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15화 (115/203)

115화. 드라마보다 더한 건 (3)

순간 아찔한 기분에 예결은 마른세수했다.

여기가 다관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것을 줄줄이 뱉어낼 뻔하지 않았나.

“문 공자?”

당세기가 예결의 이상 반응을 감지했는지 의아한 얼굴로 돌아봤다.

‘일단…….’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준 예결은 최대한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곤륜참사가 일어난 후, 무려 이십 년이 흘렀다고 했다.

현대의 한국보다 더 보수적인 곳이 중원무림이다. 제하량의 나이라면 이미 가정을 이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중원의 상식 기준으로 봤을 때 대사형이 여태 솔로인 게 오히려 기적인 셈이다.

‘가진 것에 감사하자…….’

예결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벌써 정신을 놓을 수는 없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황보 가주께서는 어떤 분과 혼례를 올리셨지요?”

일단 황보약린이 기혼자인지 확인한다.

다시 태어난 후, 예결은 무림과 곤륜이, 그리고 제하량이 정말로 존재했던 건지 아니면 그저 자신의 망상인지 확인하기 위해 장르 소설을 미친 듯이 읽었던 시절이 있다.

그리고 무협지에서 옛 연인이 큰 전투에서 희생되거나 누명을 쓰고 마도의 간자로 쫓기는 주인공의 아이를 남몰래 낳아 키우는 건 클리셰 중의 클리셰다.

보통 이럴 때는 살아 돌아오거나 누명을 벗은 주인공과 결혼 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현실에서 그런 해피엔딩은 곤란해.’

소설을 읽을 때야 재회한 커플을 내심 응원했다지만 이번만큼은 이야기가 달랐다.

예결은 스산하게 속으로 뇌까렸다.

‘제발. 토끼처럼 귀여운 남편. 여우같이 요염한 애인. 사슴 타입 청순한 구남친.’

천지신명 대신 당세기가 예결의 기원에 응답했다.

“아. 산동악가의 악주천이라는 분입니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말인즉슨 악주천은 지난 세대의 삼룡 삼호 사봉에 들지 않았다는 뜻이다.

‘강호에 나선 적이 없으니 유명인만 알고 있는 게 이럴 땐 불편하네…….’

일단, 채봉 황보약린의 남편이 따로 있다는 소식에 예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혼 후 재혼이라는 루트는 막힌 거나 마찬가지다. 별로 이름나지 않은 사내를 남편으로 들인 걸 보면 황보세가와 산동악가 사이의 정략결혼일 가능성이 크다.

‘무림은 워낙 험한 곳이니 사별이라는 것도 있지만……. 황보세가에서 곱게 보호받고 있을 테니 어지간하면 안 죽겠지.’

예결은 악주천의 무병장수를 빌며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당세기를 바라봤다.

남들은 황보세가 가주만 기억하지, 무명을 별로 날리지 않은 남편에 대해서는 잘 모를 텐데, 함께 있었던 사람이 당세기라 뜻밖의 이득을 얻었다.

‘조금 도와볼까?’

“인사라도 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예결은 매대 뒤에 숨어서 어떡해 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당세기에게 관대하게 제안했다.

“그, 그, 그래도 될까요? 제가 쫓아온 거라고 생각하시면!”

“……먼저 와 있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그렇군요.”

좋아하는 존재와 한 공간에 있다는 이유로 정상적인 사고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예결은 당세기에 비하면 자신은 역시 양반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채근했다.

“여기에서 만나게 될 줄 몰랐다고 하시고 반갑게 인사하신 다음 자당의 선물을 고르는 중이었는데 도와달라고 부탁하십시오. 아무래도 같은 여성의 안목을 빌리고 싶다고. 그리고 황보 소저께서 흔쾌히 도와주시면 답례라고 선물을 건네주시는 겁니다.”

예결은 빠르게 당세기를 코칭했다. 좋은 정보를 줬으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거였다.

“가, 같이!”

당세기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같이 가주십시오.”

예결은 거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황보율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일단 대사형을 많이 닮은 얼굴이다 보니 자꾸 시선이 가는 건 불가항력이다.

“……제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 공자가 원하신다면야.”

“감사합니다!”

당세기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사촌인 당서악을 몰락시킨 원흉이라고 고백해도 그럴 수 있다며 등을 두드려줄 것 같았다.

남궁운이 정말 기가 막힌 인간을 소개해 줬구나 싶어 예결은 속으로 감탄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당세기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체로 ‘할 수 있어.’ 라든가 ‘부끄러운 꼴은 보이지 말자.’ 같은 다짐이었다.

에스퍼의 청력 덕에 그 말을 전부 들을 수 있었던 예결은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갈수록 서서히 변하는 당세기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문득 예결은 당세기에게서 익숙한 당서악의 모습을 발견했다. 당세기가 낯을 가려서 표정이 사라지니 사천당가 특유의 차가운 생김새가 두드러지는 모양이다.

