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드라마보다 더한 건 (5)
술에 취한 예결은 눈앞의 사내가 누구인지 순간 알아보지 못한 듯 몽롱한 시선을 던졌다. 무방비한 사제의 모습에 하량은 내심 혀를 찼다.
‘무엇이 사제를 이렇게 만든 거지?’
“이래도 모르시겠습니까?”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지는 손을 피하지 않은 예결은 눈을 감았다. 눈꺼풀 위로 엄지손가락을 미끄러뜨리자 살짝 벌어진 입술이 숨을 토해냈다.
“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기대며 예결이 속삭였다.
“……대사형?”
“또 착각하시는군요.”
“맞아. 여긴 사천이지……. 대사형은 청해에 가신다고……. 하.”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린 사제가 몇 번이고 마른세수했다. 물을 마시려고 손을 뻗은 것 같은데 정작 술잔을 쥐고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하량은 미처 말리지도 못한 채 예결이 어깨를 몇 번 들썩이다가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지켜봤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최대한 똑바로 앉아 있는 예결이 초점이 안 맞는 눈으로 흑귀를 담으려 애썼다.
“흑귀…… 님. 오실 줄 몰랐는데. 제가 지금 몰골이 말이 아닐 텐데.”
횡설수설하다가 얼굴을 손에 파묻은 예결이 짐짓 엄격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혼자 있고 싶으니 가 주셨으면 합니다.”
하량은 자연스럽게 그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취객의 말은 그리 진지하게 듣지 않는 편이라서요.”
“……조용히 계신다면 쫓아내진 않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하량을 내치지 못한 예결의 그렁그렁한 시선이 술잔에 닿았다. 하량은 사제를 위해 잔을 삼분지 일만 채워 건네줬다.
반쯤 원망 섞인 시선이 하량에게로 향했다.
“왜……? 이것만?”
하량은 빙그레 웃으며 다물고 있는 입술을 가리켰다. 말할 수 없으니 답하지도 않겠다는 뜻이었다.
평소보다 자제력이 많이 떨어진 예결이 퍽 노골적으로 눈을 흘기더니 잔을 빼앗듯 가져가 입술을 축였다.
그렇게 얼마간 침묵이 머물렀다.
하량은 충실히 잔을 채우고 예결은 이를 비워냈다. 양이 적다고 불만조차 내뱉지 않고 그저 자주 채우게만 하는 것이, 아주 작심하고 취하려는 태가 났다.
평소였으면 교묘한 방식으로 사제를 만류했을 하량은 묵묵히 그가 취하는 것을 유도했다. 예결의 입을 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날것 그대로의 질문을 받게 되었을 때, 하량은 곧 어떤 말을 듣게 될지 전혀 모르는 채였다.
“어떡하죠?”
예결은 젖은 눈으로 흑귀를 바라봤다. 정말 기댈 곳이 그밖에 없다는 듯 간절한 시선에 하량의 입매가 굳었다.
그는 더없이 심각해졌다. 항주에서 떠나기 전날, 잠시 짝귀를 손보겠다고 자리를 비웠던 게 마음에 걸렸다. 분명 그때 예결은 외출했다가 당세기를 만나고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혹 자신이 눈을 뗀 사이 사제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조용히 있으라 했던 예결의 권고조차 잊은 양, 하량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예결은 지체 없이 범인을 고발했다.
“……대사형에게 자식이 있는 것 같아요.”
난생처음, 제하량은 당혹으로 말을 잃고 말았다.
***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 쭉 넘긴 예결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얼추 계획대로다.’
예결이 하량에게 직접적으로 황보율희의 존재와 황보약린과의 관계에 대해 물을 수 없듯, 하량도 흑귀의 모습으로 사제에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예결은 흑귀에게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문제는 흑귀가 반드시 사천에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예결은 제하량의 스케줄을 잘 몰랐다. 그의 실제 직업이 뭔지도 두루뭉술하게 숨겨진 상태인데 어떻게 알겠는가? 하지만 항주에 다녀오느라 오래 자리를 비운 걸 감안하면 흑귀는 한동안 휴가 중일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예결은 하량을 꼬여내기로 마음먹었다.
‘돌아오는 여정 내내 수상한 기색을 풀풀 풍긴 보람이 있다.’
예결은 식탁으로 가려진 주먹을 꽉 쥐었다.
꼭 사천에 가야만 한다고 주장하면서 어설픈 이유를 대고 빠져나왔다. 하량은 예결의 속내가 궁금했는지 흔쾌히 적뢰까지 내줬다.
예결은 하량에게 말한 것처럼 상단 본부로 가는 게 아니라 사천에서 가장 큰 주루로 직행했다. 일행은 없다고 다 들리게 말한 예결은 다른 요리도 없이 술만 잔뜩 시킨 채 방에 틀어박혔다.
누가 봐도 손님이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손님을 마실 게 분명한 수준으로.
‘대사형은 반응할 수밖에 없다.’
처음 술에 취했을 때는 타인이나 다름없는 사내를 찾아가 다리를 벌렸다.
그렇다면 두 번째는?
흑귀는 예결을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2안과 3안도 준비했는데 첫 번째 시도에서 대번에 성공했다.
그 결과, 흑귀의 거죽을 뒤집어쓴 제하량은 자신의 바로 옆에서 그간 사제를 심란하게 한 이유를 듣고 있었다.
