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드라마보다 더한 건 (4)
예결과 하량은 항주를 떠나 장강 유역으로 향했다. 이번엔 교룡왕이 직접 마중을 나오진 않았으나 그녀가 마련했을 배가 두 사람을 태우고 길고 긴 강을 따라 이동했다.
장강은 중경을 가로질러 그들을 사천 외곽에 내려놓았다.
하량은 함께 배에 탔던 적뢰의 상태를 확인하는 척, 무언가 생각에 골몰한 사제를 관찰했다.
항주에서 돌아오는 길 내내, 예결은 어쩐지 조용했다.
어느 정도는 넋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 같다고 하는 표현이 적절하려나.
식사를 하는 중에 무심코 천년뇌각망을 쓰다듬으려 했으니 역시 그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량은 예결에게 왜 그러느냐는 질문을 던지거나 애써 속내를 캐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량은 자신의 품에서 발그레하게 익어가던 예결을 떠올렸다.
흑귀가 아닌.
자신의 품속에서.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라도 예결이 원래대로 돌아온다면 상관없다고.
하지만 이건 하량의 예상보다 달았다.
‘지나칠 정도지.’
원래의 관계는 뒤틀렸다.
본디 대사형이라는 위치는 하량에게 있어서 예결과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하나 도리어 그 관계 때문에 사제는 하량을 피해 다니기까지 했다.
예결은 아득바득 하량이 아닌 타인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하필 예결이 걸음이 향한 곳은 흑점이었다.
‘운도 없지.’
흉측한 거죽 밑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하량이라는 걸 전혀 모르면서도 본능적으로 깨닫기라도 한 건지 흑귀에게 부드럽고 연약한 몸을 내어 바쳤다.
흑귀의 품에 안겨 눈가가 짓무를 정도로 운 후에야 돌아온 예결을 본 순간, 하량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온전하고 오롯한 관계라 여긴 것이 생각보다 불안정한 기반 위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욕망이 다 무어라고.’
어차피 그걸 달래주는 것조차 하량이었다.
예결이 남몰래 스스로를 달래며 엉엉 울던 밤, 하량은 그 자리에 있었다.
대사형에게 누가 될 수 없다며 흑귀에게 고해하던 밤, 하량은 그 자리에 있었다.
사제가 말갛게 웃는 낯으로 자장가를 불러 달라며 청하던 밤, 하량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 모든 밤이 다 하량의 몫이었다.
하나 예결에게 밝힐 수 없는 비밀은 거스러미처럼 자라나 그의 일부가 되었다.
흑귀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예결의 달콤한 몸을 탐하는 동안 하량은 자신의 갈증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목이 말랐기에 하염없이 제 품에 든 것을 취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자신이 욕심을 부리게 되었다는걸.
항주로의 여정은 정말 많은 것을 뒤바꿨다.
“대사형.”
거리를 성큼 좁힌 예결이 하량을 불렀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서 온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말하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예결이 용건을 말했다.
“저는 청해로 곧바로 가는 게 아니라 사천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사천?”
하량이 나직하게 물었다. 예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예공방에서 거래를 청했거든요. 비단 염색 기술은 손꼽히는 공방이니까. 나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일단 염색하려면 비단을 확보해야 하잖아요?”
“이런. 참으로 분주하구나.”
“오래 자리를 비웠으니까요.”
선량하게 웃는 사제는 정말 상단의 일 때문에 이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량은 예결에게서 친숙한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이건 기만이다.
내내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던 사제다. 그는 무언가 결정을 내렸으나 이를 숨기기 위해 비단 핑계를 대는 것이 너무도 명징했다.
다만.
하량은 눈을 내리깔았다.
예결을 다른 거짓말쟁이나 배신자와 똑같이 취급하기엔 그는 하나뿐인 사제에게 너무도 관대한 사내였다.
손을 뻗어 예결의 어깨를 쥔 하량은 예결을 ‘자연스럽게’ 제 곁에 주저앉힐 방법을 생각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와 친하게 지내는 것 같으니……. 천년뇌각망을 슬쩍 노출시켜도 되겠지.’
예결에게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사제의 입에서 남궁운이 언급되기 시작하고부터 알아본 결과, 그 후기지수는 정의롭고 선량했으니까.
그래, 마치 예전의 곤륜운룡처럼.
남궁세가에서 무슨 짓을 하려고 하면 일단 막아설 것이다.
‘하지만 사제는 내가 위험하다고 하면 믿을 거야. 언제나 그랬으니까.’
그사이 영물의 존재가 들통났다며 보호를 명목으로 예결을 십만대산으로 데려가는 거다.
그간은 예결에게 정체를 숨길 생각이었기에 그를 데려가지 않았을 뿐, 따지고 보면 오히려 중원보다는 그곳이 안전했다.
제하량을 신으로 떠받드는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까.
‘……청해상단주 자리에서는 내려올 수밖에 없겠지만.’
순간 하량의 머릿속에 예결이 청해상단을 꼭 중원삼대상단으로 만들겠다고, 또 배를 한 척 건조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 떠올랐다.
보일 듯 말 듯 한 하량의 미소가 입매에 머물렀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래.”
하량은 예결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려주고 천천히 손을 거뒀다.
“그럼, 여기에서 헤어져야겠구나. 내 적뢰를 내줄 테니 빨리 다녀오렴.”
“아니에요! 대사형도 청해에 돌아가셔야 할 텐데…….”
“어허.”
하량은 장난스레 엄한 표정을 지었다. 예결은 반사적으로 움찔하고 하량으로부터 고삐를 넘겨받았다.
“호위를 붙여주마. 그가 모습을 감춘 채 너를 따라갈 거다.”