‘저 안에 들어 있는 게 부디 이 도토리를 받아달라며 덜덜 떠는 다람쥐라 그렇지…….’

얼굴만 멀쩡해졌을 뿐, 황보율희를 향해 걸어가는 당세기의 속도는 달팽이 같았다. 예결이 그의 등을 슬쩍 떠밀어준 후에야 당세기는 평소의 속도로 돌아와 황보율희에게 당도할 수 있었다.

“황보 소가주님. 여기에서 만나는군요.”

놀랍게도 당세기는 황보율희의 앞에서 퍽 유려하게 말했다. 비록 목소리가 기어들어 갈 것처럼 작아지긴 했으나 여기에서 그의 말을 듣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조금 우기면 당세기가 수줍음이 많다기보다는 그냥 조용조용한 사람이라고 착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 소가주. 오랜만입니다. 사천에 계셔야 할 분을 항주에서 만나게 되니 놀랍군요.”

황보율희는 그래도 사교성이 있는 편인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일이 있어 낙양에 다녀오다가, 어머니의 생신 선물을 사러 항주에 오게 되었습니다. 여기 비단이 질이 좋다고 들어서요.”

‘오……?’

제법 코칭한 대로 따라오는 걸 보니 그래도 차기 가주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긴 한 모양이다.

“항주의 비단이 빼어나다지만 어디 사천의 촉금만 하겠습니까?”

“제가 안목이 부족하여…….”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예상 문답 외의 말이 나오자 당세기가 자신감을 잃었는지 금세 말꼬리를 흐렸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 싶어서 예결은 또 당세기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당세기가 준비된 말을 쏟아냈다.

“혹시 황보 소가주만 괜찮으시다면 천을 고르는 것을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요리사 조종하는 생쥐가 된 느낌이군.’

예결은 내심 혀를 찼다.

황보율희는 고민하는 듯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황보세가도 오대세가인 만큼 사천당가와 교류가 있는지 황보율희는 당세기의 모친을 위한 비단을 몇 필 쓱쓱 골라냈다.

“지난번에 뵀을 때 청금색 장신구를 하고 계셨으니 이런 하얀 비단이 좋을 것 같습니다. 또 자당께서는 우아한 분이시니 옥색 비단도 무척 어울리실 것 같고요.”

당세기를 방패로 내세운 예결은 신중하게 옷감을 골라내는 황보율희를 조용히 지켜봤다. 대사형과 비슷한 면모가 얼마나 더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황보율희는 당세기보다 조금 더 어려 보이는 나이였으나 기백이 상당했다. 하량보다 선이 곱고 부드러워 보이는 얼굴인데 조금 인상을 찌푸리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철렁하게 만든다.

어쩌면 바로 옆의 당세기가 황보율희의 반응에 일희일비하고 있기 때문에 더 드라마틱하게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깊은 친분이 없고 그저 가문 대 가문으로 만난 당세기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걸 보면 상냥한 편이다. 갑작스러운 일정임에도 제법 진지하게 선물을 고민해주는 걸 보면 고지식한 성격이다.

또……

예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런 걸로 황보율희가 제하량의 딸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데 전전긍긍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질문을 던져야 하는 상대는 따로 있었다.

“그나저나, 당 소가주님의 일행분은 누구십니까?”

놀라서 고개를 돌린 예결은 황보율희와 눈이 마주쳤다.

대사형이라기보다는, 오래전 곤륜에 찾아왔던 채봉 황보약린을 닮아 있는 눈이었다.

“처음엔 당 소가주의 수행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저와 눈이 마주치고도 피하지 않으시는 걸 보면 역시 친우분이셨던 것 같습니다만…….”

무인이다 보니 예결이 힐끔대는 걸 알아챈 모양이다. 그래도 노골적으로 관찰한 건 아니었기에 황보율희의 시선에는 의심보다도 호기심에 가까운 감정이 묻어났다.

“아, 저는 무림인이 아니라 일개 상인으로, 황보세가의 소가주께서 아실 만한 이름은 아닙니다.”

예결은 겸양하며 물러나려고 했다. 황보율희가 뭐라 말하기 전에 당세기가 쓱 끼어들었다.

“이분은 청해상단의 주인인 문예결 공자입니다.”

누가 봐도 새로 사귄 친구를 자랑하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청해상단주셨다니. 제가 인사가 늦었군요.”

황보율희가 예결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황보세가의 황보율희입니다.”

예결은 황보율희가 예의상 청해상단을 아는 척한 건지, 아니면 역시 대사형이 자신에게 넘겨준 이 상단이 지나치게 대단한 건지 잠시 고심하다가 표정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청해상단의 문예결입니다.”