질문의 답을 빨리 들을 수 있게 된 건 다행이었으나 이쯤 되니 대사형이 사탕 사 준다고 모르는 사람을 따라나서는 어린아이 같아서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정작 위험한 것은 하량의 의심을 잔뜩 부추겨 놓은 자기 자신인 줄도 모르고, 예결은 천하태평하게 대사형의 답을 기다렸다.
“자식이 있다고? 그게 나쁜 일입니까?”
제법 충격적인 질문을 던졌다고 생각했으나 흑귀의 목소리에는 별 동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이 정도로 대사형을 뒤흔드는 건 무리였나?’
“아뇨. 아뇨. 분명 좋은 일이죠…….”
속내야 어떻든, 예결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대사형에게 제가 본 걸 말씀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어요. 하지만 도저히 말할 수 없었어요.”
갈색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처연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이었다.
“저에겐, 대사형뿐인데. 대사형이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순간 두려워져서. 그만…….”
문장을 채 맺지 못한 채 예결은 흐느끼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예결의 어깨가 애처롭게 떨렸다.
하량은 말없이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예결은 이 침묵이 무얼 뜻하는지 알 수 없어 전전긍긍했다. 그나마 채봉 황보약린이 기혼자라 다행이었다.
대사형은 이미 다른 사람과 혼례를 올린 사람과 불륜을 저지를 리 없는 사람이다. 이 험하고 각박한 무림에서 제하량이야말로 이 시대의 양심 아니겠는가!
“말하지 못했어요.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죠.”
입술이 파리하게 질릴 정도로 앙다문 예결은 눈가를 쓱 훔치고 잔을 한 번 더 기울였다.
“우리 대사형…… 정말 좋으신 분이신데……. 사제라고 그렇게 아낌을 받으면서 이렇게 시커먼 생각이나 하는 제가 너무 끔찍해서…… 그래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사형의 얼굴을 마주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들어서.”
그 직후, 예결은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에스퍼는 술에 안 취하는 체질이라 다행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멀쩡한 발음으로 이유를 말해 주기는커녕 인간의 언어를 포기하고 네발로 기어야 할 정도로 마셨다. 어쭙잖은 연기만으로는 대사형을 속일 수 있을 리 없으니 이렇게 이성을 놓고 제 속내를 줄줄이 털어놓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예결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흑귀가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불쑥 내뱉었다.
“정파라 그런가? 사형을 상대로 욕정을 품은 것 가지고 유난이군요.”
신랄하기 짝이 없는 일갈이었다.
“욕정이 아닙니다!”
끔찍한 모욕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예결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잔을 쥔 예결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본 흑귀가, 제하량이 픽 웃었다.
힘줘서 깨트리기는커녕 내던지지도 못할 거면서 바들바들 떠는 꼴을 가소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뭐지?”
불쑥 되묻는 흑귀의 말은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그, 그건…….”
예결은 차마 답하지 못한 채 말꼬리를 흐렸다. 입술을 깨문 채 굳은 얼굴은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많은 바를 암시했다.
‘대사형 진짜 사파 악당 같아…….’
열연을 펼치면서도 예결은 무심코 감탄했다.
흑귀의 저열하기 짝이 없는 단어 선택과 저 비틀린 표정에서 생동감이 넘쳤다.
예결이 알던 짝귀처럼 질 낮은 삼류 낭인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위험한 사파 고수 같았다.
“응? 정파 샌님들이 좋아하는 그 낯간지러운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반쯤은 달래듯, 하지만 반쯤은 조롱하듯 묻는 얼굴에 예결은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대신, 그는 술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예 병째 입으로 가져가려는 기색을 알아챈 흑귀는 예결로부터 이를 빼앗았다.
이미 목적을 달성한 그는 사제가 계속 술을 마시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서글퍼하시니 마음이 아프군요.”
맥락상 입에 침도 안 바른 거짓말처럼 들렸다.
“어쩔까나…….”
흑귀의 입술이 달싹였다. 예결의 시선은 무심코 그 움직임을 쫓았다.
눈이 마주치면 그런 적 없다는 듯 고개를 팩 돌리는 모양새가 귀엽다는 양 피식 웃은 흑귀가 속삭였다.
“특별히 이번 한 번은 아주 저렴한 가격에 도와드리지요.”
“그게 무, 무슨 소리지요……?”
예결은 정신이 퍼뜩 깼으나 몸을 도통 가누지 못하는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는 손길로 하량을 단단히 붙들었다.
“흑점은 모든 물건을 취급하지 않습니까?”
흑귀의 은밀한 속삭임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 동아줄 같았다.
“……정보도, 분명 정보도 다룬다고 했었지.”
보일 듯 말 듯 한 크기로 일렁이는 희망을 발견한 듯 예결의 간절한 시선이 흑귀에게 와 닿았다.
이를 즐기듯 잠시 뜸을 들인 흑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때 제게 주신 그 화대처럼 대가만 받을 수 있다면야……. 흑점은 손님을 위해 무엇이든 내놓을 수 있습니다.”
천박하기 짝이 없던 밤을 암시하는 발언에 예결의 낯이 화끈 달아올랐다.
“자아,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시면 제가 알아봐 드리지요.”
비틀린 미소가 흉터로 일그러진 흑귀의 낯에 머물렀다.
“당신이 본 게 정말 그 ‘대사형’이라는 분의 가족이 맞는지.”
예결은 쾌재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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