“적뢰만큼 빠른 호위가 있어요?”
예결의 질문에 하량은 보일 듯 말 듯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중원은 넓고 고수는 많으니 찾다 보면 그만한 경공의 고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량은 직접 예결을 따라갈 생각이었다.
“원래 호위 말고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지. 그래도 삼랑이 사천에서 네 대리로 상단 일을 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구나. 곧바로 그녀부터 만나러 가렴. 그럼 호위는 알아서 내게 돌아올 테니.”
“알겠습니다.”
예결은 씩씩하고 쾌활하게 답했다.
“그럼, 내 기다리고 있으마.”
하량은 기꺼운 마음으로 속아 넘어간 대사형 역을 맡았다.
“청해에서 보자.”
사천에서 만나자.
하량의 배웅을 받은 예결은 적뢰에 오른 채 쉼 없이 달렸다. 호위를 붙일 거라고 한 하량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지 한 번도 돌아보질 않았다.
사제가 그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거리를 벌린 채 따라간 하량은 느긋한 걸음으로 사천 성도에 입성했다.
인파가 많아지니 사람들 사이에 기척을 죽인 채 몸을 숨기고 사제를 따라가기 좋았다.
하량에게 청해상단으로 직행하겠노라 약속한 사제는 그대로 황학루에 들어섰다. 사천에서 가장 큰 주루였다.
혹 남궁운과 약속을 잡은 게 아닌가 싶어 기를 퍼트려 주변을 확인했으나 무림인이라곤 그저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가 전부였다.
아직 낮이니 손님이 그리 몰려들 시간이 아니긴 했다.
‘마지막 날 사천당가의 소가주를 만났다더니…… 그에게 남궁운의 전언을 받은 건 아닌 모양이군.’
하량은 남궁운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곤륜에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귀환할 예정이었던 창궁비연대와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사천에 남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교룡왕과의 일전으로 인해 입은 내상을 치유하기 위함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남궁운은 옥형문에 틀어박혔다.
종종 그 문파의 담장 위로 전서응이 날아갔다가 돌아오곤 했다. 내부인을 구슬려 서신을 보낸 곳이 곤륜이라는 사실을 알아두었던 하량은 뇌전검룡 남궁운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뇌전검룡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면 무얼 하러 온 거지?’
하량은 사제의 돌발행동이 슬슬 흥미로워졌다.
예결에게 청해로 갈 거라고 말했으니 직접 가서 물어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예결 앞에서 언제나 제하량인 것은 아니었다.
‘벌써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품속에 든 흑귀의 인피면구를 만지작거린 하량은 눈을 빛냈다.
주루 인근의 가게로 향한 그는 옷을 갈아입고 황학루로 돌아왔다. 두 명의 여급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특실 손님 말이야. 술을 더 가져오라는데?”
“벌써? 이미 잔뜩 들어가지 않았나?”
“죽엽청이라도 상관없으니 더 내오라고…….”
뭐?
그 ‘특실의 손님’이 예결임을 알아챈 하량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마지막으로 술에 취해 흑점으로 찾아온 사제가 떠오르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한편 손님이 제때 응대를 받지 못해 불쾌함을 표시했다고 생각한 여급이 화들짝 놀라서 하량의 앞으로 다가왔다.
“방으로 안내해주게.”
“혼자십니까?”
“그래. 가장 높은 층이었으면 좋겠군.”
“이쪽입니다.”
모퉁이를 돌기가 무섭게 다른 여급이 나타났다.
“동생, 여기에서부터는 내가 안내하지.”
“아아. 네.”
[주군.]
여급을 보내고 자연스럽게 안내인 자리를 차지한 이는 삼랑이었다.
적뢰가 사천에 들어오는 순간 그 뒤를 따라올 것을 예상하였던 하량은 시기적절하게 나타난 수하에게 물었다.
[약은?]
[본디 쓰시던 건 없습니다만…….]
삼랑은 눈을 내리깔았다.
말인즉슨, 다른 건 있다는 뜻이었다.
복도를 지나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하량은 전음을 답했다. 예결에게로 향하는 길이 너무도 길었다.
[성대를 상하게 하는 거면 뭐든 상관없다.]
삼랑은 고통이 상당할 거라는 뻔한 만류 대신 옷소매에서 하얀 자기 병을 하나 골라냈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삼랑은 이를 자신의 주군에게 바쳤다.
뚜껑에 붉은 깃털을 꽂아서 표시를 해둔 게 보였다. 수하가 꽤 독한 물건에만 저런 표시를 해둔다는 걸 알면서도 하량은 병을 열어 그 내용물을 마셨다.
독 때문에 속에서부터 피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하량은 아무렇지도 않게 피를 삼킨 후, 인피면구를 덮어썼다. 축골공을 쓴 제하량의 체구가 서서히 왜소해졌다.
“그럼 물러가도록.”
삼랑은 고개를 숙인 채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예결이 어디에 있는지는 숨 쉬듯 느낄 수 있으니 안내받을 필요는 없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하량은 닫힌 미닫이문 앞에 우두커니 멈추어 섰다. 장지문 너머, 우두커니 앉은 예결의 그림자가 보였다.
사실 하량의 눈에는 그 그림자가 그림자라기보다는, 뭐랄까. 빛이 사제를 어루만지다가 생겨난 윤곽처럼 보였다.
홀린 듯 예결의 음영을 시선으로 더듬던 하량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손을 뻗어 장지문을 밀어젖히고 안에 성큼 들어선 하량은 내부에서 진한 술 내음을 맡았다.
“이거 원. 청해상단주께서 자작을 하고 계실 줄이야.”
황학루에 들어가자마자 마시기 시작한 건지 방에는 빈 병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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