세가의 소가주이신 바로 그 황보율희 소저입니다.”

맞아, 저 이름이었어!

당세기는 예결이 뇌까린 혼잣말이 자신에게 한 말인 줄 알았는지 가슴을 펴고 본인이 더 자랑스럽다는 듯 말하고는 어깨를 흥겹게 들썩였다.

하지만 예결은 당세기에게 반응해 주기에는 약간 얼이 빠진 상태였다.

중원은 이렇게 넓고 교통수단도 애매한데 어떻게 또 항주에서 채봉의 딸을 마주치나 싶었다.

‘아니지.’

오히려 다행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 채봉에게 자식도 있다니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 혼례를 올린 것일 터다.

예결은 채봉, 아니지.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약린과 그녀가 이룬 가정에 나직한 축복을 기원하고 당세기를 이끌었다.

“제가 아는 가게가 있으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문 공자만 믿겠습니다.”

포목상 주인은 버선발로 튀어나와 예결과 당세기를 맞이했다.

“오. 여기 상인은 정보가 빠르-”

“아이고, 문 공자님! 또 오셨습니까?”

예결은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제하량의 충동구매로 거의 올 일도 없는 항주에서 VVIP가 된 모양이었다. 이게 다 아침밥이 쏘아 올린 불꽃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당세기는 본인을 알아보고 다가온 줄 알았는지 큼큼하고 나서려다가 상인이 예결 앞에서 급브레이크를 걸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헉. 역시 문 공자가 큰 상단의 주인이라 항주의 상인들도 알아보는 모양입니다.”

전음도 쓸 수 있으면서 대체 왜 귓속말을 한단 말인가?

정말 볼수록 다람쥐 같았다.

‘저 정도면……. 적을 만났을 때 암기 대신 도토리를 던지는 거 아닌가?’

애써 잡생각을 털어낸 예결은 상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번처럼 천을 보여주게.”

이번에는 이 층으로 안내되었다. 귀한 고객을 위해 따로 마련해 놓은 자리인지 위층에서 옷감을 내려다보다가 고르면 하인이 가지고 올라오는 식이었다.

당세기는 아주 신중하게 천을 고르며 매번 예결의 의견을 물었다.

“저는 저 황금색이 좋은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너무 밝으니 입는 사람의 얼굴이 어두워 보일 것 같습니다.”

“역시 황보 소저의 품격을 뒷받침하는 천을 고르기란 어렵군요. 그럼 보라색은 어떻습니까?”

“그건 너무 쨍합니다.”

당세기가 심각한 얼굴로 주접을 떠는 걸 구경하던 예결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경장 차림의 여인이 막 가게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었으나 머리에는 발랄해 보이는 보요를 달고 있었다.

새로 고른 천에 대해 예결의 의견을 물어보려다가 그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바라본 당세기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헉.”

심상치 않은 반응이었다. 당세기가 내내 입 아프게 떠들던 말을 들었기에 저런 반응을 보일 만한 인물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혹 저분이……?”

당세기가 고개만 끄덕끄덕 움직였다. 삽시간에 벌게진 얼굴을 한 당세기는 황보율희와 말이라도 섞었다가는 기절할 것처럼 보였다.

“황보 소저께서는 미인이시군요.”

드물게도 예결은 진심 어린 감탄을 내뱉었다.

워낙 미형이 많은 에스퍼 사이에 둘러싸인 채로 크다 보니 어지간한 이를 대상으로는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대단한 미남이나 미녀를 만나도 객관적인 미추를 구별하는 선에서 그치곤 했다.

그런데 황보율희는 달랐다.

원체 아름답긴 했지만, 눈에 쏙쏙 들어오는 이목구비 하며 분위기가…….

“역시 그렇지요?”

당세기가 신이 나서 떠들었다.

“인사를 하러 갈 생각인데, 함께 가시겠습니까? 남궁 공자의 소개로 만난 지인이라고 하면 분명 황보 소저도 문 공자를 반겨주실 겁니다.”

하지만 이맛살을 찌푸린 채 황보율희의 얼굴을 뜯어보기 시작한 예결은 이미 당세기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잠깐. 잠깐만.

‘아니…… 그럴 리가. 하지만.’

예결은 입을 틀어막았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황보율희가 곱다고 생각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좀 더 젊은, 아니 어린 시절의 제하량과 황보율희는 퍽 닮아 있었다. 곤륜에 갓 입문했을 즈음의 소년 제하량이 소녀였다면 딱 저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대사형을 이렇게나 닮았으니 상대가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밖에.

불현듯 현대에서 유행을 탔던 드라마의 대사가 떠올랐다.

그걸 이 상황에 적용하면…….

‘율희, 하량이 딸이에요.’

제가 생각해 놓고도 헛소리 같았다. 그러나 예결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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