무공을 모르는 무해한 일반인인 척, 엉거주춤 고개를 숙이자 황보율희가 배꽃처럼 흰 미소를 지었다.

당세기한테 관대한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황보율희는 좀 서투른 사람한테 잘해주는 성격인 모양이다.

예결이 침착하게 황보율희를 분석하는 동안, 당세기의 쇼핑도 끝났다.

상인을 불러 전표로 대금을 치른 당세기는 그중 황보율희에게 어울릴 것 같은 청람색과 연한 녹색의 비단을 골라냈다.

“황보 소가주. 부디.”

뻣뻣한 관절에 기름칠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황보율희의 표정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이건……?”

소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태 함께 골라주신 보답입니다.”

예결은 당세기의 뒷목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걸 발견했다. 무림인이라 어지간하면 신체의 반응을 조절할 수 있을 텐데, 긴장을 많이 한 눈치였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황보율희가 조금 어색한 듯 정중하게 비단을 받고 상점 밖으로 나갔다. 당세기는 잠깐 휘청하더니 이내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로 옆에 서 있어서 그를 얼마든지 잡아줄 수 있었던 예결은 일부러 지켜보기만 했다.

잠깐의 변덕으로 당세기를 돕긴 했다지만 예결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과 닿는 게 질색인 에스퍼였다.

사천당가의 직계치고는 서글서글한 성격인 당세기가 왜 잡아주지 않았냐고 따질 것 같지도 않았다. 설령 원망의 말을 듣는다 해도 무공을 배운 적 없는 일반인이라 갑작스레 쓰러지는 모습에 제때 반응할 수 없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무림인이 아니라는 건 그야말로 만능 변명이나 다름없었다.

“감사합니다!”

당세기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외쳤다. 잡아주지 않았다고 원망할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으나 바닥에 주저앉은 채 저렇게 해맑아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정말……. 무언가 선물해본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아니, 소가주 씨 당신 여기 황보 소저 선물 사러 왔다며?’

예결은 당황스러움에 물었다.

“황보 소저의 선물을 사러 항주에 왔다고 들은 것 같은데…… 제가 틀렸습니까?”

“그게…… 항상……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요.”

왠지 알 것 같았다.

예결은 그 말을 입에 담는 대신 이해한다는 시선을 던졌다. 당세기의 어깨가 중력의 영향을 받아 자유낙하를 하는 게 보였다.

“제가 떨어뜨린 물건인 줄 알고 황보 소저께서 주워주신 적도 있습니다.”

“상냥한 분이시군요.”

“무척 좋은 분입니다.”

당세기는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추후 다시 사천에서 문 공자를 뵙게 되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이 영광을 〈가이드와의 시작은 이렇게〉와 〈에스퍼 전용 플러팅 기초 회화〉를 집필한 에스퍼 센터 집단지성에 바칩니다.’

심화 버전도 있지만 그건 사용자의 역량이 뒷받침되어야 해서 피했다.

‘그래도 좀 나아졌군.’

머리가 복잡한 탓에 일부러 가볍고 실없는 생각만 하려고 애쓴 보람이 있었다. 당세기가 우당탕 움직이는 모습도 제법 도움이 됐다.

어차피 이건 당사자인 제하량에게 물어보기 전까지는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다. 심지어 대사형도 이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모를 수도 있지 않나.

그러니까 예결은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저는 이만 장원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거기 가면 대사형이 있을지도 모른다.

온종일 하량이 언제쯤 나타날까, 하고 인파를 가만히 들여다보곤 했는데, 지금은 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 침상 위에서…… 분명 꿈은 아니었는데.’

“이런, 제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요.”

당세기가 화들짝 놀라 예결을 놓아주었다.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일은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응. 이쪽도 못 잊을 거다.

당세기와는 다른 의미로 황보율희가 망막에 콱콱 박혀버린 예결은 한숨을 숨기고 비즈니스 미소를 지어준 뒤 당세기와 헤어졌다.

예결은 고개를 숙인 채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장원으로 돌아가 대사형과 얼굴을 마주할 생각을 하면 가슴이 날뛰었다. 온종일 예결을 설레게 했던 어제의 사건과는 결이 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당세기가 황보율희를 상대하는 동안 예결은 머리를 식힐 수 있었다.

예결은 하량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까.

‘최대한 빠르게 답을 받아내면 그만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황보약린과의 관계를 대사형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다. 제하량이 거짓말을 일삼는 사내는 아니지만, 이미 혼례를 올린 여인과의 과거사에 대해 떠들고 다닐 인물도 아니었다. 그에게 묻는다고 한들 예결이 원하는 날것 그대로의 진실은 입에 담지 않으리라.

적나라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또 몰랐다.

다만 예결이 순진하고 선량한 사제로 남고자 마음먹은 한 이는 불가능한 방법이다.

하지만.

예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갈색 눈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그에겐 이 질문에 답해줄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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